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세계를 갈구하는 기다림의 땅

바라밀국토를 찾아서, 사천시

2007-09-15     관리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남해바다 언저리 사천을 찾았다. 서울서 가자면 떡 가로막고 서 있는 지리산 때문에 좌로든 우로든 에돌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주·하동·남해 등과 더불어 사천은 제주도보다도 멀게만 느껴진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내렸다. 그리곤 새벽 갯바람을 맞으며 삼천포로 향했다. 애초부터 잘빠진(?) 삼천포행이었다. 아슴아슴 동이 터 오는 항구에서는 부지런한 어부들과 행상객, 중개인들이 열띤 흥정을 하고 있었다. 삶의 현장! 비릿한 생선 내음이 비위 약한 목울대를 자극하는데도 싱그럽게만 느껴지는 아침이다.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진수해서 승리를 맛보았다는 사천 앞 바다에는 다행히도 얼마 전 태풍으로 인한 기름띠 피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막 잡혀온 싱싱한 생선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플라스틱 함지 안에서 펼쳐놓은 부채만큼 크게 모로 누워 있는 돔이며, 험상궂은 문어, 집게다리를 쳐들고 있는 꽃게 따위들이 바다 밑의 신선함을 몸에 묻혀 올라와 있다.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 작은 통통배 하나만큼의 이런 신선함을 건져오길 기원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배 하나를 채우지 못해 나머지를 바닷물로 대신 채우고 허탈하게 돌아오고 만다. 그래도 항구로 돌아오기만 하면 흥겨워지는지 이렇듯 흥청이는 삼천포다.
바다에 접한 곳일수록 불심이 깊다는 말이 참말인 듯하다. 바다 인근의 산 속을 헤매면 어디서든지 절이 아니면 조그만 암자, 아니면 빈 절터의 기와조각이라도 남아 있는 곳을 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곳에 산ㄴ 사람들이 항상 바다의 격랑 속을 헤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일 게다. 아니면 수많은 물고기를 잡아야 생활이 영위되는 역설적인 상황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만강(萬江) 만물(萬物)이 하나로 모여 이룬 그 짜디짠 깨달음의 일미(一味), 바다가 바로 곁에 있어 그곳이 일찍부터 바라밀 인연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까?
삼천포에서 진주쪽으로 다시 거슬러 오르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잘생긴 산이 구룡산이다. 화전리에서 구룡지(九龍池)로 오르다 남쪽 산등성이 가파른 길을 허위 허위 다시 오르면 원효대사께서 창건한 구룡사가 있다. 이 인근은 불교전성기에 골짜기마다 절이 가득했다고 할 정도의 인연터다. 그래서 아직도 남은 지명 가운데 '부도골'이 있고 산중 스님들의 곡식을 도정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터가 '호박돌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사전조사 때 이곳 구룡사에는 오래된 목상현판과 부도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서 보니 목상현판은 없고 부도도 한 기만이 외롭다. 그나마 원래의 자리를 모르는 채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어린이포교로 유명한 철오 스님께서 근래에 은사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로 와 계셨다. 철오 스님의 애기로는 폐사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대처스님이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는데 은사스님께서 새로 불사를 해서 지금의 사우들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부터 목상현판은 없었고 부도도 논두렁에 파묻혀 있던 것을 파다가 절 입구에 모시게 되었다고 하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말은 이럴 때 어울리는 듯싶다.
있었던 절은 없어졌어도 남아 있는 불적이 있다. 나무나 돌에 새긴 신심이 다하고 나서도 향그럽게 풍기는 신심이 있다. 그것은 나무나 돌에 새긴 신심이 다할 때라야만이 은은히 풍기게 될 그런 샹기일런지도 모른다. 현세가 끝나고 올 용화세계가 지족(知足)의 향기….
