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으로 읽는 현대경영] 선재경영

시련 속에 배움을 구하는 원대한 여정

2018-06-28     이언오

|    선재 동자, 순례 떠나라고 일깨우는 구도자의 상징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조용히 광명만 비춘다. 빛으로 드러나는 우주는 크고 넓다. 극미 구멍에서 내비치는 빛은 오묘하고 아름답다. 화엄 시공간에서 보살들은 초발심이 정각, 모두가 부처, 중중무진 연기, 일즉다 다즉일의 주옥같은 법문을 한다. 하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인드라망, 꽃의 장엄, 물에 비친 달로 비유해 봐도 미치지 못한다. 보통 근기로는 양 많고 뜻 깊은 『화엄경』을 소화하기 어렵다. 

『화엄경』은 마지막 「입법계품」에서 보통 근기들을 끌어안는다. 신분, 종교, 직업, 남녀 불문의 53 선지식이 핵심을 나누어 가르친다. 보살의 10지 수행단계를 10명이 분담해서 설하는 식이다. 선재는 28번째에 보타락가산 수월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신앙의 명장면은 후세 수많은 기도처와 예술품에 영감을 주었다. 선재는 어리고 순수한 구도자, 가능성의 존재, 착하다는 선재善哉와 발음이 같다. 중생인 ‘나’도 순례에 나서 화엄법계에 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선재의 별칭은 남순 동자, 남녘을 순례하는 이이다. 시간은 대승 흥기, 공간은 불법의 인도 남부 전파와 관련된다. 선재의 뒤를 잇는 순례자들이 있어 불교가 아시아 중앙과 동남방으로 퍼져나갔다. 예불문의 서건동진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서쪽으로 순례를 다녀오고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탓에 동쪽 땅에 불법이 뿌리내렸다. 선재는 불교 융성기의 순례 문화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이다.

오래전 순례 길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현장은 불법을 배우고 불경을 구하기 위해 16년간 20만 킬로미터를 돌아다녔다. 혜초가 해로로 인도에 갔다가 육로로 중국에 돌아오는 데는 4년이 걸렸다. 위험하고 불편했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고행(苦行, 고된 행진)이 돋보였다. 순례는 부처님 진리에 계합하려는 간절한 행원의 실천이다. 개인 순례들이 시공간으로 연결되고 함께 개벽해서 불국토가 완성된다. 선재는 일상을 벗어나 진리를 찾아 순례를 떠나라고 일깨운다. 
 

|    기업 활동은 시련 속에 배움의 먼 길을 가는 여정

서경배 아모레 퍼시픽 회장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사업은 해방 전 개성의 한 부엌에서 출발했다. 서경배 회장의 할머니가 동백 씨앗으로 머릿기름을 만들어 팔았던 것. 좋은 품질이 입소문을 타서 사업은 금방 활기를 띠었다. 서 회장 부친은 가업을 돕고 있다가 징용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1945년 9월 8일 현지에서 풀려나자, 감회가 남달랐던지 그 날을 창업일로 삼았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서 귀국 후에 사명을 태평양상회로 정했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 가족들은 자유를 찾아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한국전쟁 발발로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으나 피난지 부산에서 내놓은 ABC포마드가 히트해 고비를 넘겼다. 전쟁 중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 개발·생산·영업에서 발군의 역량으로 업계 정상을 차지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회사는 1990년대 초 생존 위기에 직면했다. 사업부실, 경영비효율, 노사갈등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다. 

부친에게 후계수업을 받고 있던 서 회장이 전면에 나섰다. 미국 유학 시절 배운 경영이론을 적용, 구조조정과 혁신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자고 나면 흰 머리카락이 생겨날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전략과 실행력이 효과를 발휘해서 초우량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최근 중국의 사드 보복 등으로 성장세가 둔화되자 할머니·부친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서 회장은 평소 여행과 교유로 끊임없이 배움을 구한다. 연간 150일 정도 출장을 가는데 전문가와 함께 주변 유적지·문화재를 돌아본다. 그는 직원들의 글로벌 역량 강화를 위해 ‘혜초 프로젝트’를 운영한다. 이제까지 48개 도시에 140여 명을 파견해 6개월간 현지 시장을 조사하고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또한 매년 직원들과 같이 원대遠大한 기업의 실현을 다짐하며 한라산 둘레, 이순신 백의종군로 등을 걷는다. 

작년 말 미래 100년을 내다보고 신사옥을 완공했다. 30층 이상 건축이 가능했지만 겸손하게 22층으로 지었다. 지하 1층 미술관은 보물급 달항아리와 수월관음도를 소장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건물의 외형, 수월관음도는 선재·혜초와 닿아있다. 한옥 마당을 연상시키는 5층 중정에는 수조를 배치했다. 달이 뜨면 수월이 빛나는 강관음降觀音의 순간이다. 

