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인도 4 장엄한 엘로라여!

불국토순례기,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

2007-09-15     관리자

아침 아홉 시에 있다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행 버스는 열시가 지나도록 오지 않고, 아잔타 굴원 초입은 이미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버스가 다소 늦어지는 것은 으레 그러려니 하였지만, 그러고도 두 시간 동안이나 하릴없이 배낭을 깔고 앉았자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 하나 왜 이렇게 늦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없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세 시간 이상이나 지체된 버스 때문에 곧장 엘로라로 가려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아우랑가바드에서 여장을 풀었다. 시가지를 둘러볼 생각으로 숙소 앞 릭샤왈라(人力車 꾼)에게 아우랑가바드의 명소를 물었더니, 그는 주저없이 '타지 마할(Taj Mahal)'을 댄다. 아우랑가바드에 타지 마할?

띤탈 비하라 내부(좌). 까일리사 사원(우).

의아해 하는 나를 자신있게 데려다 놓은 곳은 비비 카 마키바라(Bibi ka Maqbara)라는 무갈(Mughal) 왕조 아우랑제브(Aurangzeb) 왕비의 무덤이다. 아그라의 타지 마할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지만, 한 눈에 보아도 감히 타지 마할의 빼어남에 견줄 만한 것이 못 된다. 입구에서 그냥 돌아서려 하자, 머쓱해진 릭샤왈라가 비비 카 마키바라 왼편으로 보이는 산 중턱을 가리키며 거기에 불교 석굴 사원이 있다고 말한다.
산 아래에서 릭샤를 돌려보내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그가 가르쳐준 굴원에 올랐더니 이미 산 아래는 황혼이다. 굴원을 찾는 이가 드문 듯, 이미 폐사(廢寺)의 기운이 완연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굴원을 돌아보는데, 문득 굴원 입구에 놓인 신발 두 짝이 사람을 놀라게 한다. 납자가 있다? 감실 문을 들어서니 오렌지색 가사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까일리샤 사원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하고 문 밖에 앉았기를 반 시간, 그는 도무지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조심스레 인기척을 내기도 하고 혹은 희미한 그림자를 들여보내 나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였으나,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황량한 데칸고원의 굴원에서 살아있는 가사 자락을 본 것만으로도 큰 인연이라 여기고 돌아섰다.
이른 아침 버스로 엘로라를 찾았다. 도로 양 편으로 끝없이 사탕수수밭이 이어지고, 코끼리 다리같은 줄기를 드리운 벵골보리수가 드문 드문 눈에 띤다. 길에 고인 빗물로 소 등을 씻다가 돌아보며 웃는 아이들이 싱그럽다. 버스가 다울라타바드(Daulatabad) 성채를 왼편으로 끼고돌면 길이 다소 험해지고 멀리 바위 구릉이 시야에 들어온다. 작게 보이던 바위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마침내 작은 산처럼 우뚝 솟은 굴원 앞에 버스가 멈춘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장중한 위세의 사원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까일라샤 사원 내부

굴원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조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불교 굴원뿐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굴원들도 함께 있다. 버스가 서는 광장 정면으로 보이는 웅장한 굴원이 바로 유명한 까일라샤(Kailasha) 사원이다. 이 힌두교 사원은 완성되기까지 백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으며, 정과 망치로 쪼아낸 암석의 양만도 20만t이 넘는다고 하니 그 규모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까일라샤 사원 오른편으로 열두 개의 불교 굴원이 조성되어 있다. 불교 굴원은 엘로라 굴원 가운데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대개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이 시기는 아잔타 굴원의 쇠퇴와 거의 동시대에 해당한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잔타의 석공들이 차차츰 엘로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굴원 외벽의 조각

열두 개의 불교 굴원중에 제 10굴은 유일한 차이띠야(chaitya, 塔院) 석굴이다. 흔히 비슈와까르마 (Vi vakarma, 造一切者)차이띠야라고 불리는 이 석굴의 정면 장식은 그 화려함과 세련미에 있어서 단연 돋보인다. 2층 발코니에 문과 창문을 설치하여 충분한 채광이 가능하도록 한 것도 특이하다.

차이띠야의 내부 구조는 초기 양식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스투파를 감싸듯이 30개의 석주를 배열하여 스투파를 모시는 내부와 측량을 구별하고 있다. 측량은 요도(繞道)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장에는 나무로 만든 서까래를 사용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스투파의 정면을 두드러지게 돌출시키고 거기에 불상을 안치한 것은 불탑과 불상의 공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초기의 탑원 석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양식이다.

이 탑원의 스투파 전면과 감실 입구에 안치된 사자좌(獅子座)의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소 생소한 것이지만, 아잔타나 엘로라 등의 굴원에서는 오히려 흔하게 볼 수 있다.

굴원 외벽의 조각

비하라(vihara, 僧院) 석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제 12석굴이다. 이 석굴은 '띤 탈(Tin Thal)'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삼층으로 된 승원이다. 아파트처럼 조성된 이 승원굴은 차이티야 석굴과는 달리 외벽에는 전혀 장식이 없지만, 그 시원한 품이 오히려 정교한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1층 배후 벽면에 그려진 만다라(曼茶羅, madala)와 감실에 안치된 불상도 주목할 만하다. 감은 듯 뜬 눈에 구김살없는 당당한 체구와 안정된 자세는 심오한 경지에 이른 달인이 아니고서는 감히 흉내내지 못할 걸작이라 할 것이다.
남북으로 장장 2km에 걸쳐 조성된 수많은 굴원들을 돌고나면, '장엄'이라는 말 한 마디 밖에는 더 이상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 말 밖에는 여기에 어울릴 다른 말이 없다. 피(被)는 무상한 바윗덩어리요 아(我)도 또한 무상한 사람이니 피아의 만남도 무상하다 하겠지만, 그 만남이 다만 무상하지 않고 또한 장엄한 것이다.

아! 엘로라, 장엄한 엘로라여!....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