무문관 제 47칙

재가의 선수행, 선 수행의 필독서 IV

2007-09-15     관리자

도솔삼관(兜率三關)
[무문관] 제 47칙에 다음과 같은 시공관(時空觀)을 바탕으로 하여 다룬 생사관(生死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도솔종열(兜率從悅) 스님이 수행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삼관(三關)을 설하였다.
1) 제일관(第一關) : 수행자들은 오로지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성(性)은 어디에 있는고?
2) 제이관(第二關) : 또 자성(自性)을 식득하면 정히 생사(生死)에서 벗어날지니 안광(眼光)이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고?
3) 제삼관(第三關) : 그리고 생사에서 벗어나면 곧 갈 곳을 알지니 사대(四大) 분리하여 어디로 갈꼬?
여기서 관은 한 단계, 두 단계라는 뜻이다. 즉 한 고개를 넘고 또 한 고개를 넘는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북서에 있는 관문으로 매우 험한 '함곡관(函谷關)'이 있었다. 동쪽의 중원(中原)으로부터 이 관을 넘어야 서쪽의 관중(關中)으로 갈 수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에서도 한 고개 두 고개등의 험지를 넘지 않고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도솔종열 스님도 세 가지 관을 만들어 놓고 수행자들에게 물었던 것이다.
첫째 관문을 살펴보자. "지금 그대의 성은 어디에 있는고?" 즉, 참나[眞我]를 내놓아 보라는 것이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사실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 참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화두는 다른 화두들과 같이 제자들이 스승에게 어리석은 물음을 물었을 때 어리석은 물음을 하는 존재를 일깨워주던 것과는 달리 제자들에게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즉시 그대들의 '참나'를 이 자리에서 내놓아 보아라! 라고 다그친 것이다.
둘째 관문은 정말 '참나'가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생사에 대해 자유로울 것이니 사대로 분리될 때 즉, 육신이 병들고 늙어서 썩어갈 때 생사에 초탈한 증거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바른 생사관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사대는 원래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뜻하나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90여 종류의 기본 원소를 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사를 초월했다면 죽어서 갈 곳도 알 것이니 육신이 썩어 문드러질 때 우리의 자성은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 제자에게 사후(死後)의 공간에 대한 견해까지 철저히 제시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그러나 첫째 관문을 철저히 투과(透過)한 사람이라면 둘째 관문과 셋째 관문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이것으로 선수행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인 [무문관]에 관한 소개를 마무리하고 이제부터는 우선 '간화선(看話禪)과 구두선(口頭禪)'의 참뜻을 새기고 또하나의 필독서인 [벽암록]에 관해 제창(提唱)하기로 하겠다.

