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산에서 온 편지

‘이 일’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2018-05-30     박재현
그림 : 이은영

옛 선인들은 방 한구석에 커다란 나무 상자를 놓아두었다. 종이가 귀하고 구하기 어렵던 시절에도 그들은 편지를 쓸 때면 꼭 두 벌을 썼다. 하나는 인편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글 상자에 보관했다. 인편으로 보낸 편지를 수취인이 받아 읽고 답장을 보내오면, 답장도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답장으로 반드시 두 벌을 썼다. 답장 역시 한 벌은 인편으로 보내졌고 다른 한 벌은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주고받은 글들은 그렇게 상자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편지를 보낸 이는 보낸 이 대로, 받는 이는 받는 이 대로 보관했다. 편지뿐만이 아니다. 남의 애경사에 적어 보낸 글도 있었고 시詩나 짤막한 수필 형식의 글도 있었다. 상자의 주인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남은 이들은 상자를 열어 쌓인 글 뭉치를 정리했다. 추슬러진 글은 문집文集으로 묶였고 각수刻手를 고용해서 한 장 한 장 목판에 새겨졌다.

기록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들 사람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적어나가고,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워 한 벌을 더 남겨 못난 기억을 대신했다. 먼 훗날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도, 그 마음과 기억은 글자 속에 남아 영속하기를 고대했으리니, 그래서 글은 모질고 질기게 읽는 이의 마음속을 깡그리 헤집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아, 글이란 본래 그러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대혜의 편지글은 어렵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 - 1163)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천년도 더 된 옛글인 데다 선문禪門의 안쪽에서만 쓰이는 말귀가 많아 낯설고 어렵다. 이런 말귀들이 어쩌다 한 번 나오는 게 아니라, 한 줄에도 몇 번씩이나 나온다. 그래서 말귀를 놓치지 않고 다 따라가려고 하면 지레 지쳐버린다. 당시 사람들끼리는 흘리듯이 말해도 서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말을 하다가 관둬도 숨은 말귀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 된다. 옛말 사전을 옆에 두고 한 자 한 자 꿰맞춰도 말이 안 된다.

대혜의 어록 총 30권 가운데 왜 하필이면 편지글인 『서장書狀』이 한국불교에 전폭적으로 수용되었을까? 고려의 지눌(知訥, 1158 - 1210) 선사가 남긴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단경』을 스승으로 삼고 『서장』을 벗으로 삼았다”고 했다. 여기서 스승과 벗이라는 은유의 차이가 절묘하다. 선의 본령을 밝힌 문헌은 『육조단경』을 필두로 해서 차고 넘친다. 그 책들은 때로는 높고 먼 산인 듯도 싶고, 넓고 깊은 바다인 듯도 싶고, 알다가도 모를 남의 속내인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서장』은 오랜 동무처럼 편하고 가깝게 대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말이다.

우리시대 사람 중에서도 대혜의 편지글을 알아보는 눈 밝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편지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하여, 하고, 하니로 새겨나가는 훈독 소리 너머에 있을 말의 풍경은 봄날처럼 아련하다. 또 선문의 안쪽에서만 쓰이는 말귀는 그들조차도 어찌할 수 없으니 한자 그대로 그냥 읽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편지 속 말귀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 편지 중에 하나를 다시 꺼내 뜨문뜨문 겨우 읽어 본다.

 

저는 어려서부터 마음을 내어 훌륭한 분들을 찾아뵙고 ‘이 일[此事]’에 관해 묻곤 했습니다. 약관을 넘기며 바로 결혼한 뒤로는 세상살이에 쫓기느라 ‘이 일’의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이 들어 늙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이 일’에 대해 듣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알고자 하는 뜻은 얕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그만두었겠지만, 알게 되었으니 옛사람들이 몸소 깨달은 경지에 도달해본 다음에라야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을 일찍이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뜻은 컸지만, 역량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 다행히 집안의 먼지 같던 인연들도 거의 다 마쳐 한가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채찍질하여 뜻만 세웠던 예전의 ‘이 일’을 더 하려고 하는데, 절실하게 가르쳐줄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평생의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었으니, 이 마음을 살펴주시리라 여깁니다. 조목조목 가르쳐 주십시오. 매일같이 어떻게 공부해야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곧장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또한 허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정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도망갈 곳이 없으니 불쌍히 여기십시오. 지극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증시랑이라는 사람이 대혜 선사에게 보낸 편지다. 시랑侍郎은 관직명이다. 그의 이름은 천유天遊이다. 증시랑은 『서장』 가운데 대혜 선사와 주고받은 편지가 제일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증시랑이 보낸 편지는 앞에서 본 한 편이 남아 있지만, 선사의 답장은 여섯 편이나 남아 있다. 증시랑이 보낸 편지 가운데 여러 통이 소실되어 수습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혼인과 벼슬살이 같은 세상일에 끄달려 ‘이 일’에 대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의 편지를 받아 읽은 대혜 선사의 마음이 아주 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답장에는 짠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답장의 내용은 겨울 산처럼 차갑고 앞뒤를 재지 않는다.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여러 선사들을 찾아뵙곤 했지만, 중간 중간에 과거 치르랴 혼인하랴 일이 많았고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이기지 못해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허망한 세상살이에서 온갖 것들이 다 헛되니 단 하나도 즐겁게 여길만한 것이 없음을 통감하고, 이 일대사인연에만 마음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벼슬살이하는 사람입니다. 국록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과거科擧와 혼인 또한 세상살이에서는 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별 것 아닌 잘못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지만, 그대가 큰 잘못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옛날의 성현들도 피하지 못한 일입니다. 
또 단지 온갖 것이 다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다 안 게 아닙니다. 이 선문禪門 안쪽으로 마음을 돌이켜 지혜의 물로 찌든 때를 씻어내십시오. 바로 발밑에서 다 헛되다는 생각일랑은 칼로 잘라내듯 하십시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도 아직 오지 않은 일도 마음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해버리고 나면, 뭔가를 하는 것도 헛되고 받아들이는 것도 헛됩니다. 안다고 하는 것도 헛되고 모른다고 하는 것도 헛됩니다. 지나간 것과 지금 있는 것 앞으로 올 것도 죄다 헛됩니다. 이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헛된 것을 다스리는 약으로 헛되다고 여기는 병을 치료한 것입니다. 병이 다 낫고 약이 필요 없어지면 아프기 전의 그냥 예전 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약 아픈 상태와 다 나은 뒤의 상태가 서로 다른 것처럼 여기면 이것은 삿된 마구니의 도리이며 견해일 뿐입니다. 부디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저 다음과 같이 힘쓰십시오. 마음이 무척 고요하다 싶을 때도 수미산과 방하착 이 두 가지 칙어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것만 착실히 하십시오. 지나간 것은 걱정하지 말고 생각지도 마십시오. 생각하고 걱정하는 그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 이렇게 꾸준히 하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

만약 그대의 말처럼 예전의 잘못이 정말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 목전에 있는 것도 모두 정말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관직도, 부귀도, 은혜 입은 것도 모두 정말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것이 정말 있다면, 천당도 지옥도 있고 번뇌와 무명도 있는 것입니다. 업業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고 업을 받는 사람도 있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 또한 정말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생각하게 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모든 부처와 조사들이 제시한 온갖 수행법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된 것이 되고 맙니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