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나를 흔들다]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만난 이들

2018-05-04     남상욱
그림 : 박혜상

비교적 이른 나이에 나는 직장에서 자발적 명퇴를 하고 곧바로 배낭 매고 유랑의 길로 접어들었다. 젊은 시절부터 구도의 열정은 있었으나, 수십 년간 외도를 헤매다 천만다행으로 만난 부처님 정법에 너무 기쁜 나머지, 생사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 결코 진정한 내 삶을 살 수 없다는 발심 하나로 모든 걸 정리하고 보따리를 쌌던 것이다.

그때 미얀마 수행센터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인도에서 지냈는데, 겨울철 내리 삼 년간 ‘마더하우스’에서 일(봉사)한 적이 있다. 수행처에서 공부의 기초를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수행이 삶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실생활에서의 ‘알아차림(실참)’이 필요하다는 게 나름의 판단이었고, 그것을 이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인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극한 상황에서 생사의 근원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마더 하우스’로 향하게 했다. 
콜카타에 있는 ‘마더 하우스’중에서도 내가 일한 곳의 정식 명칭은 벵갈어로 ‘니르말 흐리데이Nirmal Hriday’ 즉,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란 뜻이다. 인도의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소똥만큼이나 흔한 노숙인들 중에서도 상태가 가장 심각한 분들을 모셔와 죽음이라도 편히 맞게 해 주자는 일종의 호스피스 병동이다. 나는 이곳에서 숱한 죽음들과 함께하며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통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흔히 ‘죽음의 집’이라고 하면 분위기가 매우 침울하고 어두울 것 같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거의 죽음에 가깝도록 길거리에 홀로 방치되었다가 센터에 입소하여 규칙적인 식사를 하게 되고 돌봄을 받아서인지 점점 좋아지는 분들도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또 끼리끼리 모여 장난도 치고 심지어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인도 사람들 특유의 낙천적인 모습이 그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비록 ‘죽음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보통 사람들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다. 때로는 그들끼리 거칠게 싸우기도 하고 서로 돕기도 하며 옥신각신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생긴 모양도 사회의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다소 거친 사람들도 있고, 아주 착하고 순한 사람도 있는 등 천차만별이었다.
      
거기서 일하는 동안에 정이 많이 들었던 분들도 돌아가시고 나면 대체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침대를 쓰던 두 분의 임종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분은 눈썹이 진하고 키가 훤칠한 분으로 늘 다소곳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신 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탓에 가끔씩 대소변 실수를 해서 옷을 갈아입혀 드리면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분고분하게 잘 따라 주셔서 돌봐드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분을 처음 만나던 날 코코넛 오일을 발라드리며 마사지를 해 드렸더니 너무 흡족해하셨고, 그 후로는 만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분이셨다. 특히 이 분은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짧은 영어로 몇 마디 소통도 가능했는데, 몸이 바짝 말라가고 가끔씩 피를 토하기도 하는 등 죽음의 그림자가 온몸에 역력히 드리워졌는데도 곧잘 농담도 하시며 늘 평온한 모습이었다.
누워계셨지만 정신도 맑고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동을 전혀 못하시더니, 바로 그 이튿날부터 숨이 가빠지기에 경험상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의 징후가 보여 가볍게 손을 잡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좋은 곳 가세요, 그리고 부처님 법 만나서 열반에 이르세요!’라며 귓가에 나직하게 짧은 영어로 인사를 드렸다.
그 말을 알아들으셨는지 신기하게도 나를 잡은 손에 약간의 힘을 주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지더니, 잠시 후 손이 축 늘어지며 잠이 들듯 스르르 운명하셨다. 그 센터에서 임종하시는 분들 중 보기 드물게 눈도 감고 입도 반듯하게 다문 채 마치 편하게 주무시는 모습이어서 두 손을 모아드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멀지 않은 전생에 나의 아버지였을지도 모르는 그분은 그렇게 편안히 가셨고, 나는 그날 이상하게도 죽음의 슬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분은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믿음에 터무니없이 기분까지 좋아지며,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참 아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한 분은 비교적 젊은 분인데 늘 침상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계시다가 다른 사람이 조금만 건드리거나 도와드리려고 해도 곧잘 난폭한 행동을 보이는 분이셨다. 식사도 일일이 떠먹여드렸는데 갑자기 입안에 있던 것을 뿜어버리기도 하고, 체구도 큰 데다 너무 공격적 행동을 보여 대소변 갈아드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 분도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가시는 길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어 드리고자 손을 잡고 안정을 시켜드리려 해도,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무엇에 끌리는 듯 허공에 손을 저으며 줄곧 발버둥을 치셨다. 눈은 충혈되어 아예 붉게 변하고 손을 잡아드리면 어떤 물건을 잡듯 힘껏 움켜쥐고 휘젓다가 손톱에 긁혀 내 손에 적지 않은 상처가 났을 정도이다.
몸은 고통스러워 이리저리 뒤틀고 무슨 헛것이 보이는지 낮게 애원하는 듯 중얼거리며 계속 힘들어하셨다. 이 힘든 모습을 지켜보며 비록 옆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있다 한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할 매우 실존적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주일 이상을 너무 힘들어하시다가 인사 한마디 못 나누고 뜬 눈으로 임종하셨는데 왠지 마음이 몹시 슬프고 아팠다.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사람대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을 그분의 인생이 측은하고 편안하지 못한 죽음이 슬퍼서 숙소에 돌아가 잠을 청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분의 시신은 거기서 운명하는 다른 분들처럼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래위가 붙은 흰색 인도 전통의상 한 벌을 입고 들것에 실려 옆 창고로 옮겨졌다. 얼마 전까지 고통에 몸 부린 치던 그분은 한순간에 나무토막처럼 변해서 다음 날 아침 인근 가터(강가 계단)의 화장터에서 불태워지고 남은 재는 빗자루에 쓸려 옆 강물에 흔적도 없이 버려졌다.

두 분 다 어쩌다 노숙인으로 인생을 마쳤지만 한 사람의 죽음에서는 슬픔보다 아쉬움이 컸고, 한 사람에게서는 아쉬움보다 슬픔과 연민과 아픔이 컸던 꽤 상반된 경험이었다. 지금도 두 분을 기억하면 한 분은 아직 내 마음속에 부활하여 생생히 살아계신 듯하고, 다른 한 분을 생각하면 여전히 슬픔과 연민의 마음이 솟아오른다.
여기서 겪은 여러 죽음들의 모습들에서 상좌부 불교의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죽음의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과 신심이 더욱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죽기 전에 흐르는 잠재의식, 원인과 결과로서 과보가 상속되고 죽음의 마음, 태어날 곳의 표상 등 자세한 죽음의 전 과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조건 지어진 업에 의해 죽음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명백하게 보였다.
흔히,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의 죽음은 망각하거나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 같다. 모두 죽음보다는 삶의 문제가 더 바쁘고 시급하니까. 그러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숙고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남상욱
명예퇴직 후 미얀마 Mahasi Meditation Center에서 수행하고, 현재는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등지를 떠돌며 위파사나 명상과 여행, 봉사, 백수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