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 유달산에 일본의 관음영장이 조성된 까닭

표면적으로는 일본 진언종이 주도, 실제로는 초종파적 지원아래 조성

2018-04-05     지미령

2년 전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성한 사이고쿠(西國) 관음영장을 조사하기 위해 군산 동국사에 있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군산 동국사는 서울 화계사에 이어 두 번째 조사지로, 이후 경상도 지역의 사이고쿠 관음영장을 조사할 예정이었다. 동국사 주지스님께서 목포 유달산에도 사이고쿠 관음영장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설마’하면서 바로 목포로 내려갔다. 이틀에 걸쳐 유달산을 등반하고 유달산 주변 조사를 하면서 나는 크게 놀랐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때 사이고쿠 관음영장뿐 아니라 시고쿠(四國) 영장까지 조성되었다는 사실과, 둘째는 ‘이렇게 큰 영장이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 있구나. 마치 일본의 고야산高野山 같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때까지 조사했던 영장들은 작은 불상들을 모아놓은 소규모 형태로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파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런데 목포 유달산 영장은, 물론 많이 훼손됐다고는 하지만, 영장의 원형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조성된 영장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자로서 설레었다.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월간 「불광」과 인연이 생겨 ‘일제강점기 때의 순례와 신앙’이라는 주제로 목포 유달산의 일본불교 신앙을 2회에 걸쳐 살펴볼 수 있었다.  

|    유달산에 일본스님이!

한 시간가량 유달산을 올라가다 보면 눈앞 암벽 위에 칠을 한, 반 부조 형태의 조각상이 보인다. 부처님상인가 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 스님이 손에는 염주와 금강저를 쥐고 곡록(曲彔, 스님이 앉는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상 옆에는 홍법弘法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스님 옆쪽 암벽에는 반 부조의 부동명왕이 목포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이 스님은 바로 일본 진언종 창시자 홍법 대사이다. 왜 일본 스님이 여기에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이 스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홍법 대사는 774년 시코쿠의 젠츠지(善通寺)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홍법 대사라는 이름은 다이고 천황에게 시호를 받은 후 사용한 이름이며, 그 이전까지는 구카이(空海)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구카이는 15세 때 고향을 떠나 수행하던 중 31세가 되던 해에 나라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원에서 수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804년 4월, 풍운의 꿈을 안고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쵸(最澄)와 함께 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행(견당사) 배에 올라탔다. 8개월 후, 구카이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해 청룡사靑龍寺의 혜과恵果 화상으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았다. 2년 후인 806년 가을에 귀국했으나 갈 곳이 없어 자신보다 먼저 귀국한 사이쵸가 있는 천태종 엔랴쿠지(延暦寺)에 몸을 의탁했다. 중국에서 8개월 정도 수학하고 돌아온 사이쵸는 자신의 학문이 구카이보다 깊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보다 어린 구카이에게 수계를 받고 경전을 빌려 읽는 등 두 스님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설을 들고 있다. 첫째는 구카이가 사이쵸에게 더 이상 경전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이쵸가 가장 아끼는 제자 다이한(泰範)을 시켜 구카이에게 가서 경전을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다이한이 구카이의 설법에 빠져 구카이의 제자가 된 점을 일반적으로 들고 있다.

실제 사이쵸는 돌아오지 않는 제자를 향해 “다이한아, 돌아오너라. 네가 없으니 내 마음이 불안하다”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직 육근(六根)이 깨끗지 못해 밖에 나가 누군가를 구제할 수 없습니다”라는 절연장이었다. 그런데 이 절연장은 다이한이 아닌 구카이가 대신 써준 것이었다. 나아가 절연장의 내용은 사이쵸가 20세 때 기존의 나라(奈良) 불교를 버리고 천태종을 세울 때 사용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다시 말해 ‘네가 남도육종南都六宗을 버린 것처럼 다이한은 천태종을 버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를 계기로 구카이는 엔랴쿠지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내려가 고야산高野山에 정착한 후 그곳에서 진언종의 총본산인 콘고부지(金剛峯寺, 금강봉사)를 세웠다. 이후 구카이는 교토진출이라는 회심을 품고 진언밀교의 근본도량으로 도지(東寺, 동사)를 창건했다. 교토의 대문을 자처하며 창건된 도지(東寺, 교토역 후문 위치)는 중세 이후 서민신앙의 근거지로 자리를 잡았다.