곤양면 홍사리에는 사쳔매향비(보물 614호)가 있다. 매향(埋香)이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집중적으로 행해졌던 신행형태의 하나로서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 그 설법을 듣고자 하는 원을 세워 땅에 침향목을 묻는 것이다. 그 나무는 바닷물 속에 오랜 기간 담가 두었던 것이기에 나중에 파내어 향을 피우면 그윽한 천상의 향을 낸다고 한다. 후세에 올 용화세계에 태어나 미륵부처님 세 번의 설법을 꼭! 듣고자 하는 발원이 이 매향이라는 의식속에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그 회상에서 이 향을 피워 최고의 예경을 드리려는 장기적이고 원대한 발원! 발원도 이 정도면 원적(圓寂)의 한 조각쯤은 되지 않을까?
홍사리 매향비까지는 하루에 왕복 한차례 지나는 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라고 했다. 실제 걸어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버스는 고사하고 자가용 차도 거의 보기 힘들었다. 가끔 도로공사용 덤프트럭만이 땡볕 아래를 용감히 질주할 뿐…. 그늘 한 점 업는 시골길이지만 새파란 볏닢들을 바라보며 강행군하다 보니 머잖아 보호각 안의 자연석 매향비가 반긴다.
겉에 쓰여진 글자는 거의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었다. 친근한 자연석 그대로 거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 매향비만 보고는 어디쯤이 매향을 한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산발치, 그대로 흘러가면 바다와 만날 것 같은 냇물 겉에 매향비는 서있고 그 아래 어디쯤엔가 600년이 넘은 향목이 있을 터였다.
예전에 떠놓은 탁본에는, 고러 말(우왕 4년) 달공 화상(나옹 화상의 법상좌이며 무학대사와 나란히 존숭을 받았다고 하는 큰스님이다)이 4,100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국태민안을 바라며 매향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른 몇몇 군데에도 이보다 시대가 앞서거나 뒤진 매향비가 발견되지만 여기서처럼 장문의 기록이 새겨진 곳은 없다.
이렇듯 땅에 묻는 것을 매향이라 하고 물 속에 담가두는 것을 침향(沈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매향이나 침향은 바다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곳이라야만 행해져 왔다. 사천 홍사리도 그런 곳의 하나이다. 한편 침향(沈香)으로 유명한 선운사 앞 곰소만에서는 가끔 침향을 건져내 실용화하기도 해서 '선운사 침향'하면 일본에서까지 알아주는 명물이다.
사천에서 하동으로 가다보면 곤양다솔사가 나온다. 다솔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효당 최범술 선생이다. 일제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해방후에는 이곳 사천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스님이자 사상가였던 효당은 근대 영남 다도(茶道)의 효시로 추앙받고 있다. 그래서 다솔사 적멸보궁 뒷편에 효당이 직접 심어 가꾼 차밭에서 생산되는 녹차는 '반야로(般若露)'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이름나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포장이 안 되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찻길에서 절 입구까지 말끔히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음식점 겸 기념품 가게가 지어지고 있었고 거기서부터 울울한 솔밭길이다. 솔밭길 중간쯤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어제금표(御制禁表)가 있다. 광무연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절에서는 인근 10리 땅이 절의 땅임을 알리는 표시라고 했지만, 그보다는 어느 시기엔가 임금의 명에 의해 절 입구를 봉(封)했던 표시일 것 같다.
절에 오르면 먼저 고풍스레 보이는 널다란 대양루(도유형문화재 83효)가 먼저 반긴다. 조선 영조 25년(1749년) 건립된 그대로 여지껏 보존되고 있는 대규모 건축이다. 대양루 뒷편으로 적멸보궁이 있는데 1978년에 탱화 속에서 108 과의 진신사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적멸보궁이 되었다. 또 그래서 본존불을 열반상으로 모셨다고 한다. 적멸보궁 뒷편으로 돌아가면 통도사 금강계단과 흡사한 사리탑이 있다. 이 속에 108 과의 사리를 모셨다.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 때 선생은 김법린, 최범술 선생 등 만당(卍黨)의 제자들과 더불어 여기에 숨어지내며 항일활동과 함께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만해 선생께서 중수한 건물이 응진전으로 이 건물은 도문화재자료 제14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또한 다솔사는 얼마전에 타계한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묵으며 소설「등신불」을 쓴 곳으로 유명하다.
