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托鉢)하는 스님들

물처럼 구름처럼

2007-09-15     관리자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교토(京都) 시내 중심가이다. 중심가라고 해야 그렇게 도시스럽지도 않고 그저 시골 작은 도시만한 이곳은 고도(古都)답게 나즈막하고 조용하며 사방을 둘러봐도 절집뿐이라서 내가 살기에는 참 안성맞춤이다.
연전 일본에서의 공부, 소위 유학을 생각하면서 도쿄(東京)를 답사했을 때 그곳은 첫눈에 내가 살기 어려운 곳으로 생각하였다. 본시 시골 태생에다 유난히 길뉸까지 어두운 나는 동경이 무서운 도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거기서 용하게 공부하고 있는 도반 스님과 여행만 며칠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교토 예찬을 하려거나 잠시 머물고 있는 나의 작은 처소('대한불교 조계종 보각사'라는 현판이 있음)에 대한, 또 나의 자취 생활의 일상적(日常的) 감상들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나의 단잠과 함께 영혼까지 깨웠던 그 한 외침소리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
그날은 한 학기에 꼭 한번씩 돌아오는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생각만큼 다 표현이 되지 않는 아쉬움과 그래도 또 미흡한 것 같은 자료정리 등을 준비하다 보면 새벽 두세 시가 되기는 예사였다. 이쯤이면 겨우 뭔가 뒬 듯 하다싶을 정도의 분비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부쳤는가 했더니,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떤 열림의 소리가 있었다.
딱히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으나 분명 '호-오-!!'하는 기막힌 절규 같기도 한 그 소리에 일단 잠시의 잠에서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 벌써 시간은 아침 7시가 지나고 있었고 그 외침 소리는 계속 되었다. 빨리 현관문을 열어보니 짧고 까만 일본 스님들의 그 장삼차림에 특유의 모자를 쓴 스님 셋이 꽤 거리를 유지하면서 씩씩하게 걸으며 예의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것이다. 셋 중 맨 뒤의 스님은 작은 발우를 하나 들었고 앞의 두 스님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곧 탁발하는 스님들임을 알 수 있었다. 뒤에 자세히 안 일이지만 절집, 특히 대중생활은 어디서나 비슷하게 새벽 3시에 개정(開靜), 기상(起床) 하고 예불(禮佛), 참선(參禪), 입욕(入浴) 후 아침의 죽공양, 도량청소 후 탁발은 경전 강좌와 1일씩 번갈아 가며 7시부터 하게 된다.
교토에는 단체 수행도량이 일곱 군데가 있기 때문에 다른 도량과 겹치지 않도록 탁발날을 조정한다고 하니 결국 교토 시내는 거의 매일 아침 이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이다.
탁발할 때는 맨발에 짚신을 신고 오전 10시경까지 걸으며 하는 것이다. 한사람이 집집마다 문 앞에 서서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반드시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약 30cm 정도의 간격을 우지하며 연이어 '호-오'를 큰소리고 외치면서 걷는 수행이다.
담장이 없는 교토의 주택구조가 현관 문은 좁지만 안으로 깊숙히 길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집안 일을 하다가 이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씻고 돈이나 쌀 등을 준비하여 문 앞까지 나와도 두 세 번째의 운수(雲水, 탁발승)와는 만날 수 있도록 조정된 거리이다.
언젠가부터 여법한 탁발스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우리 대한 불교 조계종, 그래서 나의 절집 나이가 어느덧 스물 다섯이나 되면서부터 탁발의 경험이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새삼스럽게 탁발의 본뜻을 생각하게 되었다.
탁발이라고 하는 것은 수자(受者, 雲水)의 입장에서는 인욕(忍辱)의 수행이며 상대(施者)에게 있어서는 탐욕을 버리게 하는 행위 즉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이 수레의 두바퀴와 같이 구족한 수행임에도 본래의 이러한 의미와는 달리 어떤 폐단이 있었기에 수행중심의 한국불교에 유독 탁발수행의 제도가 없어진 것일까.
나는 온통 시내를 뒤흔드는 것 같았던 외침소리에 놀라워하면서 그 이후로 '호-오'라고 하는 큰 소리는 불법의 '법(法)'을 세간에 널리 그리고 깊숙히 전파한다는 운수납자의 수행하는 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커다란 청소기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호-오'를 계속하며 내가 밟은 땅은 청결해진다는 원력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탁발한다는 것이다.
또 '호-오(法)'라고 하는 것은 발우(鉢盂)와 같은 발음에 같은 의미라는 것도 알았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나는 알 바가 아니다. 또 보시한 내용이 무엇인가에도 마음 쓰는 일 없이 그저 물이 거기를 흐르듯, 구름이 바람따라 움직이는 것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탁발하는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뭔가를 주는 경우도 가상적으로는 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치 오른손이 왼손에게 물건을 넘겨주는 것처럼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므로 주었다, 받았다 하는 관념이 없어진다. 주는 사람, 주어지는 물건, 받는 사람이 모두 나 자신이기 때문에 '준다'도 '받는다'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해주고, 해받았다고 하는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며 자비가 아닐까.
세상 상식으로는 신세를 지면 신세를 갚고, 은혜를 입으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삼륜공적시(三輪空寂施)라는 말이 있다. 탁발하는 사람, 보시하는 사람, 보시되어지는 물건, 이 세 가지 요소(三輪)가 처음부터 공(空)이어야만 진정한 보시이며 탁발인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사회를 위해서, 생태계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활동한다면 진정 참다운 선(善)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정신적, 물질적 보상 등이 필요 없다.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세상은 온통 사랑과 평화로움이 있을 뿐, '호-오!!'가 울려 퍼지며 지나가는 땅은 모두가 살아 움직이고 새롭게 피어나고 청결하며 행복하리라.
고요한 이 아침에 나 또한 나에게, 나의 영혼에게 큰 소리고 목놓아 외치고 싶다. '호-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깨어있기를,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