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용연사 극락전 불구니건도

참 신통神通한 당신

2018-04-05     강호진
사진:최배문

“공수부대 애들은 삼천 배 같은 건 선 자리에서 다 해버린다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 몇 사람이 삼천 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매부리코에 눈매가 찢어진 사내가 끼어든다. 그러자 머리가 반백半白인 중년이 나선다.
“성철 스님은 한 자리에서 만 배도 하실 거요.”
서울에서 온 얼굴이 새까만 사내가 재빨리 말을 받는다.   
“그것보다 스님은 가야산 봉우리를 뛰어넘는 축지법 같은 게 있지 않겠어요? 깨달은 도인道人이시니까요.”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좁아터진 방안에서 원치 않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은 공감하는 눈치다. 대화는 종국에 실전싸움에 가장 유용한 기술이 복싱인가, 유도인가 따위의 객쩍은 이야기로 흐지부지되었지만, 우리는 이들을 너무 비웃지 않는 편이 좋겠다. 과거에 한 말을 녹음해서 다시 들려줄 때,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낄 이가 한둘이 아니기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이 대화는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최초로 ‘아비라 기도’를 하러 갔을 당시에 어른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십 수 명이 3박 4일 동안 한 방에서 기도하고 서로의 발을 얼굴 맡에 두고 포개어 자야 했던 불편함보다는 이 우주의 먼지 같은 대화가 선명하게 남은 걸 보면 허망한 세상에서 이야기보다 오래가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사진:최배문

여기에도 한 이야기가 있다. 불교가 지닌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만나러 영하 17도의 혹한에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비슬산 용연사에 도착했을 땐 정오를 훌쩍 지나있었지만 추위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극락전에 들어서니 빙판 위에 맨발로 선 느낌이다. 발가락이 아리는 것을 넘어 감각이 사라져 가는데 찾는 벽화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극락전 내부에는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70여 점의 벽화가 사방에 장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벽화의 다양함과 그 수에 있어서 독보적인 통도사를 논외로 하면, 용연사는 벽화로 유명한 제천 신륵사나 양산 신흥사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사찰이다. 나는 극락전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야 중앙에서 오른편으로 빗겨 난 벽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만난다. 

붓다는 화염 속에서 선정인禪定印을 한 채 평온한 미소로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얼기설기 엮은 나뭇잎 옷만 걸친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벽화의 모본이 되는 『석씨원류응화사적』에서는 사내가 바닥이 아닌 높이 쌓은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나는 당장이라도 저 불 가까이로 가서 언 몸을 녹이고 싶다. 그러나 나보다 더 급해 보이는 건 헐벗은 사내다. 사내는 실제로 붓다를 감싼 저 불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벽화는 『잡보장경』에서 99번째 등장하는 이야기인 ‘니건자가 큰 불더미 속에 몸을 던졌다가 붓다에게 제도된 인연(尼乾子投火聚爲佛所度緣)’을 그린 것인데, 화제를 ‘불구니건佛救尼乾’이라고만 했으니, 일반인들은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짐작조차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잡보장경』에 기록된 붓다와 사내의 사연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사위국에 머물면서 육사외도(六師外道, 붓다 당시 브라만교 전통에서 벗어난 여섯 학파)의 권속들을 교화하자, 육사외도 가운데 하나인 자이나교도 500명은 실의에 빠져 장작불 속에 몸을 던져 다음 생을 도모하려 했다. 이 사정을 안 붓다는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어 그들이 몸을 태우려고 모아둔 장작더미 가로 가서는 자신의 몸에서 불길을 일으키는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다. 이때 붓다의 큰 불을 본 자이나교도들은 기쁜 마음에 외쳤다. 

“우리가 굳이 불을 지를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모두 저 큰불 속으로 뛰어들자.”

그들이 붓다가 만든 불 속에 몸을 던지자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고 상쾌해졌는데, 그 불 속에 붓다가 있음을 알고 환희로운 마음이 생겨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붓다가 “잘 왔구나. 비구여”라고 말하자 그들은 머리와 수염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사문沙門의 옷이 입혀졌다. 붓다가 법을 설하자 그들은 그 자리에서 깨달아 모두 아라한과를 얻게 되었다. 

