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인도 3 아잔타(Ajanta) 굴원

불국토 순례기,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 3 위대했던 납자(衲子)들의 도량, 아잔타(Ajanta) 굴원

2007-09-15     관리자

산치(Sanchi) 에서 아잔타의 굴원(굴원)으로 가는 기차는 광활한 데칸 고원을 가로지른다. 도무지 기보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산야는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다만 관목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는 검은 너럭 바위들이 고원다운 위압감을 드러낸다.

차창 밖의 유유자적한 풍광과는 달리 차안은 발들일 틈이 없다. 가난에 찌든 서민들의 땀 냄새가 배인 삼등칸은 늘 이렇다. 언제나 초만원이다. 사람들이 자나 다녀야 할 통로에 드러누운 사리(sari)의 아낙들은 더 이상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차안과 피안은 이다지도 다르다.

짜여진 일정을 싫어하는 나는 예약이 필요 없는 삼등칸을 탈 수 밖에 없다. 외국인 여행자라는 이유로 또는 이런 저런 구차한 변명을 들어 보다 나은 자리로 갈 수도 있겠지만, 아예 삼등칸을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 틈에 끼어 앉아 함께 차이(chai, 茶)를 마시며 그들의 세상을 훔쳐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린내가 코를 찌르는 화장실 앞까지 밀려나 밤을 새우게 되기도 하지만, '더럽다' '깨끗하다'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자신의 현존을 확인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정오 경에 산치를 떠난 기차는 자정 무렵에야 잘가온(Jalgaon)역에 닿는다. 근 반나절을 달려온 셈이다.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멈추어 선다는 것이 다소 아쉽지만, 잘가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아잔타로 갈 수 밖에 없다. 잘가온에서 아잔타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거리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골 풍경이 정겹다. 사탕수수를 실어나르는 달구지을이 한가로이 오가고, 꼬질꼬질한 '네루모자'를 쓴 촌로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버스가 굴원 초입의 정류장에 들어서면 지금까지의 평화롭고 한가한 분위기는 일변한다. 흡사 시골 장터를 연상케 하는 좁은 공간에 연이어 관광 버스들이 들어와서는 사람들을 쏟아 부어 놓고, 소풍 나온 아이들, 시골 아낙들, 구걸하다시피 매달리는 장사꾼들, 경적 소리, 확성기 소리로 온통 아수라장이다.

산치의 조용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곳에 굴원을 열게 된 것은 납자들이 우기에 비를 피해 수행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외딴 벽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이 근처를 지나는 교역로가 있어서 먹을 것과 일용품을 구하기가 그만큼 손쉬웠고, 또한 교역로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수행과 명상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그야말로 마을에서 '멀지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이었다. 낙타 대신에 버스가 다니는 지금에는 이곳 굴원이 마을에서 너무 가까워져버린 감이 있다. 사람의 공해는 어디든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굴원 입구로 가는 계단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말굽 모양으로 구부러진 와고라(Waghora) 천(川)과, 이를 따라 가파른 벼랑에 조성된 굴원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날 수많은 납자들이 용맹 정진하던 대가람이다. 우선 그 규모의 웅장함에 놀란다. 이름난 곳들은 대개 그림엽서나 사진보다 실제가 못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지만, 아잔타 굴원 만큼은 정반대다.

동서 약 500m 되는 침식단애(浸蝕斷崖)의 중턱에 모두 29개의 굴원이 일렬로 조성되어 있다. 입구가 있는 동편에서 서편으로 순서대로 1번부터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이것은 근자에 편의상 매긴 번호에 불과한 것으로 이들의 조성연대와는 무관한 것이다.

굴원의 모든 부분이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수백 년에 걸쳐서 그 수가 차츰 불어난 것이다. BC 2세기경에 조성된 것들이 있는가 하면, AD 7세기 굽타 왕조 말기에 조성된 것들도 있다. 그 형태에 있어서도 스투파 혹은 불상을 모신 예배 공간으로서의 차이뜨야(chaitya)와 납자들의 주거 공간인 비하라(vihara)로 나누어진다.

굴원 자체도 하나의 웅장한 조각 작품이지만 그 내부에는 불교 예술 작품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돌로 된 조각과 부조들이 남아 있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천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야 선명한 고대의 채색이 그대로 숨쉬고 있는 벽화는 놀랍다.

제1굴원의 전실 입구 좌우벽에 그려진 연화수(蓮花手, Padmapani) 보살과 밀적금강(密迹金剛, Vajrapani) 보살은 아잔타 벽화의 백미로 꼽힌다. 이들은 보관과 목걸이, 팔지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수행 보살들이 몸에 화려한 장식품을 지니고 있는 모습은 힌두교의 신앙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에 그려진 이국인을 연상케 하는 인물상이나, 관능적인 자태로 남자에게 기대어 선 여인 등은 다분히 세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떠밀리다시피 스물 아홉 개의 굴원을 돌아 내려오는 길이 허전하다. 세월과 비바람을 견뎌내고 용케 남아 있는 납자들의 흔적 앞에, 풀잎처럼 목숨 가벼운 인간이 마주 섰다는 그것만으로도 깊은 인연이라 할 것이지만, 분주하게 오가는 여행자들이 있을 뿐 납자들이 없는 절이 허전한 것이다. 긴 역사가 건네 오는 장엄한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변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썰물처럼 빠져나가면-적요가 흐른다. 소란스럽던 낮의 물상들이 마치 전생의 일들처럼 아득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는 별들이 손에 잡힐 듯 낮다. 사막이 멀지 않음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