탈출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기업은 불타는 집, 이 순간 고통이며 언젠가는 무너진다. 고통에 둔감해서 안주하고 상相에 집착해서 탈출을 상상하지 않는다. 고정 사고, 쳇바퀴 일정, 조직 관행 모두 버려야 할 대상이다. 기업은 스승·도반·모범 기업을 거울삼은 자기 파괴를 종용해야 한다. 굳이 연수나 출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출퇴근 시간, 근무 장소, 담당 업무를 바꾸면 생각·행동이 충격을 받는다. 

고난의 행진이 양약이다. 길 떠나면 고생인데 순례는 고생을 사서 한다. 벼랑 끝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시작해도 삶이 바뀐다. 부도기업가는 좌절감에 눌려 심하게는 몇 년을 무작정 걸어 다닌다. 시련 속의 걷기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사업구상 등에서 전환점을 만들어준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그냥 걷도록 하자. 순례라 이름 붙일 것도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난다. 

우연한 만남에 행운이 따른다. 부처님은 수자타의 우유죽을 드시고 기운을 회복했다. 선재가 선지식들과의 미팅 일정을 계획해서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동 에너지가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만남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 이때 섣부른 포기와 근거 없는 낙관 모두 경계해야 한다. 신기술, 히트상품, 시장개척 등 우연한 성과물들이 쌓여 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순례적 인재를 채용·육성해야 한다. 시험·직장에 매달리는 인력은 넓은 세상, 극한 상황에서 보고 배운 게 없다. 그랜드 투어, 도제 수련, 실패 경험을 채용·육성의 기준으로 삼아야겠다. IBM은 직원들이 6개월 기한의 사회봉사단에 참여토록 지원한다. 3개월은 사전 조사, 2개월은 현장 활동, 1개월은 마무리. 사회 문제에 눈 떠서 고민해보는 과정이 개인 성숙과 업무 개선에 도움을 준다. 기업은 구성원의 그릇 크기만큼 발전하고 실적을 낸다. 

간절한 행원이 순례를 이끌어간다. ‘고래 잡으러 떠나자’는 노래가 한때 유행했었다. 힘들게 살았지만 꿈이 있어 시련을 감수했다. 행원의 절실함이 고통에 달구어져 진리에 이른다. 기업과 직원은 이익·생계 이상의 숭고한 목적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고성과에도 불방일하고 실적 악화에도 굳건할 수 있다. 기업 활동은 팔정도의 정명正明이다. 바른 길을 걸어가야 기업이 존경 받으며 장수를 한다.

 

|    불교와 세속이 함께 만드는 순례의 인드라망

부처님은 걸어 다니며 스승, 제자, 재가자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셨다. 부처님 깨달음에만 주목하는 탓에 일생이 순례의 여정임을 간과한다. 도는 진리이자 길, 진리의 체득·운용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순례 관점으로 불교를 바라보도록 하자. 진리를 찾아 일상을 탈출하고 고난의 길을 걸으며 배움을 구해야 한다. 선재처럼 우리는 화엄법계를 유영하는 순례자들이다. 

요즘 불교의 좌선은 자세, 교학은 머리에 갇혀버렸다. 자세와 머리는 도구道具, 구에 치중해 도를 잃어서는 곤란하다. 순례는 몸을 움직여 마음을 깨어있게 해서 도와 구의 균형을 잡아준다. 의단疑端을 갖고 걸으며 수행·보살행하는 용맹정진이기도 하다. 불교가 순례 전통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이다. 불교는 역동적이 되고 세속과의 교류가 활발해진다. 분망한 세속은 중심을 잡고 바른 방향을 추구하게 된다. 

순례에 소극적인 불교는 밋밋하고 적막하다. 순례를 통해 개인의 수행·보살행과 사회적 운동을 공명시켜야 한다. 일본 시코쿠, 티베트 라싸, 스페인 산티아고는 신심이 이끄는 순례가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 공간들이다. 수월관음 성지들을 잇는 순례길을 만들면 어떨까. 템플스테이들을 점으로 해서 생태·문화·역사의 선·면을 엮어야 한다. 부도기업가, 청소년, 은퇴자, 병약자 등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걸으면 길이 되고 순례의 인드라망이 만들어진다. 

순례는 작지만 파급력이 큰 활동이다. 근세에 부처님 나라 인도에서 몇몇이 순례 길을 떠났다. 사티시 쿠마르는 핵무기 파기를 호소하려고 인도에서 영국까지 걸어갔다. 비노바 바베는 빈자에게 땅을 나눠주라고 지주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여서 핵 위험과 빈부 격차는 여전하다. 하지만 불법에 부합하고 방법은 불교다웠다. 대의를 위해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정부가 관련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는데 불교계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발견되어 외국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필사본은 파리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가 한 일이 별로 없다. 주체성과 자긍심이 결여된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선재는 불경에 나오는 인도인, 혜초는 실존했던 신라인이다. 순례 전통을 되살리는 첫 사업으로 혜초를 재조명할 만하다. 세상은 넓어 고통이 많고 순례의 길은 멀어서 다함이 없다.                                    

 

이언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부산발전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바른경영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대학 때부터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교와 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불교와 경영의 접목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