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무아론에 대한 학생반응

무아론에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까닭

2018-03-02     홍창성

● 미국학생들도 ‘붓다 Buddha ’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기 때문에 ‘불교(Buddhism)’라는 단어가 ‘부처님 가르침의 체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눈 밝은 학생 들은 곧 날카로운 질문을 하곤 한다.

“붓다라면 오래전 인도에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를 지칭할 텐데,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누구나 고타마 싯다르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제가(알렉스 존슨이) 깨닫는다고 해서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일인 同一人이 될 수 있습니까? 이치에 어긋나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남전불교와 북전불교를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는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인데, 학생들은 이것이 문제라며 수업시작 첫 주부터 따지고 든다. 학생들의 좋은 질문은 교수들을 신나게 만들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무예의 고수들은 제자를 훌륭하게 가르쳐 그와 마지막 합을 겨루다가 자기보다도 더 고수가 된 제자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는 만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내게 그런 칼을 겨누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사진:홍창성


● 위의 질문을 영어로 답하기는 쉽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원래 ‘이순신’이나 ‘유관순’ 같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의자’나 ‘학교’ 같은 보통 명사다. 우리가 아는 이순신은 역사상 단 한 명만 존재했지만, ‘의자’라는 단어는 수많은 의자들을 지칭한다. ‘붓다’라는 말도 원래 깨달은 자라는 뜻이었고, 따라서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2,500년 전 네팔과 인도에서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영어로는 정관사를 붙여서 ‘The Buddha’로 표현하는데, 이는 역사상 존재했던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붓다라는 뜻이다. 우리 각자는 나중에 제대로 깨달으면 ‘a Buddha’가 된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무수히 많은 붓다가 존재할 수 있다. 무슨 굉장하고 근사한 이론을 가져다 붙일 필요 없이 이처럼 간단한 문법적 설명으로 학생들의 좋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내게 예리한 칼을 겨누라고 격려하면 미국학 생들은 또 눈치 없이 진짜로 칼을 겨누기도 한다. 미국학생들답게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고 그렇게 한다. 위의 내 설명을 들으면 거의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뒤따른다.

“이제 '붓다 (The Buddha)'가 깨달은 자(The Enlightened One)라는 뜻이었음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깨 달았다 (get enlightened)’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벼락에 맞으면(get hit by a lightning) 깨달을 수 있습니까(get enlightened)?”


● 학생들은 내가 농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스스로도 농담을 섞어 질문하기 시작한다. 강의할 때 청중이 너무 공손하기만 하면 흥이 덜 나기 마련인데, 내 미국학생들은 내게 활도 쏘고 칼도 휘두르며 농담도 많이 해서 재밌다.

내가 미국에서 즐긴 여러 만화(cartoons) 가운데 깨달음을 머릿속에 전등불이 켜지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 많다. 숲속에서 고행하며 참선하던 수행자를 옆에서 까불며 놀리던 많은 원숭이들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벼락에 맞아 머리가 빙빙 돌다가 급기야는 완전히 깨달았다는 것도 있다. 그래서 이 까불던 원숭이가 다른 모든 원숭이들의 공양을 받는 굉장한 성자聖者가 된 것을 보며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는 좌절한 수행자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깨달음’은 영어로 보통 ‘Enlightenment’로 번역되는데, 영어 ‘벼락(lightening)’과 우연히 어원이 같아서 생긴 만화들이 었다. 물론 불교에는 원래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과 같이 등불(light)과 비유되는 표현들이 무수히 많다.