832년 8월, 구카이는 “우주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한,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한, 나는 영원히 모든 존재를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3년 뒤 입적하였다. 구카이가 홍법 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그의 사후 100년 뒤인 92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의 고승이 왜 한국 땅에 있는 것인가.

 

|    개항과 일본인

1876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수호조약에 의해, 일본인들은 개항장 내에서 통상의 자유와 거주의 자유, 여행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조약체결 이후 부산·인천·원산 등지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증가했으며, 청일전쟁 후 1897년 목포와 진남포가 개방되었다.

다시 1899년 마산·평양·군산·성진이 개방되었고, 1904년 의주가 개방되면서 일본인 거류민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었다. 조선의 개항장에 일본인이 증가하면서 일본인을 위한 학교, 병원, 도로 건설, 상하수도 정비 등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목포의 경우, 일본인은 개항한 1897년 10월 이후부터 각국 거류지 안에서 거주했다. 일본은 목포에 특별거류지를 설치하려고 했지만,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일본이 목포에 특별거류지를 설치하려고 했던 이유는 군대를 한국에 파견할 때 필요한 물자를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열강에 의해 특별거류지가 무산되자 일본은 각국 거류지회와는 별도로 일본인 거류민들을 자신들의 행정권 안에 넣어 관리하고자 했다.

실제 목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1898년 2월 세화괘世話掛 제도를 설치하여 공공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화괘 제도는 이후 일본거류민회로 개조되었다가 다시 일본인 상업회의소로 바뀌었다. 목포에 유입된 일본인들은 이 세화괘를 통해 공공사업을 진행하고, 또 이를 통해 이권을 분할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목포는 조선총독부 관리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목포의 일본인 인구가 개항 당시 206명에서 1910년에는 3,494명, 1929년 7,963명, 1943년 8,279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일본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조계지가 형성되었으며, 일본 불교 역시 이때 함께 진출했다. 

 

|    일본불교의 진출

목포를 비롯한 전라 지역은 기독교 신앙이 강하다고 보는 경향이 큰데,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의외로 일본불교의 진출이 두드러진 곳 중 하나였다. 1897년 10월 목포가 개항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종파가 오카쿠라 엔신이 이끄는 정토진종 동본원사파였다. 다음으로 진언종이 들어왔으며, 이어서 정토종,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일련종, 조동종, 임제종 등 일본 6대 종파가 1920년대까지 모두 안착했다. 이들 종파들은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워졌는데 현재 목포역 앞의 구도심 오거리(昭和通)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중 유달산의 홍법 대사와 관련 있는 곳이 진언종으로 1901년 와카마츠(若松) 영사의 인가를 얻어 복산정(복만동) 3번지에 고야산 콘고지(金剛寺)의 출장소로서 포교를 개시했다. 초기에는 신도가 30가구에 불과했지만, 인구의 증가와 함께 신도수도 증가해 1915년에는 총독부로부터 정식 사원 창립을 허가 받았다.

나아가 교단을 확장해 광주, 나주 등 주요 거점지에 출장소를 설치해 정기적으로 포교행사를 열었다. 개항 초기에는 진언종과 정토진종이 함께 목포 내에서 큰 세력을 행사하며 행사나 이권을 분할했다. 하지만, 후발주자로 들어온 종파들과의 다툼 등으로 인해 목포불교각종협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어 주요 행사와 이권분할이 공동사업으로 진행되었다.  

 

|    시고쿠88영장 순례와 근대 영장

시코쿠(四國)라는 말은 일본 전국시대에 섬이 4개의 지역으로 나뉜 것에서 유래하는데, 현재의 명칭으로는 발심을 하는 도쿠시마, 수행을 하는 코치, 보리의 에히메, 열반의 카가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88이란 숫자는 남자가 42세 되는 해와, 여자가 33세 되는 해, 아이들이 13세 되는 해는 액운이 끼기 때문에 이 나이들을 합친 88은 액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88이라는 숫자가 정해졌다고 보기도 한다.

