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운문사 비로전 관음·달마도

타인의 발견

2018-07-02     강호진
사진 : 최배문

운문사 비로전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초가을 새벽공기 같은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덮친다. 나는 텅 빈 법당으로 들어가 중앙에 있는 불상을 향해 삼배를 한 후 천천히 법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에 띄게 정비된 사찰 진입로와는 달리 법당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서쪽 대들보에 묶어놓은 반야용선 모양의 용가龍架도 그대로다. 반야용선 아래로 늘어뜨려 진 줄에는 아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반야용선에 매달린 저 아이는 누군가요?” 

“저분은 악착 보살이에요. 악착같이 줄을 꼭 붙잡고 극락으로 간다고 해서요.”

오래전 법당청소를 하고 있던 승려와 나누었던 대화도 어제 일인 양 귓가에서 되살아난다. 과거 운문사를 찾은 것은 낯선 곳에 대한 충동적 열망 때문이었다. 무작정 청도 행 열차를 끊었지만 막상 청도에 내리니 할 일이 없었고, 다시 버스로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운문사에 도착했다. 그때 전각을 빠짐없이 둘러봤지만 십수 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내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승려들이 막걸리를 부어주던 처진 소나무와 비로전의 서늘한 아름다움, 그리고 악착 보살이었다. 그때 빠트린 것이 있다.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한 점의 벽화. 관음과 달마를 한 화면에 그린, 전례를 찾기 힘든 벽화를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여기에 섰다.

사진 : 최배문

대개 사찰의 후불벽 뒤편 공간은 좁다랗고 어두컴컴한 데다 잡다한 기물들까지 쌓여있어서 일없이 들어서기엔 심리적 저항감이 만만치 않은 곳이다. 게다가 후불벽 뒷면 벽화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 머리를 꺾어서 보아야 하는 높이에 위치해 있어서 제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특히 세로 3m에 가로는 5m를 훌쩍 넘는 운문사 비로전 벽화는 협소한 공간과 부족한 빛 때문에 그림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없다. 결국 벽화를 보기 위해선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관음과 달마 각각의 도상을 올려다본 후 전체 이미지를 머릿속에 짜 맞춰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요구된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 다시 말해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처럼 성당벽화를 보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을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은 환하고 널찍한 만세루로 가서 우리의 세금으로 조성한 벽화의 모사본을 보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겠다.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후반까지, 학자들에 따라 조성연대가 들쑥날쑥한 이 벽화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독자적인 두 개의 그림인 관음도와 달마도가 한 화면에 함께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벽 우측의 관음도는 『화엄경』에서 선재 동자가 보타락가산에 있는 관음보살을 순례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좌측의 달마도는 달마를 찾아온 혜가가 자신의 팔을 잘라 법을 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물론 벽화의 달마도는 암벽 산 사이로 숨겨진 듯 그려진 두 명의 조사祖師와 호랑이, 사슴 같은 동물들이 등장해 기존의 달마도와는 다른 구성이다. 그림 속 두 조사는 명대明代 화보집인 『홍씨선불기종』에 그려진 도상과 비교해보면 정체가 드러나는데,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화병을 앞에 둔 이가 중국 선맥禪脈 가운데 6조인 혜능이고, 사슴과 함께 있는 이는 인도 선맥 중 16조인 라후라다 존자이다. 이 달마도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와 조사들의 법맥을 담은 삽삼조사도卅三祖師圖. 그리고 산수화와 민화적 특색이 모두 합쳐진 독특한 그림인 것이다.