다솔사 뒤 산길로 약 3킬로미터쯤 오르면 보안암이란 암자가 나온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미륵암으로 불려지는데 그것은 이 암자에 있는 석굴 입구에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나라에는 중국이나 인도에서처럼 석굴의 형태로 부처님을 모신 경우는 아주 드물다. 수많은 마애불 가운데 앞에 전실을 만든 경우는 종종 있으나 석굴을 조성한 예는 이곳과 경주 석굴암, 군위의 삼존석굴이 애써 찾아볼 수 있는 전부이다.
보안암 석굴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약 40분 정도면 찾으리라 예상했었는데 잘못된 표지판 때문에 두 시간은 족히 걸려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했다. 비오듯 땀을 흘려서 갈증과 허기가 엄습해왔는데 사제(師第) 간인 듯한 두 분의 비구니 스님께서 소담스레 내놓는 과일로 목을 축이니 살 것 같았다.
주지스님께서는 이제 곧 기도를 들어가니 쉬었다 가되 석굴 안은 절대 사진을 찍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비구니 스님 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 대비하시려는 것 같았다. 석굴암은 삼국시대의 석실고분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안에는 정방형이고 전면에는 전실이라 할 수 있는 통로가 나있다. 그 안에 높이가 약 1.2 미터에 이르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상호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주위로 높이가 3∼40 선티미터쯤 돼 보이는 나한상이 양쪽으로 늘어 서있는데 그 표정들도 하나하나 재미있다.
사천에 가면 다솔사를 보고 다솔사에 가면 꼭 보안암 석굴에 가서 예불을 드릴 것을 권한다. 천 년 동안(전문가들은 이 석굴이 여말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지만 일부에서는 신라 즈증왕 때 연기 조사께서 창건한 영남 최초의 사찰이 다솔사요 이 석굴도 다솔사 만큼의 연혁을 가졌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석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미소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비롭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도 잊었다.
급히 내려오려는데 위태롭데 높이 쌓아 올린 이곳의 석축도 정말 볼 만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스님의 말씀을 쫓아 사진에 석굴 안 부처님을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날이 저물어서 이 석축 또한 담지 못한 것이 더 아쉬웠다.

사천에서 만난 사람/구룡사 주지 철오 스님
진퇴양난(進退兩難)
"뭐하러 왔노?… 신문, 잡지에 나는 절은 따로 있는 법이지… 여기는 공부하는 절이다."
철오 스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어린이 포교의 실천자이다. 함양 법인사에서 스님께서 하셨던 전설적인 포교담은 교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타 종교계에도 소문이 무성할 정도이다. 그런 스님이 사천의 외진 절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뒷바라질을 해주며 사신다기에 찾았더니 대번에 하시는 말씀이다.
구룡사는 정말 한적하고 외진 곳에 있었다. 하늘과 산 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득하게 멀리 사천읍내가 가물거릴 뿐이었다. 철오 스님은 그곳에서, 스님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여기듯이 '가난하고 빡빡하게' 살고 계셨다.
이런 스님이 요즘은 고민 한 가지가 생겼다. 가까운 진주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 마련한 포교당이 타종교 사람들의 민원의 대상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 비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원래 단지 내 유치원 시설이 들어오기로 한 곳이었는데 단지가 조성되고도 오랫동안 아무 데도 들어오지 않아 건물주가 용도를 변경시켜준다는 조건하에 스님께서 포교당을 차렸다고 한다. 지난 7월 8일 개원식을 하고 2주만에 1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일 정도로 호응이 컸지만 그렇게 큰 호응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던 것이었다.
스님은 지금 그대로 물러 나와 다른 곳을 찾아야 할지, 아니면 건물 자체를 인수해서 그곳에 유치원이나 어린이 놀이방 시설을 갖춘 복지법인을 만들어 대응할지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복안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대로 물러나기에는 시작한 지 한 달만에 문을 닫아야 하는 모습이 좋지 않고 복지법인을 설립하기에는 도반 스님들께 도움을 요청하든지 대규모 시주를 받아야 일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연락처 0593-854-4575 구룡사)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