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글의 조형화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한글서예가 늘빛 심응섭

2007-09-15     관리자

꽃은 꽃마다의 향기가 있듯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특히 수행자에게 나는 향기는 난향에 가깝다. 은근하면서도 그 향기가 오래간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 중에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서산 세원사에 계신 정운 스님은 우리 불광출판부를 통해 세 권의 책을 내셨다. 두 권의 시집 [또 다른 이름되어]와 [달을 보는 섬] 그리고 수필집 [사람의 향기]가 그것이다.
스님에게서는 그 시집과 수필집에서 나는 그런 향기처럼 모든 잡다한 것을 떨쳐버린 출가수행자의 향기가 난다.
얼마전 스님은 짤막한 글과 함께 서집(書集)을 한 권 보내주셨다. 늘빛 심응섭(혜전 전문대 비서행정학과 교수, 53세) 선생의 아름다운 한글서체가 담긴 작품집이었다.
한국방문의 해 특별기획으로 철도박물관 초대로 열린 심응섭 한글서예전 전시작품 도록으로 효, 사랑, 환희, 정성, 화평, 행복, 기쁨, 그리움.... 아름답게 조형화된 한글서체는 자연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산과 나무, 동물, 해와 달, 바위,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전통적인 서법의 선과 기백과 여백, 그리고 묵색의 농도가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서집 앞글에 쓰여진 그에 대한 평들이었다. 이 시대를 분명한 의식으로 바라보며 서도(書道)의 길을 걷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었다. 만나 뵙고 싶었다.
스님께 연락을 드리고 홍성역에서 만나기로 한 그 날은 집중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엎친데 겹친다고 했던가. 초행길이라 도착역 시간을 잘못 안 탓에 종착역인 장항역까지 가버렸다. 모든 교통이 두절된 상태에서 다시 홍성까지 되돌아 오는데에는 무려 5시간이 더 걸렸다. 약속시간보다 7시간이나 늦은 시간에야 겨우 만났다. 어렵사리 만난 때문인가. 더욱 반갑고 소중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스님을 통해 처음 만난 늘빛 선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편안했다. 그리고 묵향과도 같은 단아함과 부드러움이 있었다.
늘빛 선생의 한글서예공부는 나라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나라사랑은 모국어 사랑, 곧 한글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글서예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광주서예연구원의 송곡 안규동 선생 문하에서 한문서예의 필력을 다지면서 그의 서도생활은 시작된다.
송곡 선생과의 만남은 좀 각별하다면 각별하다. '65년 겨울 어느날 군복무 중 우연찮게 찾아뵌 선생은 처음 뵙기에도 그 풍모가 여느 사람과는 달리 보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여뜨린 채 한복을 입으시고 큼직한 붓으로 글씨를 쓰고 계신 그 모습은 그대로 신선 같았다.
어렸을 적 글씨를 잘 써 동네 만장이란 만장은 다 쓰시다시피 한 아버지 옆에서 먹을 갈며 써본 것이 인연이 되어 쓰게된 글씨였지만 주위에서는 잘 쓴다는 말도 꽤 들었다.
송곡 선생을 찾아간 늘빛 선생은 "선생님께 글씨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다. 그 다음 주에도 찾아가 또 그렇게 여쭈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그리고 네 번째 찾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들어오라시며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으면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부대장의 허락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일과 후 밤이 늦도록 정해준 법첩을 임서하는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붓장난이라도 할라치면 추상같은 호령을 치셨어요. '서예란 바르게 살고자 하는 방법을 글씨 속에서 찾아보고자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서관심획(書觀心劃), 즉 글씨는 마음의 획부터 보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지 않고서는 바른 글씨를 쓸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서예란 생을 연마하고 반영하는 수도(修道)라는 말씀도 늘 하셨지요. 제 인생에 있어 선생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어요.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고,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갖추신 분이셨지요."
공부를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난 어느날 선생님께서는 체본을 주시며 도전에 내보라 하셨다. 자신이 열심히 글씨공부하는 것을 기특해 하며, 소질을 인정하고, 용기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도전에서 입선을 했다. 군대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10년을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우리의 문자인 한글서예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한글서예는 한문서예에 비해 획이 단조롭고 단순하여 기맥이 왜소하고 음양의 조화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형태적인 조형미나 필세가 약하고 생동감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 보완할 수는 없을까.
청계천 헌 책방을 다니며 한글서체 자료를 보이는 대로 구했다.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훈민정음 영인본들을 구해보며 나름대로 연구를 시작했다. 한글서체의 필의를 자연의 형상에서 찾으면서 서체의 조형미를 창출해나갔다. '75년에는 한글서예작품으로 개인전으로 열었다. 칭찬하며 대단한 작업을 했다며 격려해 주신 분들도 있었으나 비난과 조소를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전통서단에서 보면 외롭고도 은밀한 행보를 계속해갔다. 20년이나 흐른 지금에는 한글서예의 창작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 한글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창출해내다보니 다소 회화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화적이면서 서예의 기본틀을 벗어나지는 않아요. 글씨가 그림이 되어서는 안되지요. 그림이란 잘못그리면 지우기도 하고 덧칠을 하기도 하지만 글씨란 모름지기 일필휘지해야 해요. 그것이 기본틀이지요."
독특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그의 글씨를 '글 그림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글자의 형태를 따르되 그것은 하나의 그림처럼 표현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서예의 기본획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용에 있어서는 요즈음 우리에게 요구되는 도덕과 윤리성을 주로 담고 있다. 얼핏보면 하나의 그림인 듯, 혹은 글자인 듯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일반적으로 언어가 주는 메시지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그의 글자체에는 담겨 있다. 나름대로의 무한한 창작력과 감수성, 그리고 그 자신의 인격이 조형화되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서예를 하다보니 자연 많은 책을 가까이 하고 책을 좋아하게 되어 글쓰는 것도 좋아하게 된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쓴다. 수필과 시로 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비서행정학과 학생들과 함께 매년 시와 음악의 밤을 열어 학생들의 정서를 함양시키는 일도 하고 있다. 그 행사 때는 매번 열네 폭 병풍에 궁체로 쓴 경허 스님의 참선곡을 펼쳐놓는다.
늘빛 선생은 불교와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정운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수련대회에 참가하고 비로소 현응(玄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 여름 4박 5일 해인사 수련대회에 참가해 자신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고통스러운 수련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며 그 얘기를 한참이나 들려준다.
그의 스승 송곡 선생의 말처럼 서예를 '수도의 과정'으로 삼는다는 늘빛 심응섭 선생. 한글날이 머지 않은 이즈음 늘빛 선생과의 만남은 한글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해준다. 앞으로 끊임없이 펼쳐질 늘빛 선생의 우리글 한글의 창조적인 조형 작업에 힘찬 갈채를 보낸다.

늘빛 심응섭(沈應燮)
송곡 안규동 선생께 사사하였으며, 한글서체의 조형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한글서예연구 발표전, 독일 루카스화랑 초대전, 철도박물관 초대전 등 여덟 차례의 개인전과 수십 차례의 단체 및 초대전을 가졌으며, 명종태실비문과 서산시 시민헌장비, 사육신 성삼문 동산(초상문), 한용운 대선사 동상(초상)문 등 많은 휘호를 남겼다. 충남 미술전람회 운영위원, 충남 서예가협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서산지부장 . 충남문예예술진흥위원 . 혜전전문대학교 비서행정학과 교수로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