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파랑새가 있다

2018-01-29     강호진

초판 발행일 1993년 5월 20일, 창작과비평사, 347페이지, 6,500원.

당신의 책장 어딘가에 분명히 꽂혀있을 이 책의 날개에는 저자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아웃도어와 일상용으로 두루 손색이 없는 감각적인 디자인의 점퍼를 걸치고 있는 40대 중후반의 사내.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커다란 안경알 너머에는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눈매가 보이고, 날렵한 하관과 가냘픈 목선에선 사색가들이 지닌 예민함이 드러난다. 머리 위로 드리운 소나무 가지는 다분히 의도적인데, 자신을 꼿꼿한 선비로 봐달란 뜻이다. 사진 속 인물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다. 당시에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책이 인문 서적으로는 처음으로 100만 부가 넘게 팔리고,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될 줄은. 그리고 1993년 그해 여름, 해인사 말사인 청량사에서 삼천 배 삼칠일(21일) 기도를 하면서 틈틈이 그 책을 읽었던 한 청년 역시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무위사 사찰벽화에 관한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진. 최배문

“그렇게 우리가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해가 지기 전에 무위사를 답사하기 위함이었다. 남도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로 나는 항상 무위사無爲寺를 택한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위와 같은 인상적인 구절로 무위사를 세상에 데뷔시켰다. ‘남도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 그의 말에 따르면 ‘남도답사 일번지’는 곧 ‘남한답사 일번지’니, 무위사야말로 답사를 시작하려는 이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절집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무위사와 주변 동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고개를 저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사랑한 것들이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라는 낭만적 회고주의는 인간의 본능이지만, 모든 잣대를 과거에 맞추려는 것은 퇴행이라 부른다. 다만 유홍준이 옛 무위사의 분위기를 묘사한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 같은 말들이 대찰大刹에 가까워진 오늘날의 무위사에겐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무위사에 도착했을 땐 겨울 해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벽화를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는 새로 지은 전각이며, 요사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굴착기와 공사용 트럭이 놓여있는 절 마당을 가로질러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섰다.

사진. 최배문

보물 제1314호인 무위사 ‘백의관음도’는 보물 제1312호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벽화다. 후불벽 앞면에는 1476년에 그렸다는 화기畵記가 남은 벽화가 있는데 국보 제313호인 ‘아미타여래삼존도’이다. 학계에선 백의관음도가 여래삼존도와 같은 해에 그려졌으리라 추정한다. 그런데 이왕 무위사 벽화를 다룰 요량이면 국보가 나을 텐데 왜 백의관음도인가. 백의관음도에는 ‘미스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그리고 남겨진 몇 가지 단서. 우리는 탐정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무위사 백의관음도가 품은 비밀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려면 벽화에 얽힌 전설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원래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분위기가 반을 차지하니 말이다. 

무위사 관음벽화는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한 승려가 무위사를 찾아와 자신이 관음벽화를 그릴 터이니 49일 동안 아무도 극락전에 출입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런 이야기는 늘 마지막 날 누군가 금기를 깨는 것으로 파국을 맞는데, 주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틈으로 훔쳐보자 관음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가 붓을 문 채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조선의 문인인 신명규申命圭, 이하곤李夏坤 같은 이들이 자신의 문집에서 무위사 관음벽화를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도자는 당나라 때 활약한 화가로 화성畫聖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벽화를 잘 그렸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그림에 중국의 오도자나 파랑새 전설이 등장하는 것은 당시에도 관음벽화가 신비롭고 영험하게 보였다는 뜻이다.    

제법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사건의 현장, 아니 그림을 조사할 때다. 벽화의 중앙에 흰옷을 입고 연꽃잎을 탄 채 바다 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을 보자. 보살의 체구는 건장하고 얼굴은 자애롭다. 무위사 관음도는 일반 관음도와는 달리 『화엄경』에 등장하는 바다 위로 솟은 산, 즉 관음이 앉아있는 바위(금강석)로 상징되는 보타락가산이 없다. 기이하게도 화면 좌측 아래의 인물 또한 귀여운 선재동자가 아니라 나이 든 승려인데 머리에 광배가 있고, 어깨 위엔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 독특한 벽화가 『화엄경』을 기반으로 그려진 것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린 것인가? 그리고 저 승려는 누구인가? 사건이 미궁에 빠지려고 할 찰나 새로운 단서가 등장한다. 좌측 상단에 적힌 오언율시다. 

