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들을 불러 보자!

풍경소리

2007-09-15     관리자


얼마 전 광복 50주년을 맞아 세계 최장기수라는 김선명 씨의 석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지 50여 년, 그 해방된 나라의 50여 년 중 45년 동안을 차가운 독방에서 갇혀 살아온 비전향 장기수가 석방된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가 석방된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라는 낯선 이름, 또한 지난 1976년부터는 호적에 사망으로 기재된 사람이 0.75평의 독방에 45년간이나 갇혀 살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마도 놀랍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살아있는 사람을 사망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족의 아픔을 분단된 나라에서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석방 한참 후에야, 90이 넘은 어머님을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김선명 씨의 모습은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39년 째 0.75평의 독방에서 살고 있는 윤용기 씨, 우용각 씨를 비롯해서 36년 째, 34년 째 70이 넘은 나이로 감옥을 사는 이들이 있고, 20년, 30년이 넘게 갇혀 사는 사람들이 수십 명도 더 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난 1987년 6.29직후인 7월 4일 남편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연행되었을 때 나는 당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앞장 서 외치던 다른 친구들처럼 민주화의 길목에서 결국 독재정권에 의해 구속되는구나 하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대학 개강일에 맞추어 한번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언론에 '재야 침투간첩'으로 보도되었고, '붉은 전사 장의균'이란 TV특집프로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건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당사자의 얼굴도 모르는 언론이 안기부, 보안사가 만든 보도지침에 따라 보도하였던 것이다.
당시 아무런 상관없었던 나 자신도 일부 신문에는 조직원의 하나처럼 보도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언론보도중재위에 문의하였지만 시간이 너무 경과되어 정정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의 한달 동안, 남편은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누구한테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이에, 변호사는커녕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철저한 격리와 처절한 고문으로 그 이웃과 친척, 동료들에게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라도 기피하고 무서워 할 수 밖에 없는 '간첩'이 되었던 것이다.
혼자서 수십 명이 넘는 수사관들한테 곤욕을 치러야 했고 처음 열흘 간은 단 한 잠도 못잔 채 참혹한 일만을 당해야 했다. 열 하루째 의식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겨우 한두 시간씩 눈을 붙일 수 있었다고 한다.
구치소로 옮겨진 후에야 만날 수 있었던 변호사가 고문에 대해 묻자, 남편은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라고 했다 한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몰랐던 나는 급변한 상황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인권변호사에게 들은, 간첩사건은 변호사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사건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절망감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가족들도 주변의 모든 것과 철저히 격리되었다. "우리 아빠가 소주값, 담배값 모르는 간첩이야.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하고 항변했던 9살이던 큰딸 여림이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들 상관없이(?) 가만히 있었다.
남편은 무서운 간첩으로 낙인 찍혔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과 못 놀아 주어 미안하다며 출근길에 집 앞 공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놀아주던 아버지로서의 남편의 모습은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두달 만에 면회한 남편에게서 '역사를 믿고 언젠가는 진실이 이긴다는 것을 믿고 살자.'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럴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당황해하며, 작은 용기를 더할 뿐이었다.
당시 일본 교토대에서 한일 고대사를 공부하던 남편은 "우리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고 갈라져 산 지는 수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도 적대관계이던 일본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풀어졌는데 같은 민족인 우리가 어째서 함께 살 수 없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유학중 조총련 쪽 사람들과 만나고 동경에 있는 조선대학에 가서 역사자료를 찾고 통일에 관한 견해를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정권유지에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구속된 후 어느 누구도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는 상관없이 궁지에 몰려 있는 정권유지를 위해 겁을 주는 목적으로 '재야침투 간첩사건'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후 남편은 유엔인권위에서 자의적 구금이라는 결정이 내려져 한국정부에 석방을 권한다는 권고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은 8년 만기를 다 채우고 지난 8월 5일 석방되었다.
국제 팬클럽 명예회원,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양심수로 선정된 것도 결정적인 힘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1980년 초에 남편과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면, 아마도 사형이 구형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얘기하던 사람들의 말처럼 우리가 겪은 일은 별일이 아니었다.
8년의 감옥살이 정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족들의 아픔을 남편의 구속을 통해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구속된 후에야 사람을 40년이 넘게 0.75평의 독방에 가두어 두고, 간첩한테 잡혀가는 줄 알았다는 당사자가 간첩이 되어 한 가정이 풍지박산되고 억울함을 호소할 길조차 없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모두가 갈라진 이 나라, 분단의 아픔으로 생긴 일임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한 인간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평도 되지 않는 독방에 가두어 놓는 일, 이는 어느 누구만의 책임인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갇힌 자의 절규를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은가.?
별로 어렵지 않은 길이다. 같은 땅에서 숨쉬며 같이 살고 있는 우리들과 수십 년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다르지 않다. 똑같이 숨쉬고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갇힌 자들의 정지된 삶을 흐르도록 이어주는 역할과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조국통일의 명제 앞에 머무르고 있는 기억들을 일상의 삶으로 찾아주도록 장기수들의 이름을 불러보자. 한사람, 한사람의 귀함을 공유해서 갇힌 자들의 진실에 귀 기울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끊임없는 관심으로 편지를 나누고, 영치금을 보내거나 책 등을 넣어주기도 하며 한 사찰에서 한 명씩이라도 그 아픔을 나누는 일, 그런 일이 참된 불자로서 부처님의 자비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 아닌가?
현재 각 사찰에서는 많은 분들이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절망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부처님 자비의 소리를 전해준다고 들었다. 그들이 모두 똑같이 불성을 간직한 사람이라 한다면 장기수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갇히기 바로 전 한 어머니의 한 아들이었고, 한 여인의 남편이었던, 또 형제였던, 갇힌 자들의 삶의 진실은 밖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만이 밝혀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최소한 남북교류를 이야기하기 전, 남북의 매듭의 옹이인 수십 년 갇혀 사는 이들을 풀어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갇힌 사람들,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 모두 함께 불러보자.
매주 목요일 종로2가 탑골 공원에 오시면 누구라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