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나를 흔들다] 나를 향한 천 배

2018-06-28     김은희
그림 : 박혜상

요즘 말로 나는 돌아온 싱글, ‘돌싱’이다. 그래도 아이 둘을 키우며 떳떳하게 살고 있다. 작으나마 전셋집도 있고 직장도 있다. 큰아이는 대학교 졸업반, 작은아이는 휴학하고 힙합 음악에 빠져 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은 안정적이다.

돌이켜 보건대, 내 혼란한 삶은 결혼 직후 시작되었다.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스물세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보니 시댁 식구들 모두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시아버지, 밖으로만 도는 시어머니, 장남이라는 벼슬 아닌 벼슬로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사는 남편, 성장이 멈춘 듯한 시동생들….

그나마 기둥 역할을 하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편의 방탕한 생활은 더욱 심해졌다. 술, 담배, 바람, 도박 등 그야말로 온갖 짓을 다 했다. 그래도 헤어지지 못한 것은 아이들과 위자료 한 푼 받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집이 있었지만 상속받은 것이라 분할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내 사정을 알고 한 지인이 삼천사에 데리고 갔다. 성운 스님께 인사도 시켜 주었다. 스님께서는 나를 보시자마자 대뜸 백일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그것도 하루에 천 배씩. 

108배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천 배라니! 그러나 스님의 형형하신 눈빛에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말았다. 그렇게 백일 간의 고달픈 여정은 시작됐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들의 명호를 부르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지심귀명례 화광불, 지심귀명례 인중존불, 지심귀명례 사자보불 ….”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다 나왔다. 간절한 마음은커녕 절을 하는 내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래도 중단하지 않은 것은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였다. 어둡고 긴 터널, 언제부터인가 그 속에 갇혀 있는 듯했는데 기도를 중단하면 결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절실함에 무사히 백일 간의 기도를 마쳤고, 나는 스님을 찾아가 자랑스레 말씀드렸다. 

“저 백일기도 다 끝냈어요.”

그러나 스님께서는 다시 백일기도를 지시하시는 게 아닌가!

“또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두말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두 번째 눈물겨운 여정.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세 번째의 여정…. 나는 스님이 원망스러웠다. 당시 스님은 내게 절대 자비롭지 않으셨다.

그사이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져 아이들 등록금도 못 낼 형편이 되었다. 집은 이미 빚쟁이들에게 넘어갔고, 자칫 밥까지 굶을 판이었다. 더 이상 남편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기도를 멈추고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화장품 대리점에서, 밤에는 맥줏집에서 일했다. 맥줏집에서 일한 것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 혹시라도 남편이 정신을 차릴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밤마다 차로 나를 모시러(?) 왔다. 

이혼을 결심한 것은, 그동안 남편이 치고 다닌 이런저런 사고로 내 월급이 차압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주위에서 더 난리였다. 사채까지 쓰면 방법이 없다며 하루라도 빨리 서류정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혼은 쉽지 않았다. 부부가 함께 판사 앞에서 이혼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 때맞춰 남편이 사기죄로 구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법원 직원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이들과 먹고살자면 꼭 이혼을 해야 한다고. 그러자 매몰차기만 하던 법원 직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판사에게 직접 사정을 설명하고 근무시간에 맞춰 시간도 조정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17년 만에 남편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이혼이 마무리되자 아들아이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워 파출소에 끌려갔다. 친구 엄마 차를 훔쳐 타고 다니다 사고를 내기도 했다. 사정도 해보고 야단도 쳐 보았지만 다 소용없었다.

막막한 심정에 나는 다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중단했던 세 번째 백일기도를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 열 시간 넘게 일하고 오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었지만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했다. 휴일이면 삼천사에 가서 하기도 했다. 안양에서 삼천사까지 가자면 왕복 다섯 시간 이상 걸렸지만 아들아이가 바로 서기만을 바라며 석불님을 향해 나를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절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엇인가 울컥하며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가, 미안해!”

동시에 예전에 했던 내 행동들이 영화필름처럼 차르르 눈앞에 펼쳐졌다.

아이들이 두서너 살 즈음, 시집살이의 고단함에 나는 밤만 되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러 다녔다. 그러다 새벽녘에 돌아와 보면 눈물 콧물로 얼룩진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슬픔….   

“아가, 정말 미안해!”

나는 그 자리에 엎어져 펑펑 울었다. 어떻게 그걸 잊고 살았을까? 그랬으면서 어떻게 상대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며 살았을까? 그제야 나는 알았다. 현재의 상황이 모두 내 탓임을. 남편과의 갈등도, 아들아이의 방황도 모두 내 탓이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스님께서는 내게 세 번이나 백일기도를 시키신 것이리라. 

요즘 아들아이가 그런다. 자신이 말썽부리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라고. 옳은 말이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 나는 한시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항상 혼란스럽고 버거웠다. 그러나 요즘은 편안하다. 가진 것이 없어 힘겨울 때도 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딸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공부 잘하고 있는 것, 내게 직장이 있는 것, 식구들이 건강한 것 등. 기도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원망으로 보냈을 내 삶의 나날들, 그 사실을 안다는 것에도 감사한다. 

그러니까 내 기도는 부처님을 향한 것도, 남편과 아이들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내 잘못을 참회하고 내 업장을 녹이는 기도였고 나를 향한 천 배였다.         
 
                     
김은희 님은 서울 은평구 삼천사에서 신행 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