『잡보장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불전의 일화들이 대개 그렇듯 붓다가 과거 세상에서도 그들과 인연을 있었음을 말하는 전생담이 덧붙여져 있다. 불교의 전생담을 상투적이고 지루한 사족쯤으로 여길 이도 많겠지만, 여기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일회적인 사건이나 우연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경박함에 대한 경책이 담겨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당신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이 관계는 도저한 역사성(연기의 법칙)에 그 바탕에 두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이어지는 이야기는 붓다는 전생에 비사거比舍佉란 이름을 지닌 상인들의 우두머리였고, 현재 자이나교도들은 그를 따르는 상인이었는데, 상인들이 비사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보물을 건져 욕심대로 배에 가득 싣는 바람에 배가 모두 침몰했고, 비사거는 자신이 건진 보물을 모두 바다에 버린 후 빈 배에 상인들을 태워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후 비사거는 출가수행해서 오신통五神通을 얻었고, 이를 보고 감명을 받은 상인들도 따라서 출가해 오신통을 얻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현생과 전생을 오가며 불과 물에서 그들을 구했다는 이야기의 짜임은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 비하면 밋밋한 것이 사실이지만, 신경을 계속 곤두세우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마는 현란한 이야기에 지쳐가는 나로선 느긋하게 흘려듣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도 되는 편안함이 좋다. 

 

그런데 이야기 가운데 나를 묘하게 자극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신통神通’이다. 붓다가 큰 불을 만든 것도 신통이고, 전생에 그들이 수행하여 얻었다는 것도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漏盡通,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능력)을 제외한 다섯 가지 신통이다. 불전을 읽다보면 도처에 신통에 관련한 일화들이 튀어나온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듯 붓다도 니련선하(네란자라) 강물을 가른 뒤 그 사이로 걸었고, 예수가 귀신들린 자를 치유했듯 붓다도 사람을 해치는 독룡을 작게 만들어 발우에 담아버렸다. 

신통이란 인간의 능력이나 자연현상을 벗어난 ‘초능력(supernatural powers)’을 말하는데, 과학과 상식을 삶의 준거로 삼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통이란 말은 뜨악한 무엇일 것이다. 특히 ‘밥 먹고 똥 누는 것이 도道’라는 평상심을 강조하고, 육체적인 노동을 수행과 동일시했던 선불교의 영향권 아래에서 불교적 이해를 쌓아온 이라면 신이神異나 기적이라 말 자체에 거부반응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통이란 사람을 현혹하는 사술詐術이거나 기껏해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북돋우고 전법과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지어낸 신화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삼국유사』나 『법화영험전』 같은 가피와 이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그런 것이 모두 거짓이라 여겼던 청소년 시절에 비해 유연하고 겸손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일천한 경험과 지식만으로 세상사에 대해 ‘맞다’, 혹은 ‘아니다’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불교를 공부하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태도이다.  
  

사진:최배문


나는 성철 스님이 가야산 봉우리를 건너다니는 신통력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 입적 1주기 추모재 전날 저녁, 성철 스님이 거처했던 백련암 염화실 지붕 바로 위에서 시끄러운 폭죽 소리가 나면서 선명한 붉은 색을 띤 둥그런 방광放光이 십여 분간 펼쳐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자리에 내 어머니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말했다. “내가 직접 안 봤으면 순 거짓말이라고 했을 거다.” 

나는 벽화 속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가릴 능력이 없다. 그러나 추위 속에서 두 시간가량 머물렀던 극락전에서 나왔을 때 떠오른 건 오래전 이야기였다.

20여 년 전 나는 깊은 산중에 박힌 절에서 기도를 하던 중 사연을 지닌 중년 사내를 만났다. 지방 시청공무원인 그는 사찰이란 곳에 생전 처음 와 본 사람으로 절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몰라서 내가 가르쳐야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휴가까지 내어 며칠간 기도를 하는 덴 이유가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의 꿈에 나타나 ‘너는 내가 절에 백일기도를 올린 후 어렵게 얻은 자식이니, 부디 절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사찰 이름과 사찰이 있는 지역까지 알려줬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한 말을 내가 믿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신통과 이적, 그에 대한 사실 여부를 가늠하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은 그것을 담은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년의 얼굴은 흐릿해졌어도 이야기만은 생생하게 남아 당신에게 전했듯 말이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다시 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남는 것은 결국 이야기,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란 것은 이제 알 것 같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