또 영장靈場이란 신불神佛이 영험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영장순례란 영험한 곳을 번호를 매겨서 순서대로 순례하는 것으로 산악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 영장순례의 시발점은 8세기 사이고쿠33관음영장(西國33觀音靈場) 순례를 시효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이고쿠33관음영장 순례는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에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33개의 모습으로 화현한 것에서 유래한다. 관음의 공덕을 얻기 위해서 33개의 관음영장을 순례하면 현세에서 범한 모든 죄업이 소멸되고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사이고쿠관음영장 순례가 큰 인기를 끌면서 에도시대 이후로는 일본 전역에 유사한 형태의 영장순례가 만들어졌다. 이 중 하나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시고쿠88영장(四國88靈場)이다.

시고쿠영장 신앙은 구카이(홍법 대사)가 42세 때(815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구카이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 신제이(眞濟)가 스승의 유적을 순례한 것으로부터 전승되었다. 시고쿠88영장순례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변두리 출신의 홍법 대사가 수행을 거듭해 영원한 선정에 들었다는 입정신앙入定信仰이 많은 일본인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당대의 유명한 고승들이 시고쿠영장 순례에 동참하면서 더욱 인기를 끌게 되었다. 

 

|    유달산의 88영장을 누가 조성했나?

그렇다면 9세기경 일본에서 성립된 시고쿠영장이 그대로 목포 유달산에 재현된 것일까. 답부터 미리 말하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목포 유달산의 영장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 전제조건이 있다. 유달산 시고쿠영장이나 일본불교의 각 종파들은 기본적으로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종교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들을 위해 고향과 똑같은 환경과 신앙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근세 이전의 영장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근세 이후의 영장은 놀이와 행락을 겸한 영장순례가 주요 목적이다. 영장 근처에는 공원과 유원지, 행락지가 있어야 하며, 힘들게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생활권 내에 미니 복제영장(写し靈場, 한 곳에 88개의 영장을 만드는 것)의 형태로 존재한다.

근세 이후 영장의 유락화가 진행된 데에는 교통의 발달로 새로운 순례길이 개발된 것이 주요했다. 근대에는 철도가 생기면서 근교로 소풍을 가서 겸사겸사 미니 복제영장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하고 다시 돌아오는 1일 코스의 영장순례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1일 코스 영장순례는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일본 도쿄 근교에 위치한 다카하타야마(高幡山)의 콘고지(金剛寺)는 철도가 개통된 이후 소풍과 시고쿠영장 순례를 함께 할 수 있다고 홍보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목포 유달산 역시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에 걸쳐 유달산공원 조성사업과 더불어 시고쿠영장이 조성되었다. 당시 1914년 1월 개통된 호남선에 의해 목포역을 이용하는 유동인구는 당해 4만 5천여 명에서 1928년 20만 명, 1940년에 48만 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다시 말해, 철도개통으로 외지의 방문객들이 유락과 신앙을 함께 할 수 있는 핫 플레이스를 목포가 제공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방문객들을 수용할 숙박업사업이 목포역 주변(일본인 거주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목포 유달산에 시고쿠영장을 조성했던 것일까. 그것은 목포 유달산이 근대 영장순례지로 갖추어야 할 유락지, 경관, 높거나 험하지 않는 언덕과 같은 산, 교통의 편리함, 시내 위치, 신앙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달산의 88영장(1931년 조성)을 누가 조성했냐라는 문제이다. 시고쿠88영장은 사이고쿠 관음영장과 달리 진언종의 성격이 강한 만큼, 목포에서 진언종 이외의 종파가 참여했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유달산 전체를 영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총독부를 비롯해 호남 일대의 단가檀家들의 지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 역시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이권을 행사하기 위해 불교행사나 사회사업 등은 공동참여를 원칙으로 했다.

또 재조일본인들 역시 이권사업에 지연, 종교로 서로 얽혀있는 만큼, 진언종의 단가가 진언종 이외의 다른 종파에도 기부를 하거나 이권을 위해 종교를 바꾸기도 했다. 이들은 경제적 이권을 목적으로 수면 아래의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비단 목포뿐 아니라 다른 개항지에서도 확인되는 사항이다. 다시 말해, 표면상으로는 진언종이 88영장을 조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달산 시고쿠영장 순례와 엮인 여러 이권사업에 여러 종파들과 재조일본인들이 의기투합한 공동사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미령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문화 및 미술사로 박사학위 취득(2010), 한국예술종합대학, 인천대학교에 출강하고 있고, 현재 불광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군산 지역 西國33所觀音靈場성립에 관한 일고찰」,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 등 아시아의 영장순례와 신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