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통신]우리는 특별하다

2018-01-29     김성동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 일곱 걸음을 한 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말이다. 대승경전에는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를 덧붙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는 데 이만한 상징의 언어가 인류사에 또 있을까. 부처님은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이고, 이를 알지 못하기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셨다. 부처님의 전법은 ‘아당안지’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모든 사람들은 존귀한 존재이며,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 이를 보지 못하기에 괴로운 것.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다. 내가 존귀한 존재임을 모른다. 부처님은 당신이 존귀한 존재이기에, 이를 안다면 괴로울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 대장경은 이 말씀의 수많은 변주다. 

●    세상은 당신이 존귀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면 그 세상은 권력일 수 있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내 마음일 수 있다. 만해가 말한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란 조롱은 식민지 백성의 처지이기도 하지만, 괴로운 모든 이들이 받고 있는 힐난이기도 하다. 만해가 이 조롱을 거부했듯이, 괴로운 모든 이들은 이 힐난을 걷어내야 한다. 나는 존귀하다는 것.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 나의 포지션을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두는 것. 그것으로부터 나는 시작한다. 석가족 왕자인 싯다르타가 왕궁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높은 담을 넘은 것도, 왕의 지위로는 그 존귀함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무침 때문일 것이다. 

●    역대 수많은 스승들이 그러했다. 그 스승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세상이 짜놓은 그물을 찢고 버렸다. 가섭이 그러했고, 유마가 따라갔다. 용수와 원효와 성철이 이어갔다. 일대사건을 만들어 나갔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세상보다 더 큰 세계를 만난 것이다.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안을 봐라. 볼 것이 없다. 좁아터진 안이다. 이 안에 있는 나는 가짜다. 그런 환경에 휘둘리는 나는 특별하지도 않다. 열등감에서 헤어날 수 없다. 남과 비교하는 일을 반복하며, 허무의 길에서 구토할 뿐이다. 벼락과 번개처럼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밖으로 가야 한다. 더 많은 사람과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진짜 안에 있는 나와 만날 수 있다. 

●    출가는 이 만남의 출발이다. 집(家)을 버리고 떠나는 것(出)이다. 집은 아상我相이다. 집은 지붕과 네 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건물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집은 지금껏 쌓아온, 그래서 편하고 익숙한 습관의 집합체다. 이것은 그냥 몇 번 생각한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아, 그렇지’ 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결별이다. 단호하다. 어떤 틈이 끼어들어선 곤란하다. ‘이전의 나’에서 나와 ‘새로운 나’로 진입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나’는 사실상 없다. 오직 ‘관계된 나’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사람과 만나고, 진리와 만나고, 붓다와 만날 때, ‘연기’하는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연기緣起를 보는 자가 법法을 보는 자”라는 말씀한 것은 관념의 관계성이 아닌, 삶의 관계성을 이른 것이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 왜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했겠는가.  

●    우리는 특별한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다. 부처님께서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한 것이 그렇다.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누가 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출가는 그 맨 위에 있다. 출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특별함과 만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밖으로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