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修行)과 신심

특집, 재가수행과 출가수행

2007-09-15     관리자

불교 를 수행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자력적인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수행의 결과였으며 또 그 가르침이 모두 수행의 가르침이다.
모든 불교의 교리와 사상은 수행의 지침으로 수행없는 교리와 사상은 헛된 이론에 불과하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수행의 경력을 쌓아 완성된 경지에 이를 때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다.
이 인본주의에 입각한 수행관을 가지고 자기완성과 나아가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소위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목표다. 이러한 불교의 본래 뜻은 인간의 삶의 본질적 의미를 바로 알아 삶의 가치를 향상시키고 제행이 무상한 현상의 한계를 초월 실상(實相)의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데 있다. 또한 인간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는 것은 생, 노, 병, 사에 속박된 굴레를 벗어나는 해탈의 세계로 인간적 상황을 전환시킴을 의미한다. 다만 전환된 상황 역시 인간의 부처세계로 인간이 부처이고 부처가 인간인 상호 동체의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과 부처가 동일하다는 데서 수행의 동기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수행을 통한 성불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이 가능성에 의해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 곧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법대로 닦아 나아가는 실천행이다. 불교수행이란 부처가 되고자 하는 행위로 부처님의 교법을 실천하여 생활화 하는 것을 말한다. 또 사람의 습관화 된 행동이 수행과 일치할 때 그 사람에게는 수행 가풍이 이루어지게 된다. 수행자에게는 수행 가풍이 있다.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라 수행의 능력이 다르긴 하지만 수행 자체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또 수행이란 발심한 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것으로 전 불교도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승속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다. 물론 수행의 종류와 그 방법은 다양하다. 병에 따라 약의 종류가 많듯이 중생의 근기와 혹업(惑業)에 따라 방편이 많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수행은 계, 정, 혜(戒, 定, 慧) 삼학으로 설명되는데 계행에서 시작하는 것이 수행이다. 계란 올바른 행위 좋은 습관을 뜻하는 말로 행동과 말의 실수를 예방하는 것이다.
흔히 정계(淨戒)라고 말하는데 깨끗한 품행이란 뜻으로, 몸으로써 하는 착한 행실과 말로써 하는 점잖은 언어가 선업을 지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생활 속에 곧잘 범하기 쉬운 나쁜 행위가 있다. 십악이라고 말하는 열 가지 악업이다. 죽이는 일, 훔치는 일, 사음하는 일은 몸으로 짓는 악업이요,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하는 말은 나쁜 구업이며 또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생각으로 짓는 나쁜 업이다.
이러한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닦아 나가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여기에서부터 구체적인 계행의 실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교적 생활의 윤리와 도덕은 지계의 정신에서 세워지며 이 지계의 정신에서 교법을 실천하는 신행활동이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정(定)은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의식의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다. 이 상태를 경험한 다음에 깨달음의 세계에 접근해 가게 되며 이 선정의 수행이 불교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계행을 닦는 것이 선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법망명에서는 밝히고 있다.
선정을 닦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지혜이며 이 지혜는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깨달음이란 결국 완성된 지혜를 얻음이다.
이와 같은 삼학의 수학은 불교의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불교 수행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삼학을 떠난 불교 수행은 있을 수 없다.
삼학을 통한 불교의 수행을 생활화하는 것이 신행활동이며 여기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살아난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신행활동을 통하여 사회생활에서 이로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이념은 수행을 전문적 특정 계층, 이를테면 출가승단에 국한시키지 않고 대사회적인 방향으로 보편화하여 이상사회의 구현을 위한 수행풍토를 세속에서 조성하는 데 있다. 이른바 보살행이라는 것이 대승의 불교수행을 대변하는 말이다.
내 생활 속에서 남의 생활에 이로움을 주자는 것으로 수행의 가치를 이타행에 더 두고 있다. 육바라밀이나 사섭법등은 자리적 수행을 이타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현대사회에 있어서 종교활동은 대승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수행을 통한 원력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속적 욕락에 끌려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행심을 일으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 속의 의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의식적 심리가 자연스레 수행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에 대한 심리적 동기를 유발하여 수행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정서를 통해서 신심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신심이 단련되어야 수행에 들어 가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신성취 발심이라 하였다.
가령 배가 고픈 사람은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생리적 욕구를 가지고 먹을 것을 찾는다. 이와 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불법에 대한 애정어린 신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신심 단련이 바로 수행으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신심이 떨어지면 마구니(魔軍)가 된다는 말이 있다. 불교의 신심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귀의하는, 가슴으로 하는 공경심이다.
부처님의 이미지를 통해 마음이 맑아지고 고요해지면서 미래에 희망을 거는 편안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신념의 체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또 믿음의 표시를 몸과 말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신앙의 의례가 된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불보살을 찬탄하면서 하는 염원 등은 믿음을 밖으로 표시하는 의례행위이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행해 나가는 것이 신심을 지속하는 유지체계가 된다.
따라서 내면의 신앙정서를 유발하는 신심의 단련은 신념과 의례와 유지체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불법의 재산이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하였다.

지안 스님은 통도사 강원 강주를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마산 중앙포교당 정법사 주지로 전법과 더불어 수행정진 중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