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 마산 정법사 지태 스님

우리도 부처님처럼

2018-05-30     김우진
사진 : 최배문

저는 이곳 정법사에서 처음 주지 소임을 맡아 20년 이상 살았습니다. 주지 소임을 살면서 느낀 것이 ‘한 절의 주지가 역할을 잘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기 딱 좋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오는 것은 과거 생에 부처님과 불법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없으면 절에 올 수가 없습니다. 무연無緣의 중생은 부처님이 세상에 천 번을 출현해도 제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불연을 맺어 절에 오는 불자들을 철저하게 수행, 공부하는 부처님 제자로 이끌어가는 것이 주지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부처님 제자로 이끌어 가지 않고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양 올리는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그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것이 무간지옥 감인 것입니다. 부처님 인연 맺으러 온 분들에게는 바른 불교를 가르쳐 주어야 하며, 또 새로이 불연을 맺어 절에 오는 분들이 계시면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입니까? 부처님 명호를 양족존兩足尊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계戒와 정定, 지혜와 복을 원만하게 갖춘 분이라는 뜻입니다.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에 다니는 불자들의 마음가짐은 기본적으로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심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불자들이 우리 절을 찾으면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비심이란 그저 안아주고 반겨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법을 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오래 절을 다닌 불자들 중에 터줏대감 노릇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수행을 많이 했다고 오히려 상을 내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매월 초하루 『금강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금강경』의 핵심 내용이 바로 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초심자분들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아주지 못할망정 상을 내면 안 됩니다. 

‘기도 수행을 했다’ 하는 상을 내고, 바라고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아무리 훌륭한 부처님 법을 공부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의 공덕도 없습니다. 정말로 기도를 열심히 했다면 무아지경, 선열에 들어 나라는 존재가 생각나지 않게 되며 곧바로 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공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더니 부처님이 웃어 보이시고, 꿈에 큰 스님이 나오셨다고 좋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본인의 마음이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 그로 인한 어떤 좋은 일도 없습니다. 그 또한 다 망상심이고 몽상夢想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불교 공부는 자신의 공부이지 남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쌓는 공덕 또한 자기의 공덕이지 남의 공덕이 아닙니다. 기도를 일체중생을 위해 회향을 했다 해도 중생심은 자신에게 그 공덕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 도리를 알고 나면, 공덕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는 자체가 없습니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 공덕이 돌아온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법은 무위법無爲法이요 부처님 공덕은 무위공덕無爲功德입니다.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끝이 없고 소진되지 않는 것이 무위법이고 무위공덕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중생에게 바라는 마음 없이 법을 전하고 공덕을 쌓으셨습니다.

이러한 불법을 전해 듣고 그 즉시 깨달음을 얻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중생의 근기와 복덕이 모자라니 그러한 경지까지 계속해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불자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실천하기 가장 좋은 수행이 육바라밀六波羅蜜 수행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반야)바라밀을 통칭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바라밀입니다. 반야란 곧 부처님이 되는 것을 말하며 반야바라밀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비유하자면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을 낳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보시바라밀은 그렇게 태어난 아기 부처님에게 영양이 좋은 모유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보시를 많이 하는 것은 내 안의 부처님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이 있어 보시하는 것은 바라밀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주상 보시입니다. 무주상 보시가 보시바라밀입니다. 일체 상이 없는 보시를 하는 것이지요. 항상 자연스럽게 보시행을 실천하는 것, 일체 생각의 개입 없이 행하는 것이 무주상 보시바라밀입니다.  

그리고 지계바라밀은 말 그대로 계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분별없는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계를 지킨다, 지키지 않는다 하는 분별없이 계를 지킵니다.

부처님이 성불하기 전까지 과거 생에 얼마나 많은 인욕바라밀을 닦으셨는지 아십니까? 무려 5백 생 동안 인욕바라밀을 닦으셨습니다. 중생들은 하루 한 시간의 인욕도 어렵습니다. 인욕이란 순간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집에서 가족들이 내 마음 같지 않은 행동을 하고 궂은소리를 하면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맞받아치고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때 잠깐을 참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나라는 상과 아집, 그것을 번뇌라 생각하고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인욕이란 모든 번뇌에 전혀 걸림 없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목숨을 끊겠다고 절벽 끝에 선 사람도 그 순간만 참아내면 다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해도 나무에 걸려 목숨을 구하면 그때는 살려달라고 하지요. 순간의 번뇌를 인욕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살고자 절박해지는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을 행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4상이 다 없는 세상이 됩니다. 인욕을 하면 4상이 없어져 32상 80종호가 갖추어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5백 생을 인욕하여 성불하셨고 32상 80종호를 갖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부처님을 장엄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을 행하면 부처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참선 정진하는 것은 부처님을 성장시키는 일이요 참선을 열심히 하여 선정에 들면 일체 망상이 없어집니다. 선정에 들면 일체 망상심이 없어져 버리니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참선뿐만 아니라 기도만 해도 무아지경에 듭니다. 그러면 일체 번뇌가 싹 사라져 버리니 세탁기에 더러워진 옷을 넣고 세탁하면 때가 벗겨지듯 선정바라밀 또한 일체 번뇌를 싹 씻어내는 세탁기와 같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아기부처님 관욕을 하는데, 이때 나도 부처님처럼 일체번뇌를 다 벗어나겠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개위비심皆爲非心 시명위심是名爲心’ 금강경 일체동관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 생각하는 것은 다 망령된 마음입니다. 그 망령된 마음을 비심非心이라고 합니다. 시명위심이란 번뇌가 다 없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올바르고 진실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그 진실한 마음을 찾는 것이 근본입니다. 진실한 마음, 실상을 찾아내면 불성은 자연히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아난 존자가 마지막으로 여쭙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느냐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십니다.

불교를 바로 믿으려면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 삼고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육바라밀을 잘 닦고 수행 정진하면 32상 80종호를 갖출 수 있으나 외형을 갖추었다고 하여 다 부처는 아닌 것입니다. 겉보기가 훌륭하다고 하여 따라서는 안 됩니다. 올바르게 정진하고 정법을 가르치며 스스로 행하는 수행자를 따라야 하며 내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명심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법문. 지태 스님

마산 정법사 주지.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승가대학에서 수학하며 중강 소임을 맡았다. 통도사 교무와 노전 소임을 맡았으며, 1996년부터 마산 정법사와 인연하여 도심포교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