간화선과 구두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간화선 수행은 임제(臨濟) 선사를 종조(宗祖)로 하는 임제종(臨濟宗)을 통해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 물질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도 방식이, 특히 일본 임제종의 경우 너무 틀에 박혀 공식화되어 버렸다는 지적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비춰지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속을 들어가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즉, 수행자의 기본 지침서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들어있는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젖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라는 구절처럼 간화선도 좋은 스승밑에서 제대로만 수행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잘못하여 조사 어록(語錄)에 담겨있는 귀절의 참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언구에 현혹되어 마치 크게 깨달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간화선을 입으로만 수행하는 구두선(口頭禪)이라고 매도하는 선어(禪語)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구두선의 폐해 때문에 야호선(野狐禪)이니 앵무새선이니 사다리선이니 하는 유사한 선어들이 홍수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암록에 대하여
원오극근(園悟克勤) 스님이 풍주( 州)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의 방장실(方丈室), 즉 벽암실(碧巖室)이란 곳에서 1111년부터 1117년까지 7년에 걸쳐 설두중현(雪竇重顯) 스님이 선문답(禪問答) . 설화(說話) . 일사(逸事) 가운데 일백제(一百題)를 골라 뽑고 여기에 자기의 견해를 운문(韻文)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설두백칙송고(雪竇百則頌古)를 애송(愛誦)하면서 자기의 선기(禪機)와 문장(文章)을 활용하여 설두 스님이 선택해 놓은 일백 칙의 화두의 머리에 결론적(結論的) 비평(批評 : 垂示)을 쓰고 화두와 송고의 각구(各句)에는 풍자적인 단평(短評: 著語)을 붙이고 다시 그 화두와 송고에 비평적인 주해(註解 : 評唱)를 덧붙여 엮은 선(禪)의 비판서(批判書)로 [무문관]과 더불어 선수행의 필독서로 널리 참구되고 있다.
그런데 [선림보훈(禪林寶訓)] 4권에 들어있는 심문담분(心聞曇賁)이 장구성(張九成)에게 보낸 편지에 [벽암록]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신진(新進)의 후학자(後學者)들은 원오 선사의 언구에 현혹되어 아침 저녁으로 벽암록에 쓰여있는 구절들을 외우는 것을 전부(全部)인 양 생각하였으며 그에 대한 그릇됨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슬픈 것은 수행자의 근성이 썩어 버린 것이다."
그 뒤 원오 선사의 법제자였던 대혜종고(大慧宗 ) 선사께서 이 악폐(惡弊)를 보고 [벽암록]의 목판을 모두 모아 불태워 버리고 스승의 주장을 과감히 배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대혜 선사가 벽암록을 태워버렸던 것이나 결국 원오 선사의 참뜻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벽암록]의 소중한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어 뒤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대중을 위해 1978년에 안동림씨가 풀어쓴 [벽암록(碧巖錄)]을 현암사에서 출판하였으며, 1988년에는 종달(宗達) 이희익 노사께서 풀어쓴 [벽암록(碧巖錄)]이 상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뒤 1933년 해인사 장경각에서 [벽암록]을 상중하 3권으로 나누어 출판하였다. 영문판으로는 1977년에 Thomas와 J. C. Cleary가 풀어쓴 [The Blue Cliff Record(벽암록)]를 Shambhala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
[벽암록(碧巖錄)] 제3칙에 다음과 같은 화두가 담겨 있다.
마조(馬祖) 스님이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무렵 그 절의 원주(院主) 스님이 문병(問病)하러 와서 "스님! 요즈음 병세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스님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하고 대답했다.
말 그대로 하면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이라는 것이 된다. 불명경(佛名經)에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이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마조 스님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긴 수명을 가진 '일면불'과 짧은 수명은 가진 '월면불' 두 분의 이름을 외쳤는데 아마 마조 스님은 자기의 죽음을 느끼면서 사람의 일생은 길다고 하면 긴 것이고 짧다고 하면 짧은 것이나 아무튼 길거나 짧거나에 관계없이 일면불은 일면불로서, 월면불은 월면불로서 각각 매우 소중한 인생이라는 것을 강조했다고 헤아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95년 8월호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른 인 관계식을 다시 이용해 보자. 일면불은 S' 좌표계에 대해 매우 빠른 속도로 상대운동을 하고 있는 S 좌표계에 사는 관측자이고 월면불은 S' 좌표계에 사는 관측자로 두 사람 모두 S' 좌표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측하고 있다고 하면 이 문제를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의 차원에 불과한 것이며 마조 스님의 외침은 이해를 뛰어넘어 전 생애(生涯)를 건 체득의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어느 고인(古人)은 마조 스님의 "일면불! 월면불!"이라는 외침에 '황하의 물은 위쪽이나 아래쪽이나 철저하게 탁해 있다[黃河徹底濁].' 라고 덧불이고 [着語하고] 있다. 마조 스님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 '황하철저탁'의 경계도 뚜렷해지리라 생각된다.
문득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생각난다. "인간의 수십 년 일생은 수십억 년인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지만 하루살이의 인생에 비하면 꽤 긴 세월이다." 자! 어떻게 하면 긴 세월이라든가 짧은 세월이라든가 하는 상대적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부디 제방의 노사(老師)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허송 세월을 보내지 말고 한 스승밑에서 "일면불! 월면불!"하고 처절히 외치며 한 동안 다리를 틀고 앉아 진득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체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일깨워 드리고 싶을 뿐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