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단풍나무 숲에서

만해에게 단풍은 생명들이 감내해야 하는 불우함과 비참함의 상징이자 선禪의 종착점

2018-01-02     박재현
그림:이은영

가을 단풍이 유난히 고왔는데 몇 차례 비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더니 어느새 나뭇가지가 앙상하다. 봄꽃과 가을 단풍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계절이면서도 느닷없이 들이닥쳤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사그라지니 많이 닮았다. 단풍 든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꽃이 핀 듯도 싶어 단풍은 가히 가을꽃이라 할만하다.

선禪의 이치를 단풍에 담아냈던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그는 경성과 백담사를 오가며 지냈는데, 그가 머물렀던 설악에는 그때도 단풍이 지천이었을 것이다. 산불처럼 타오르는 단풍나무숲에서 그는 그 유명한 ‘님’을 떠올렸다.

님은갓슴니다 아々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치고 갓슴니다 

만해의 대표 시 「님의 침묵」은 대개 수험용으로 먼저 접한 탓에 시적 감상을 해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 시가 한국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가운데 하나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님의 침묵」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공력을 들이는 부분은 단연 ‘님’에 대한 해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시에서 ‘님’ 못지않게 절묘하게 설정된 시적 장치가 바로 ‘단풍나무숩’이다. 

단풍나무숲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말귀이다. 게다가 주인공인 님이 걸어간 곳이니 님의 정체와 성격을 살필 수 있는 핵심적 시적 장치임이 분명하다. 「님의 침묵」을 다룬 온갖 글과 참고용 도서에서도 이 단풍나무숲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경우는 거의 없다. “푸른 산 빛과 대조적으로 그 희망의 푸른색이 소멸한 절망, 조락凋落의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불교의 공空 사상과 연결됨.”이라고 수험용 참고서에는 적혀있다. 그렇다면 「님의 침묵」 속의 님은 그냥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하면 설명이 다된 것일까? 

‘단풍(나무숲)’을 좀 더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만해의 다른 작품에 있다. 바로 소설 「죽음」이다. 이 소설은 「님의 침묵」과 같이 1925년에 탈고되었다. 그래서 더욱 주목을 끈다. 하지만 당시에 발표되지는 못했고, 1970년대 초에 한용운 전집이 발간되면서 겨우 수습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의 내용 가운데 ‘단풍(나무숲)’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이 보인다. 

초가을의 어느 날 다 저물어 가는 저녁때였다. 종철과 영옥은 기약지 않고 파고다 공원에서 만나서 거북비가 있는 북편으로 나무 밑에 놓여 있는 긴 교의에 같이 앉았는데, 이른 가을바람에 처음으로 붉은 적은 단풍이 나무 사이를 통하여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영옥은 종철을 향하여,
“저 단풍은 곱고 좋기도 한데요.”
“단풍이 그렇게도 좋아요?”
“좋지 않습니까? 꽃보다도 더 고운데요.”
“단풍은 아무리 고와도 그것은 소슬하고 처량한 가을빛입니다. 나는 그런 단풍을 사랑치 않고 아름다운 봄에 피는 좋은 꽃을 사랑합니다.”
“봄에 피는 좋은 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요, 꽃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날이 많이 있는 봄꽃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 사랑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모든 빛을 거두어 가는 가을바람에 마지막 빛을 내는 고운 단풍은 스스로 사랑할 수가 없읍니다. 나는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는 가을 단풍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서 영옥과 종철은 애인 사이다. 영옥이 먼저 단풍이 좋다고 말했다. 대개의 연인 사이라면 나도 좋다고 그냥 맞장구치고 말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종철은 자기는 단풍보다 봄꽃이 좋다고 반박 아닌 반박을 한다. 이후로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논쟁처럼 아슬아슬하게 진행된다.

종철이 단풍을 두고 표현한 ‘소슬하고 처량한’이라는 말은 단풍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미지이다. 수험용 참고서에서 단풍나무숲을 설명했던 ‘절망, 조락凋落’이라는 표현과 의미상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 영옥이 단풍에 대해 다르게 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옥은, 봄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자기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 즉 자기애自己愛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봄꽃이 좋은 것은 그것이 내게 고와 보이는 한에서 좋은 것이니, 이렇게 되면 진딧물 낀 꽃은 싫고, 꽃잎이 상한 꽃도 싫고, 시든 꽃도 사랑할 수 없다. 고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옥은 단풍을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봄꽃과 달리 단풍은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자존감이 미약하거나 상실한 존재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남은 날도 길지 않아 불우하고 비참한 것이 바로 소설 『죽음』 속의 단풍이 상징하는 의미다. 단풍은 레미제라블이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영옥은 단풍이 고와 보이고 좋다고 했다. 이렇게 읽으면 「님의 침묵」 속의 단풍나무숲은 절망이나 조락의 의미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그 숲은 불우하고 비참한 것들이 모여 사는 바로 이 땅, 중생의 세계이다. 또 님은 그 여리고 불우한 존재들을 향하여 난 길을 따라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왜 ‘적은 길’일까. 남들은 가기를 꺼리기 때문에 그렇다. 봄꽃을 향해 난 길은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이니 당연히 넓고 큰 길이다. 또 왜 그 길을 ‘거러서’ 갔을까. 불우하고 남루한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말 타고, 가마 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왜 ‘참어치고’ 갔을까. 그 불민하고 허접해 보이는 것들 속으로 가려고 하는 님을 이해하지 못하여 남들이 말릴 테고, 님은 그것을 뿌리치고 끝내 떠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님’ 속에 선의 정신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바람직한 세상의 모습은 소외되고 불우한 것들에 눈길 주는 세상, 모든 것들을 하나의 기준 아래 줄 세우기보다는 저마다 자존감을 느끼도록 하는 세상,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각자의 삶에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맥락은 십우도의 열 번째 그림인 입전수수와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 경허 선사의 행적과도 일치한다.

만해가 남긴 시와 소설 작품을 통해 볼 때 그의 사상이 깊은 인간애와 타자에 대한 공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소외되고 불우한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 존재들은 「님의 침묵」에서 가을 단풍으로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데, 만해는 이렇게 약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전제로 하지 않은 한 어떤 이념이나 노선, 심지어 사랑조차도 결국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해의 생애는 관군과 동학, 전통과 근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맞부딪치는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봉건적 질서나 근대 개화사상 가운데 어느 한쪽에 선뜻 손들어주지 못했다. 그것들은 전통적 구습이나 제국주의의 형태로 폭력성을 감추거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약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공감의 필요,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된 폭력성에 대한 자성, 이 두 가지가 단풍에 내포된 선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해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가 생명임을 통찰했을 것이고, 이에 반하는 모든 것에 항거했다. 그에게서 단풍은 살아있는 것들이 감당해내야만 하는 불우함과 비참함의 상징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선禪의 종착 지점이었다. 내가 보기 좋아서 사랑하는 사랑은 끝내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만해의 단풍은 말해주고 있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