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스님 생활법문] 기도 전에 지녀야 할 두 가지

2018-05-04     광덕 스님

|    작은 나에서 해방된, 참다운 자기 만들기

이것을 버려야 참으로 모두가 대립이 없는 무대립의 세계에 서게 됩니다.

형제들이 기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엇인가 소망을 생각하고 염불을 생각하는데, 저는 먼저 두 가지를 준비시킵니다. 하나는 부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부처님의 무량 공덕에 대한 확신, 그 공덕이 자기의 생명에 이어지고 있다는 확신, 그것이 끊임없이 나에게 비춰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합니다.

두 번째는 집안에 부모님이나 부부간이나 형제간이나 혹은 이웃 간에 미움이나 원망 대립이 없는지, 그것을 돌이켜 반성하고 버리도록 합니다. 부모님이나 부부간에 가족 간에 또는 이웃 간에 대립하는 감정을 한 톨 정도의 아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부처님께 기도하고 공양을 올려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말하자면 문을 닫아놓고 햇빛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주셨건만 자기가 문을 닫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공하고 기도하기에 앞서서 꼭, 내 속에 대립 감정이 없는가, 미워하는 것이 없는가,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없는가,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혹시 없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만약 모르더라도 열심히 염불하다 보면 자기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에 우리 아무개가 공부 안 하고, 아무개가 반항하는 이유는 내 잘못이고 전부 자기가 뿌리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염불하고 염불할수록 마음 가운데에서 잘못된 생각이 녹아버려서 넓은 마음이 되고, 넓은 마음이 될수록 과거의 허물이 나타나서 참회가 됩니다. 열심히 염불을 하다 보면 그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고 개운해집니다. 따라서 이젠 나를 다치게 하고 손해나게 할 자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고집을 비웠을 때 그렇게 됩니다.

반야바라밀 수행이 이런 무대립의 세계에 입각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아를 통해서 아집, 고집, 대립, 감정,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 등을 버렸을 때 참다운 자기가 됩니다. 집착하고 있을 때는 참다운 자기가 아니고 거짓된 자기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남과 다투고 있을 때는 가짜 자기이며 공덕이 없는 자기입니다. 그것을 버렸을 때 참 자기, 즉 작은 나에서 해방된 진리인 자기, 참다운 자기가 됩니다. 우리가 아집을 버리고 조그만 것에 집착을 버렸을 때 부처님 공덕을 함께한 자기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너그럽고 지혜롭고 복되고 굳세고 용기 있는 자기 그 참 자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든지 지혜가 있고 용기가 있고 굳세서 행복한 일을 뜻대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다 가지고 있는데, 아집 때문에 참 자기가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자기가 속박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박에서 해방되려면 아집에서 떠나라는 것이 여기까지의 말씀입니다.

 

|    부처님이 하는 염불

그다음에는 수행의 방법입니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바라밀을 염하자’입니다. 바라밀을 일심으로 염송하는 것은 여래의 힘이고 부처님의 힘입니다. 일심으로 염불하는 데 잘 안 된다고 할 때,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심으로 바로 하면 그것이 부처님의 힘입니다. 염불할 때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과 같이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100명이 염송하면 나 혼자가 아닌 100명이 같이하고 부처님이 또 함께해서 101명, 부처님을 통해서 모두가 뭉쳐진 것이어서 가장 완전한 힘과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수행하는 것은 내 생명의 깊이에 있는 완전한 부처님에게 올바른 희망 소망의 공덕이 움직여서 나에게 바라밀염송도 하고 나에게 올바른 희망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되겠다든가, 기도 성취해야 되겠다는 착한 마음은 범부에게서 나오는 마음이 아니고 부처님의 공덕생명이 싹트는 것이며 부처님의 공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키우면 부처님의 힘으로써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할 때 ‘내’가 염불하고 내가 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으로 알지만 이것은 ‘부처님’이 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위신력이 하는 것임을 반드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일심으로 염불하면 깨달음의 몸, 반야바라밀의 몸이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세계와 내가 각각이어서 나의 염불하는 마음과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일심으로 염할 때 내 몸 가운데서 또 하나의 몸 진실한 몸이 점점 확대되고 성장하여 부처님의 공덕이 그 가운데서 더욱더 커 갑니다.

오늘 내용을 정리해보면, 비우는 것입니다. ‘집착과 아집, 그리고 생각하던 것을 모두 다 비워버려라,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려라.’ 하는 이야기로 결론이 납니다. 다 놓아버리면 신령하고 밝은 공덕이 전면 나타납니다.

 

|    흑씨범지의 꽃공양

제가 그 전에도 몇 번인가 방하착하라는 법문을 했습니다. (방하착의 유래는) 선문에서 흑씨범지黑氏梵志(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처님 바라문교를 믿는 흑씨범지라는 수행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부처님께 꽃공양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 꽃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오동나무 꽃이라고 합니다. 흑씨범지가 오동나무를 뿌리 채 뽑아서 두 손에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왔습니다.

부처님께서 흑씨범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놓아라.” 그랬더니 흑씨범지는 자기가 가지고 온 꽃을 놓으라는 줄 알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놓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놓아라.” 그러니까 왼손에 가지고 있던 것을 놓습니다. 부처님께서 세 번째로 또다시, “놓아라.” 하십니다. 이 사람이 ‘두 손에 있는 것을 모두 놓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또 놓으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여쭈어봅니다.

“부처님, 저는 지금 손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놓으라고 하십니까?”

“안으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육근六根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바깥 경계에 집착하는 육진六塵을 다 놓아버리고,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하고 분별하고 따지는 육식六識을 놓아버려서, 다시는 더 놓을 것이 없는 데까지 가면 그때가 네가 생사를 해탈한 때다.”

꽃을 가지고 온 외도에게 그렇게 법문하십니다. ‘놓아라’를 세 번 하셨는데, 그 말은 꽃을 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의 집착을 다 놓아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오신통五神通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법문을 듣고 단번에 자기 마음의 집착을 놓고 대도大道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비워라 하는 이 법문은 이렇게 근본적인 자기광명(을 누리는 법), 내가 집착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속박을 받고 있던 것을 놓음으로써, 비움으로써 본래의 진실한 광명을 누리라는 것임을 우리는 배우고 있습니다.

대개는 무아無我라고 하면 이런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집착을 놓고 마음을 비워서 전면적으로 자기 생명에 있는 빛나는 큰 진리생명을 쓰라’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자기로 살라’는 것이 원래의 무아 법문입니다.

무아란 거짓된 자기에 대한 집착을 놓음으로써 완전히 큰 자기를 회복해서 진실한 자기대로 살라는 지혜와 용기와 물질에 걸림이 없는 자유스러운 자기를 쓰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아의 법문을 통해서 우리들은 작은 우리에서 벗어나 큰 빛나는 진리인 자기를 회복해서 정말 밝고 빛나는 진리 공덕을 누리게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