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부처, 마애불]고창 선운사 도솔암

새로운 세상을 여는 비밀을 간직한 선운사 도솔암 미륵마애부처님

2018-05-04     이성도
사진 : 최배문

고창 선운사는 봄 동백, 한여름 녹음, 초가을 꽃무릇, 가을 단풍 그리고 겨울 설경 등 언제나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선운산이지만 정상으로 가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호남의 내금강이라 할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풍요로운 자연과 함께 계절마다 새로움이 가득하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에서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라고,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는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라고 읊고 있다. 또한 대중가수 송창식의 「선운사」의 노랫말에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예요…”라며, 선연한 붉은 핏빛으로 피었다가 처연하게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며 엇갈리는 우리들의 삶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선운산에 동백이 가장 많다. 선운사 뒤편에 5백 년 수령의 6m 높이 3천 그루 이상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동백나무로 짙푸른 녹색의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단풍나무가 무성한 선운산은 연초록의 신록과 여름의 녹음 그리고 가을의 단풍이 짙다. 초가을 선홍색의 꽃무릇은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라는 말처럼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다. 초가을 뙤약볕이 쏟아지는 때에 선홍빛 카펫을 보는 듯한 선운사의 9월 풍광은 아련한 그리움 속으로 깃든다. 박동진의 「시월 선운사」는 “억겁 기다림으로 살아야 한다는,/그 이별 끝내 숙명으로 안았다는,/동무들 다 떨구고 개울가 돌 틈/빼초롬한/꽃무릇 한 송이/너 보자고, 너 보자고 도솔천…”이라고 꽃무릇을 통한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이곳은 시인의 노래만큼 시정 넘치는 곳이다. 여기에 유서 깊은 사찰 선운사가 있다. 천오백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전통문화가 품어내는 향기와 풍요로운 자연과 정서가 담겨 있는 사색과 치유의 공간으로 언제나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선운사는 평지사찰로서 호남지역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진 명찰이다. 선운禪雲은 참선 수행자가 구름처럼 많다, 아니 참선의 관문을 뛰어넘어 속진을 벗어난 이가 구름처럼 많다는 것이다. 수행도량으로 이름 높은 선운사는 오랫동안의 역사에서 쓰러지고 다시 세우는 중창을 반복하면서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 행호幸浩 스님이 중창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불타고 다시 중창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넓은 사역에 여러 전각의 배치는 조화롭다. 그 중심에는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 맞배지붕에는 단순하고 장중함이 깃들어 있다. 대웅전이나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을 보면 형태나 공간, 개별적인 기둥과 보 그리고 서까래 등의 목재 또한 정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호방함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선운사는 삼장三藏지장보살을 모신 도량으로 꽤나 이름이 나 있다. 도솔암, 참당암, 선운사 지장보궁의 지장보살상은 천장天藏·인장人藏·지지持地지장보살의 삼장보살들로, 고려와 조선을 대표할만한 명작이다. 지장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성인이며 대원大願을 세운 보살이다. 선운사가 지장도량인 연유는 아마도 조선 성종 때 중창불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배불의 역사 속에서 위기에 빠진 불교가 생존하는 방법의 하나로 당시 왕실이나 권력층의 비호를 받아 그들의 소망을 기원해주는 방편에서 지장신앙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길이다. 산의 계곡을 따라 오르면 진흥굴과 참당암을 거쳐 도솔암에 이르는데, 완만하고 자연스럽다. 도솔암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모셔져야 하는데 현재는 고려시대 금동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그의 빈자리를 지장보살이 지키고 있다고 보인다. 