바닷가 외딴곳 낙가산 봉우리가 있으니(海岸孤絶處 中有洛迦峰)
관음은 머물러도 머문 바 없고, 불법의 이치는 만나도 만났다고 할 수 없네(大聖住不住 普門逢不逢)
보배구슬이야 내가 욕심낼 바 아니나, 파랑새와 사람은 만날 수 있으니(明珠非我慾 靑鳥是人逢)
오로지 푸른 파도 위에 달처럼 환한 관음의 진신을 뵙기 바라나이다.(但願蒼波上 親添滿月容)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려 문신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의 시와 두어 글자를 제외하고 같다. 그런데 유자량이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이 특이하다. 동해 낙산사의 관음굴을 참배하다가 파랑새가 꽃잎을 물고 와서 자신 앞에 떨어트리는 신묘한 일을 겪고 시를 남겼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그렇다면 벽화 속 관음을 만나는 인물은 이 시를 쓴 유자량이 아닐까? 그럴 리 없다. 그는 승려도 아니고, 광배를 두를만한 성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사진. 최배문
사진. 최배문

 

나무를 보기 위해선 숲부터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다. 유자량의 시가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인문지리서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강원도 양양 지역의 사찰인 낙산사와 그 창건을 설명하는 와중에 그의 시가 딸려 나온 것이다. 낙산사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유명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의 승려 익장益莊이 전하는 설화가 있다.

두 이야기 다 의상이 낙산에 관음을 친견하러 가서 수정염주와 동해용왕이 준 여의주를 받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운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의상은 관음의 ‘진신을 보지만(乃見眞容)’,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관음이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我身未可親覩)’라고 말하면서 굴에서 손을 뻗어 수정염주만 전한다.

이제 유자량의 시구인 ‘보배구슬(明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유자량은 의상이 낙산에서 관음을 만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은 일화를 빗대어 자신의 시에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저는 감히 의상 스님이 받은 구슬 따윈 꿈도 꾸지 않을 테니 파랑새를 만난 김에 관음보살님을 한 번이라도 친견하면 좋겠습니다.’가 시에 담긴 내용인 것이다. 유자량이 관음을 ‘직접 뵙기(親添)’를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알고 있던 낙산사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의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림을 보면 백의관음의 왼 소매가 바람에 휘날리는 화살표처럼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 끝자락에 붉은색 여의주가 놓여있다. 의상이 용왕에게 받은 여의주다. 의문의 승려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시선은 관음의 진용이 아닌 구슬로 향하고 있고, 살짝 벌어진 두 손은 그가 곧 구슬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한다.

지금껏 나온 모든 단서들은 한 사람을 지목하고 있다.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이다. 무위사 백의관음도는 의상 대사가 낙산에서 관음을 만나 보배구슬을 얻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명탐정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범인은 바로 의상 스님 당신이야!”라고 외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벽화 속 의상의 얼굴이 너무 투박하게 생겼다는 점이다. 의상은 귀족 집안의 자제이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많은 제자를 거느렸던 교육자다. 『삼국유사』에서 의상을 대표하는 말도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을 의미하는 ‘전교傳敎’이다. 동양화란 사람의 외형이 아닌 골수를 표현하는 법이니 해동화엄의 개창자를 서민적으로 표현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너무 가까이 있고,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도리어 지나쳐 버린 것을 떠올려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벽화의 전설 속에서, 유자량의 시에서, 그림 속 비구의 어깨 위에서 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던 ‘파랑새’가 아닐까.

파랑새라면 의상보다 원효가 더 인연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원효는 관음의 화신과 세 번이나 마주치는데 세 번째가 파랑새다. 문득 무위사의 창건주가 누군지 궁금해진다. 1739년에 쓰인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의하면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고 사명을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당시 강진은 백제 땅이었으니 사실로 받아들일 순 없더라도, 전승이 지닌 은밀한 상징성을 생각하면 기묘한 인연이다. 그렇다면 제멋대로 생긴 저 승려와 성자를 의미하는 광배는 『삼국유사』에서 ‘한곳에 묶어둘 수 없는 인물(不羈)’이자 ‘성스러운 이(聖師)’라는 표현을 동시에 사용했던 원효를 위한 것인가? 벽화는 의상의 창건사찰에서 관음의 진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선 원효를 위해 무위사에서만큼은 관음을 만나는 모습으로 그리려 했던 화사의 정성이 숨겨진 그림이었던 것인가? 

이야기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방금 시작되었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