문제는 “온화하고 화려한 관음보살과 호방하고 대담한 달마 대사를 조화롭게 그렸다.”라는 문화재청의 설명과 달리 벽화 속 관음과 달마가 그다지 조화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림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곳에 배치하는 편이 나을 정도인 이 이질적인 그림들을 간신히 이어주는 것은 배경이 되는 험준한 암벽과 바위일 뿐이다. 혹시 관음은 자비의 상징이고, 달마는 지혜를 가리키니 지혜와 자비의 원융함을 드러내기 위해 화사가 억지로 붙인 것일까? 그래서 관음과 달마는 부모의 잔소리를 이기지 못해 호텔 커피숍에 앉아있는 남녀마냥 어색한 모습인 것일까? 그렇다면 화사는 그림으로서 예술적 형상화에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또 벽화를 보물 제1817호로 지정한 문화재청의 설명처럼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경의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큰 것” 이외에는 예술품이 지니는 진리개시眞理開始의 미덕을 이 벽화에선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벽화 속 어색한 동거에 대해 학계에선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현재까지 나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종이 융성했던 시대적 배경 때문에 당시 인기가 있던 선종화인 달마도를 첨가했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벽암록』 등의 선서禪書에서 달마가 곧 관음의 화신임을 설명한 문장, “달마는 관음 대사이자 부처의 심인을 전하러 온 사람(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등을 준거삼아 함께 그려두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선종의 입장에 서서 관음·달마도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벽화를 두고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전통을 잇는 선찰 운문사의 성격을 잘 대변해 준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문화재청의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는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화엄경』 전체가 선종의 종지宗旨와 다르지 않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유아론唯我論적 독백일 따름이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관음·달마도의 이해를 향한 도정에서 우리는 운문사 창건연기와 만난다. 운문사 창건의 역사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내려온다. 고려 김척명이 지은 『원광국사전』과 이를 수록한 『해동고승전』에는 운문사가 신라 원광 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1161년에 청도에서 편집된 『군중고적비보기』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보양 선사寶壤 禪師가 작갑사鵲岬寺를 개창했다가 이후 고려 태조가 사액賜額함으로써 운문사가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운문사 주지를 지낸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보양 선사가 운문사의 창건주임을 재천명한다. 이와 같은 창건주 논란에는 원광으로 대표되는 교종과 보양이란 인물을 내세운 선종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암투를 바탕으로 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사찰을 세운 창건주가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선종이야말로 석가로부터 이어진 심인心印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허구의 족보(삽삼조사)를 만드는 데 공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 아닌가. 선사들에게 창건주가 지니는 상징성은 당시 선종사찰로서 운문사의 역사와 위상에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처럼 상반된 기록에 대해 후대의 운문사 승려들은 어떤 태도로 임했을까? 그들의 입장은 『조선사찰사료』에 실린 「운문사 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운문사는 560년 이름 모를 한 승려가 도반들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고, 590년에는 신라 원광 법사가 중창하고, 937년에는 보양 선사가 두 번째 중창한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소위 “한 도승道僧”이라는 미지의 창건주를 세워 원광이나 보양을 중창주로 끌어내림으로써 모두를 자신의 역사로 품었다. 그래서 오늘날 운문사 경내에 작갑전鵲岬殿과 원광화랑연구소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편의주의적 태도겠지만, 역설적으로 어느 일방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운문사 창건주에 대한 문제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오늘날까지 논의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나는 관음달마도에서 후대 운문사 승려들이 창건주에 대해 취했던 그 태도가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관음과 달마가 불상이 모셔진 벽 뒤에 데면데면 그려진 이유는 화사가 이들을 정답게 엮을만한 예술적 성취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선전禪典에서 말하듯 달마와 관음이 동일한 인물이어서도 아니다. 화사가 관음과 달마를 무심하게 병치해 둔 것은 선과 교를 하나의 개념 아래에서 뭉뚱그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려두라는 뜻일 것이다. 그림 속 관음과 달마는 상호 불가침 속에서 각자의 개성과 존재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벽화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예술적 진실은 ‘불편함’이다. ‘불편하다’는 것은 결국 내 뜻대로 안 되는 ‘타인’의 존재를 상정한다. 여기서 타인은 단순히 나 이외의 다른 인간이나 외부의 사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의 끝없는 자기화의 욕망이 멈추는 지점, 즉 내가 내 존재를 낮추고 불편을 감수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존재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위와 돈으로 사람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이들에겐 진정한 의미의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속 관음은 달마에게, 달마는 관음에게 타인으로 존재한다. 그림 역시 우리에게 타인으로 다가선다. 벽화 속 두 인물들은 기존의 알음알음과 인식 속에서 ‘선교일치’나 ‘통通불교’ 같은 답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무아無我를 말하면서도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나 ‘자리이타自利利他’ 같은 말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에겐 깨달음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불成佛을 입에 달면서도 모든 일이 뜻대로만 되길 기원하는 나와 같은 불자들이여, 내 진심으로 부처님 앞에 축원하노니 ‘세세생생 불편하게 살아갈지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