도솔암 내원궁 아래 거대한 암벽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지장신앙이 미륵신앙과의 연계성을 보여주면서 미륵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마애불은 선운사의 상징이 되고 오랜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도솔암 미륵마애불은 선운사의 삼장 지장보살상보다 훨씬 오랜 전에 조성되었고,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호남의 미륵신앙의 주요 성지이기도 하다. 절벽에 있는 13m의 큰 마애불좌상을 보면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놀라고, 그 크기뿐만 아니라 거칠고 개성적인 데에 재차 놀란다. 그보다 이 불상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불상의 가슴 아래 있는 복장감실에 있는 비기秘記 때문이다. 이 비기로 인해 마애불은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희망의 미륵불이 되었다. 특히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때 그 믿음은 배가 된다. 따라서 이 비기가 열리는 날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개벽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제 한말 당시 1894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은 1892년 불상의 가슴에 있는 복장물을 동학교도 손화중 등이 탈취해 간 데서 시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도솔암 미륵마애불은 백제 위덕왕이 선운사의 창건주 검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표현양식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인체의 정상적인 비례나 자연스런 동세를 떠나, 정제되지 않은 형태와 평면적으로 표현돼있는 빈약한 조형성은 고려 초에 유행한 거불巨佛이나 마애불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양감을 살리지 못한 얕은 저부조이며 비례, 균형, 디테일의 표현에서 어느 하나 세련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 장대한 스케일만 드러날 뿐 불상이 갖는 이상적이고 정제된 표현은을 볼 수가 없다.

머리는 삼각형으로 표현됐다. 평면의 넓은 귀와 더불어 아래로 내리뜬 매서운 눈매는 보는 이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는 것 같고, 한 일一 자 수평의 날카로운 입은 직선적 성격의 카리스마를 띤다. 이 마애불상은 지혜와 복덕을 구족한 이상적인 자비의 불상이라기보다 권위적이고 개성이 강한 얼굴이다.

치켜세우면서 내려뜬 날카로운 눈, 좁고 둔탁한 코, 벌린 듯한 큰 입, 평평한 얼굴, 형식화된 넓은 귀, 짧은 턱과 짧은 목은 불상이 내려 보는 듯한 자세로 권위적인 시골의 고집 센 호족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거친 암벽의 석질과 더불어 오랜 시간 동안 풍화되면서 더욱 둔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부처님의 자비롭고 온화한 인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인체가 갖는 유연성 대신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다.

몇 가닥의 옷 주름선과 직선에 가까운 다리 모습은 매우 간략하면서 단순하다. 대좌는 3단의 계단식 사각형으로 겹쳐 있으며 위아래로 넓적한 연잎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좁은 어깨에서 느슨하게 내려온 두 팔과 큰 장갑을 낀 듯한 손과 가지런한 손 모양, 어색한 결가부좌, 고집스러운 얼굴 등은 해학적이면서 천진스럽기도 하다. 

사진 : 최배문

지난 정월 보름에는 마애불을 건너 맞은편 천마봉을 오르내리면서 보았고,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에도 배관拜觀을 하였다. 낮에는 불신 전체가 평면으로 보였는데 달이 떠오른 밤에는 사면斜面에서 비추는 달빛으로 보다 분명한 디테일이 드러났다. 떨 부浮, 새길 조彫라는 글자만큼 선명한 형태를 볼 수 있었다.

깊은 산중의 불빛 하나 없는 고요 속에서 산 위에 솟아오른 달과 멀리 별빛이 함께 마애불을 비추는 적조寂照의 시간에 가진 내밀한 친견이었다.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상호와 불신이 살며시 드러나 근원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었다. 그것은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오랜 세월동안 온갖 풍진에 시달리면서, 더욱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배꼽부분을 도끼질 당하면서 복장물을 탈취 당하였던 아픔도 사라져버린, 본연의 모습이었다. 여기에 불상 앞에 켜진 수많은 촛불이 아래에서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이 불상 앞에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크고 작은 소원을 새롭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중생세계로 하생하였던 미륵불이, 천년도 넘는 시간 동안 너무도 고단하였던 그 모습을 감추고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미추의 미적 판단이나 역사적 분별을 넘어 존재의 본연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미학 그 자체였다. 고요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하나의 비춤이 있으니 그 하나하나 존재의 미묘함을 다 드러내었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