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제자 이야기] 아내와의 약속을 기억하는 가섭

옛 아내 밧다와의 약속을 기억하는 성자

2018-04-05     이미령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섭이란 분이 있습니다. 바라문 집안 출신으로, 부처님이 인정한 수행 으뜸인 가섭 존자입니다. 

이 가섭 존자는 출가하기 전, 아주 부유한 바라문 집안의 상속자였습니다. 그는 외아들로서,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재산 전부가 그의 차지입니다. 부모의 바람은 딱 하나, 자신들의 가문에 잘 어울리는 뼈대 있는 바라문 집안의 곱고도 선량하고 현명한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후사를 잇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가장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거스르지 않고 누구나 당연히 걸어가는 길이라 여기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핍팔라야나(가섭 존자가 출가하기 전 집에서 불리던 이름입니다)는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은 세속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속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세속에서 사는 일은 번거롭고 무의미하고 덧없고 눈물과 번민의 반복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나 이 세속을 떠나 자유로운 출가자가 될 것인가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속을 떠나려는 아들의 마음을 부모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미 혼기를 넘겼는데 여성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짐작하는 핍팔라야나는 감히 집을 떠나 출가를 감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미녀상을 조각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어서 부모에게 내밀고 말했습니다.

“이 미녀상과 꼭 닮은 여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저는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혼인할 생각이 있기는 있나 보다 하고 부모는 생각했습니다. 전혀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입니까? 서둘러 미녀상을 수레에 싣고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똑같이 생긴 처자를 찾아오라고 명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여인을 심부름꾼들은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아니, 미녀상의 빛이 바랠 정도로 미모는 더 뛰어났습니다.

결혼이란 제도는 한 사람을 이 인간사회에 아주 굳건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제도입니다. 독신의 신분으로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의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 집안의 혼사이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혼사는 취소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외아들 핍팔라야나의 성대한 혼례식이 끝나자 어느 사이 부모는 며느리의 임신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며느리 밧다 역시 새신랑과 똑같이 세속의 가정생활에 아무런 애착도 기대도 품지 않은 여성입니다. 그녀 역시 이제나저제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죽을 때까지 수행하며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억지로 결혼을 ‘당한 것’이지요.

신랑신부가 이렇게 마음이 맞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속된 말로, 이보다 더 궁합이 맞을 수가 없을 겁니다. 

|         꽃가지가 시들라
첫날 밤 신랑신부의 잠자리 한 중간에는 아름다운 꽃가지가 놓였습니다. 행여 잠결에라도 뒤척이다 이성의 몸에 닿지 않도록 경책하기 위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부부 사이에 놓인 생화가 뭉개지지 않았다면 이들 부부는 순결의 서약을 지킨 것이니, 이 고결한 몸과 마음으로 시절인연을 기다렸다가 수행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고 아들 부부에게서 2세 소식만 기다리다 어느 사이 부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안 재산에 아무런 애착도 미련도 품지 않은 두 사람은 일가친척과 하인들에게 골고루 재산을 나눠주고서 집을 나섰습니다. 

남방에서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부부는 모든 재산을 남들에게 다 나눠준 뒤 가사와 발우를 시장에 가서 사 오고, 부부가 서로의 머리를 삭발해주었다고 합니다.(오원탁 옮김 『부처님의 제자들』 경서원, 109쪽) 그리고 부부는 함께 대저택을 나섰습니다.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숲의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수행 하려고 세속의 삶을 포기한 사람으로서 부부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어쩐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부부는 갈림길에서 작별합니다.

『불본행집경』에서는 조금 다르게 들려줍니다. 남편인 핍팔라야나가 아내 밧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일단 집에 머물러 있으시오. 내가 먼저 스승을 찾아보겠소. 만일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면 그대에게 알려주겠소. 내 연락을 받거든 그때 집을 떠나 출가하시오.”

남방에서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건, 북방으로 전해진 『불본행집경』의 이야기를 따르건, 어느 쪽이건 먼저 스승을 만나면 남은 쪽에게 꼭 연락해서 함께 수행하기로 약속한 것은 동일하고, 아내보다 남편 쪽이 먼저 부처님을 만난 것은 분명합니다. 

핍팔라야나는 홀로 숲길로 나아간 지 오래지 않아 부처님을 만납니다. 부처님은 그날 자신이 훌륭한 제자를 만날 것을 미리 아셨다고 하지요. 그는 부처님에게 귀의한 후 가섭(카샤파)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유명한 가섭 존자가 탄생합니다.

|         스승과 나란히 앉다
가섭 존자는 참으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대중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떨어져 지내면서 옷과 음식과 머물 곳에 조금도 욕심을 내지 않으며 철저한 자기절제로 일관된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 부처님께 철저한 수행으로서는 으뜸간다는 찬탄을 받기에 이르렀지요. ‘두타제일 가섭’이라고 합니다. 두타(頭陀, dhūta)란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조금도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 오직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가섭 존자는 수행자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다 갖춘, 부처님도 인정하는 수행자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대중과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구승가는 가섭 존자에 대해 잘 몰랐다는 이야기가 『잡아함경』에 전해집니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의 기원정사에서 법문하실 때 일입니다. 스님들이 집중해서 법문을 듣고 있는데 저 멀리서 웬 낯선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스님인 것 같기는 한데 차림새가 추레한 것이 영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누구야? 대체 어떤 비구인데 저렇게 낡아빠진 가사를 입고 격식도 갖추지 못한 자세로 다가오고 있는 거야?’

대중에게 그 낯선 스님을 낮춰보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을 알아챈 부처님은 그 추레한 수행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왔소. 가섭이여, 여기 자리를 반 비워두었으니 이곳에 앉으시오.”

대중은 크게 술렁거렸지요. 자신들과 똑같은 제자인데 어찌 감히 스승의 자리에 나란히 앉는 것이냐고요. 가섭 존자는 스승의 배려에 크게 감동합니다. 그는 합장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요.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

부처님은 담담하게 대답하십니다.

“그렇소. 나는 그대의 스승이고, 그대는 나의 제자요. 자, 일단 자리에 편히 앉으시오.”

아무리 스승에게서 높은 대접을 받았다 해도 제자의 신분임을 잊지 않는 가섭 존자입니다. 부처님이 당신과 나란히 앉을 자격이 있는 제자로 대할 정도로 수행에 있어 세상 모든 이의 모범이 될 만한 분이 가섭 존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섭 존자도 늘 마음속에 떨쳐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과 똑같이 스승을 만나고 싶어 하는 옛 아내입니다. 아내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이미 스승을 만났고, 스승에게서 이토록 큰 인정과 신뢰까지 얻고 있지만, 이 소중한 법의 자리를 누구보다 갈망하는 옛 아내 밧다는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아직 여성 출가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스승을 만나 귀의한다고 해도 재가여성으로서의 귀의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단순한 귀의가 아닙니다. 법다운 출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섭 존자에게 비구니 승단의 출범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요? 훗날 불전에서 말하듯이 승가의 생명을 단축한 나쁜 소식이었을까요? 스승을 찾아 수행하기를 열망하는 밧다를 위한 좋은 소식이었을까요?(계속)                                                        
          

이미령
불광불교대학 전임교수이며 불교칼럼리스트이다. 동국대 역경위원을 지냈다. 현재 YTN라디오 ‘지식카페 라디오 북클럽’과 BBS 불교방송에서 ‘경전의 숲을 거닐다’를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서적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 수행 입문』, 『붓다 한 말씀』,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