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이야기

삶의 여성학

2007-09-15     관리자


요즈음은 도로가 잘 뚫려 있는데다 가족 단위의 자동차 여행이 일반화되어 국내 어디를 가든 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깊은 산 절 마당이나 한적한 시골 어디에고 차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조용한 곳을 찾아서 휴가를 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가면 차 밀려 고생하고 사람 북적대어 고생하는 줄 알면서도 고생길을 마다 않고 모두들 휴가(?)를 떠난다.
요즈음은 휴가로 들뜬 여름이기 때문에 모임에서 누구를 만나면 휴가를 두고 종종 인사말을 나누게 마련이다. 얼마전 일주일마다 모이는 정기적인 모임에서 시작하기 전에 나온 회원들끼리 잡담을 하고 있는데 한 회원이 헐레벌떡 바쁘게 들어왔다.
30대의 이 회원은 제주도에 휴가 갔다가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이 모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혼자 먼저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회원들이 비행기까지 타고 섬에 휴가 갔다온 이야기를 좀 하라고 하자 당사자인 새옹 엄마는 "도착해서 올라 올 때까지 일만 직사하게 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다."면서 휴가는 무슨 휴가냐며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새옹 엄마의 말을 빌면 자기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휴가를 즐겨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의 고향이 제주도이기 때문에 휴가 때마다 시부모가 계시는 고향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제주도에 내려가는 것이 연례 행사처럼 되었다고 한다. 남들이 보면 근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네 가족의 휴가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이었다.
새옹이 엄마는 여름만 되면 시댁으로 휴가(?)를 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허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가 재발한다고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연방 가슴을 두드리고 앉아 있었다. 작은 체구의 새옹이 엄마는 칠남매의 맏며느리였는데 시어머니는 휴가철이 되면 언제 오느냐고 전화로 재촉을 하였고, 다른 형제들도 같은 시기에 휴가를 받아서 시댁에 가보면 온 형제들이 다 모인다는 것이었다. 식구가 많으면 여자들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새옹이 엄마는 시어머니 따라다니면서 시키는 것만 해도 다 따라 할 수가 없고 자기는 부엌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는 일을 잘 하셔서 연방 재촉을 하는데 자기는 요구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을 해낼 수가 없어서 더 힘들고 아이를 둘 낳은 지금까지도 헤매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동서, 시누이들과 함께 하면서도 맏며느리 책임감 때문에 모든 것을 더 잘해야 되고 빨래며 먹거리 뒤치다꺼리들이 자기 차지가 될 수밖에 없는데 남편은 해 주는 것 잘 먹고 형제들과 어린시절 이야기 하며 느긋하게 누워서 고향 휴가를 즐기는 것을 보면 얄밉고 화가 치밀어서 집에 오면 말도 하기 싫어진다고 한다.
가족이 함께 휴가를 가면 주부인 여성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식사준비며 빨래들을 혼자 떠맡게 되어 일 더미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모처럼 함께 간 휴가의 본의가 증발되는 경험을 하기 쉽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남자들이 밥하고 설거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요즈음 젊은 세대는 집에서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가족도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나라 남자들은 자기 부모님 집을 방문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우리 집 귀한 아들, 군림하는 남편'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집에서 잘 도와주던 남편도 자기 집에 가면 손끝 까딱을 안 한다고 남편 흉을 보는 주부들을 우리는 종종 만날 수 있다. 어떤 남편은 "우리 집에 가면 부모님 앞에서 나를 하늘같은 남편으로 받드는 척 해야한다."고 미리 주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들고 가던 짐도 시골집이 가까워지면 짐 놓고 점잖게 어깨 펴고 '남자체면'지키며 들어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자신의 후원자인 부모님, 특히 우리 아들 프라이드로 가득 찬 부모님 정서를 의식한 '몸가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남편들이 고향집이나 부모님 앞에서 귀남이로 돌아가거나 귀남이가 되어야 하는 아들들이 많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가족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새옹이 엄마는 해마다 겪고 있는 휴가 몸살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족문화 안에서 이상적인 휴가 양태로서의 고향 휴가가 아직은 여성에게 휴가의 의미를 살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의 유대를 다시 확인하고 형제자매가 한 자리에 모여 휴가를 즐기고 싶어한다. 일을 하는 사람은 꽉 짜인 조직사회에서 풀려나 매인 데 없는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집안 일과 아이들에게 시달린 주부들은 신경을 조이는 살림살이에서 벗어나 한 몇 일만이라도 밥 걱정 안하고 살고 싶어한다.
70이 넘은 할머니들도 집 떠나서 해주는 밥 얻어먹고 구경하고 다니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며 '신나는 여행'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여성들이 집과 살림살이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해마다 남들이 가고 싶어하는 제주도로 휴가를 가면서도 결혼 후 한번도 휴가를 못 갔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새옹이 엄마의 푸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올해는 가서 할 일 다 해주고 남편에게 '나도 내게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서울로 간다'고 말한 뒤 말리는 남편을 남겨두고 역으로 서울에 올라와 회원들과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휴가가 느껴진다는 이 주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한 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새옹이 엄마의 휴가 이야기를 빌미로 지금까지 우리 어머니들에게 그리고 주부들에게 휴가란 것이 있었나하는 문제로 각자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 휴가에서 여성이 느낀 경험은 세대별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긴 하지만 가족 휴가가 여성에게 휴가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족성원 모두가 서로 상대를 배려하면서 계획을 잘 짜야 한다. 지금의 가족 휴가는 '남편의 휴가'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가족 휴가라면 가족들이 자유로움과 휴가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의식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고 가족 상호간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집살이가 엄격했던 시대의 며느리들에게 유일한 휴가란 몇 년에 한번 있는 친정길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친척 아낙네끼리의 화전놀이 정도가 허용됐었고 때에 따라 절 나들이가 그나마 집을 벗어나는 휴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된다. 집을 벗어나는 그 자체가 여성에게 자유와 휴가를 의미하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집안이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집안일 하지 않는 바깥은 여성에게 일을 쉬는 곳이고 살림살이로 골치를 썩히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곳으로 비치는 것이다. 주부들이 친구들과 여행(국내든 해외든)을 다녀오면 생기가 나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새옹이 엄마의 내년 휴가 계획은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하다. 자신이 힘든 것을 참고 휴가 같은 것은 생각 밖에 두고 다가오는 10년을 남편과 시집식구를 위해 희생봉사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휴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할까로 고민하고 있다. 그럴 경우 남편에게 이해시키는 문제와 남편과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하는 것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가족 행사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도 고민해야 할 문제로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면서 가족이 모두 즐길 수 있는 휴가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까? 분명히 중요한 가족구성원 중의 한 사람인 주부-아내-며느리의 희생과 노동 위에 다른 가족의 즐거움을 찾는 방식은 여성을 포함한 가족 모두의 즐거움을 찾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족 휴가가 남편의 일방적인 휴가가 된다든가 귀남이가 즐기는 호도 휴가에 치우치는 모습은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유쾌하지가 않다.
고향에서 부모와 더불어 보내는 가족 휴가를 외치기에 앞서 노인과 아이들과 주부가 소외되지 않고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가족 문화가 먼저 들어서야 가족 모두가 자연스럽게 가족의 따뜻함을 경험하고 한가족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