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어린 그리움

빛의 샘·추석

2007-09-15     관리자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멎은 후, 밤 하늘 가득히 달이 피어오른다. 싸늘한 밤 기운을 타고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내 가슴은 설레임으로 가득 차 온다. 그 달빛 속에는 내 그리움이 언제나 오롯하게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버진 달이 위영청 밝은 날 밤이면 소주 한 병을 들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오래도록 달빛에 젖어 소리 없이 흐느껴 우시곤 했다.
명절, 특히나 추석이 가까워질수록 그 횟수는 점점 많아져서 기어이 소리 내어 통곡하시는 날이 많아져만 갔었다. 나는 그렇게 달빛에 취해 계시는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 아버지의 남겨 놓고 온 가족과 고향 이야길 들으며 달빛의 완화함과 아버지무릎의 따사로움에 젖어 잠이 들곤 했다. 지금도 달빛을 받으며 눈을 감으면 그 낮은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들려오곤 한다.
"…6·25직전에 형님이 돌아가셨지. 홀로 계시는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 서울에 있던 나는 고향인 북청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난리가 터졌고, 어머님과 함께 그 난리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지.
어머니의 간절한 애원 때문에 떠날 만한 사람은 이미 다 떠나고 난 후에야 친구와 함께 월남하기로 결정했지. 그러나 남쪽으로 가는 길은 이미 끊어진 다음이었고 나는 어딘가에 도움을 청해야만 했지. 마땅한 은신처가 없었던 나는 당시 인민군 장교가족이었던 누이 집을 찾아갔고 누이 부부는 고민 끝에 며칠 동안만이라며 천장 위에 우리를 숨겨 주었지.
어느 날 저녁 무렵 누이가 급히 싸주는 주먹밥 하나를 들고 이별의 말도 베대로 하지 못한 채 우리는 뒷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단다. 허나 우리가 산등성이를 넘기 전에 몇 발의 총성과 함께 누이의 집은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지. 어린 조카와 만삭의 누이가 있던 그 집에 말이다. 몸부림치며 되돌아가려고 하는 나를 친구는 온몸으로 막으며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했지. 그때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아니 누이가족의 시신만이라도 땅에 묻어 주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구나. 그 날 밤하늘엔 보름달이 떴었지. 지금도 저 달은 밝게 빛나건만 내겐 그 밤의 불길처럼 보이는구나. 애야, 자니? 그래 네가 알기나 하겠느냐. 자! 방에 가서 자자."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후,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는 들을 수 없었고 달빛이 쏟아지는 마루 끝에서 나 혼자 우두커니 앉아 만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빛에 실어 보내곤 했다.
이제는 월남 1세들이 거의 사라져 가는 바람에 그들의 고통과 번민을 들을 기회가 적어져만 간다. 통일의 의미도 그렇게 쇠락해져 가고, 젊은 아이들 세대는 통일조차 원하지 않는다는 추세이고 보면 더욱 더 가슴이 저려오기만 한다.
가을이 오고 추석이 다가오면 헤어진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차례상도 밥도 못 떠놓게 하시다가도 성묘 가는 이들을 볼 때면 고개 숙인 채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눈물만 흘리시던 아버지, 그 모습이 이제는 내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나 또한 그렇게 아버지의 그리움을 이해하기 시작하던 어느 해 추석 무렵 달빛에 취해 있다가 나는 기어이 출가하고 말았다.
나의 출가는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원했다기보다는 내 그리움인 아버지와 그 그리움과 회한의 원천인 영혼들의 왕생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출가한 지 5년쯤 되던 해, 강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무렵 길에서 만난 어느 여인의 말 때문이다.
그는 나를 보자 차 한 잔 대접하겠다고 다방엘 데리고 들어가서는, "으이고, 이 스님, 어디 가시나. 스님은 자신의 혼자 생각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여! 천도 받고 싶어하는 조상님들이 출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니 얼른 절로 돌아가서 기도나 하세요."
처음엔 속마음을 들킨 것도 같고, 웬 만신이 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나 싶어 가슴에 담아 두지 않으려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 가슴 한 구석을 찌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느 가련한 영가가 있어 나를 통해 극락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허긴 누군들 어떠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 방황은 이틀만에 막을 내려야만 했다. 그 후에도 나를 게으른 수행자가 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휘영청 밝은 달빛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금생에 그들의 원을 충분히 들어주지 못 하더라도 내생에서의 좋은 인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말이다.
올 추석에 달이 곱게 뜰 때면 출가한지 어느 덧 열 일곱 해가 된다. 열 일곱이 주는 순수한 이미지처럼 초발심의 자세로 이제 조용한 토굴에서 한 삼 년 정진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 싶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