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통신]우린 지금 계행청정한가

2018-01-02     김성동

●    1947년 가을, 청담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스님 등 20~30대의 스님들이 봉암사에 모였다. 이들은 내부 공동체 규약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결사를 시작했다. 성철 스님이 직접 붓을 들고 쓴 공주규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森嚴한 佛戒와 崇高한 祖訓을 勤修力行하야 究竟大果의 圓滿 速成을 期함.” 계율과 부처님과 역대 조사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구하자는 것이다. 당시 봉암사 결사는 성철 스님 스스로 밝혔듯이 “전부 새로 바꾼, 말하자면 일종의 혁명”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밝힌 것이 바로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    70년 전, 당시 한국불교의 흐름은 대처불교가 중심이었고, 계율은 교단의 바깥에 있었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이들이 스스로 지켜낸 18가지 엄중한 규율은 부처님 법에 근거했기에 이를 지키지 못하면 봉암사에서 내쫓았다. 그만큼 대중들은 절박했고, 당시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은 시대를 완전히 거슬러가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전운 때문에 1950년 3월에 결사가 멈췄지만, 한번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의 경지를 봤던 이들은 그 정진력을 멈출 수 없었다. 다시 대처의 불교, 파계의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교단을 짊어져야 할 책무감도 있었겠지만, 한번 잡힌 수행의 방향은 되돌릴 수 없었다. 

●    어떤 방향일까. 부처님 법대로 가는 길이다. 청규와 계율의 길이다. 이 길을 가다 보니, 한국불교는 근대의 왜색불교를 멈추고, 현대불교의 문을 열게 된다. 이후 한국불교는 50년대와 60년대 정화의 공간을 통과하면서 계행 청정 승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했다. 불과 70년 만이다. 그 시작은 몇 명의 스님들이었다. 그들의 자각으로 한국불교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희열감으로 그 길을 결택決擇했다. 부처님 법 외에는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멱살잡이 탁마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정오를 넘어서는 불식하고, 매일 두 시간 이상 노동하고, 정해진 시간 외에는 눕지 않으며, 방 안에서는 반드시 벽을 보고 앉는 등의 규율은 결택한 몸에 잘 맞았다. 

●    70년이 지난 오늘 우리 한국불교는 다시 봉암사 결사를 말한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60주년이었던 10년 전에도 그러했다. 말하는 화자와 듣는 청자만 보였다. 행하는 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봉암사 결사에서 몸에 익었던 에너지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왜색불교를 거슬러 꿰뚫었던 그 기세는 오늘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교학은 더 풍성해지고, 부처님 법을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읽고, 듣고,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선과 위빠사나, 티베트불교 등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누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 수 있다. 그럼 이제 봉암사 결사 정신은 실현된 것인가?
          
●    계행이 불편하면 실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가짜이기에 금방 들통이 난다. 봉암사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우리가 봉암사 결사에서 배울 점이다. 봉암사 스님들은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계를 읽고 외웠다. 공주규약의 하나다. 지금 우리의 계행은 어떠한가. 부처님 법은 보시와 지계에서 출발한다. 재가자는 보시와 계율을 행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보시의 기쁨을 맛보고, 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스님들은 바라이죄를 범하지 않도록 공동체 속에서 늘 점검해야 한다. 재가자와 가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계행이다. 출가자의 범계는 지혜를 갉아먹을 뿐 아니라, 교단 전체를 어지럽힌다. 출가자는 일반 세속인들의 행동들이 우스꽝스럽고, 티끌처럼 가볍게 보여야 한다. 계행청정한 이들은 당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