나는 학생들에게 ‘깨달았다’라는 말이 원래 인도말로는 ‘알다(know)’, ‘이해하다(understand)’ 또는 ‘알아채다(realize)’를 의미하던 동사를 어원으로 갖는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래서 깨닫기 위해 비오는 날 허허벌판에 나가 피뢰침을 들고 벼락을 맞으려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켜 준다. 그리고는 알고 이해하고 문득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그러면 곧 여지 없이 학생들의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고 이해하고 알아차린다는 겁니까? 깨달음에는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 천여 년 이상 선禪 의 전통을 견지해 온 한국불교계에서 깨달음이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주장하면 강한 반대에 직면하곤 하지만,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의 체계이고 붓다가 깨달은 자라면, 그 ‘깨닫다’라는 타동사의 목적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적 요구사항을 미국학생들은 너무도 당연히 여긴다. ‘나는 안다. 그래, 그런데 무엇을 안다는 거야?’. ‘나는 깨달았다. 축하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어?’. 토론은커녕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많이 삼가야 하는 선문禪門에서는 이런 질문을 하면 임제의 할(喝, 고함소리)과 덕산의 방(棒, 몽둥이)에 혼쭐나게 되겠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미국대학에서는 이런 질문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나는 학생들을 고함과 몽둥이가 아니라 말로 가르쳐야 하는 교수이니 그들의 질문에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답변할 의무가 있다.

깨달음의 대상은 물론 진리(truth)이다. 진리를 알고 이해해야 깨달을 수 있다. 이점에는 이의가 있기 어렵다. 그런데 아무 진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세계를 가장 철저히 뚫어보는 진리 중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어야 할 것이다. 사소한 과학정보 또는 역사지식 몇 편의 습득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그토록 철저한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우리 삶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참된 나 또는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 ana - tman, non-self)를 가르치셨고, 존재세계를 관통하는 진리로는 연기(緣起, prat l - tyasamutpa - da, dependent arising)를 설하 셨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존재세계의 일부로서 연기로 생멸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무아론無我論까지 포함 하게 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꿰뚫는 진리가 되겠다.

사진:홍창성

● 강의가 불교의 무아론에 이르면 많은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세상에, 평화를 사랑하고 자비심 넘치는 착한 사람들이라는 불교도들이 자아(自我, self) 또는 영혼(soul)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자동적으로 부도덕(immoral)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의 피해자가 되곤 한다. 영혼을 안 믿으니 ‘잃을 것이 없다(nothing to lose)’는 식으로 막행막식하며 함부로 인생을 사는 형편없는 사람들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곧 “불교도들이 영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탄에게 영혼을 비싼 값에 팔아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도들은 처음부터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해 준다.

위와 같은 나의 해명에 학생들 가운데 반 정도는 긴장을 풀고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여 주지만, 교회 열심히 다녀서 신앙심이 더 깊은 나머지 반은 의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요구한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자네들 각각을 자네들이게끔 해 주는 무엇일 것이다. 나를 이 우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unique) 존재자로 만들어 주는 어떤 굉장한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갓난 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난 다음에라도 변치 않으며 파괴될 수 없고 또 그래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자네를 자네이게끔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그런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시켜 줄 수 있겠는가? 가장 먼저 자네들의 교수인 나부터 설득시켜 보라. 그러면 이번 학기 성적은 무조건 A+를 주겠다.”


● 최고의 학점을 상금으로 내걸면 학생들은 한껏 웃으며 신나게 이런저런 답변들을 시도한다.

“우리는 최소한 평생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곤 한다.”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적 종교적 신념이 변하고 애인들도 변심할 수 있다.”

“생긴 모습은?”

“굳이 성형수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며 외모가 변한다. 주로 덜 아름다워지는 쪽으로.”

“그러면 DNA는?”

“DNA도 시간이 변하면서 그 일부가 변한다. 화학물질 또는 방사선에 노출되면 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DNA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입자들로 교체된다. 사람 몸의 모든 세포들은 각각의 세포 주기에 따라 죽고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된다. 가지고 있는 어휘의 수도 변하고 정서도 변하며 의지, 감각 능력 등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인지적 기능이 변한다. 평생 전혀 변치 않고 파괴되지 않아서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나를 나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영혼이나 참나는 없다. 눈감고 믿는 신앙으로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모를까, 합리적으로 이치를 따져 가면서는 결코 무아론을 물리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 동안 아무 학생도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내 불교철학 강의를 듣는 미국학생들은 매 학기 첫 주부터 참나 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으며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면 나는 “자네들은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에 들어와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워 생각할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한 학기 동안 불교를 통해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한번 마음껏 경험해 보기 바란다”고 말하며 수업을 끝낸다. 그러면 그들은 기대에 부푼 얼굴들로 밝게 인사하며 강의실을 나간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