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 칼파브릭샤와 카마데누

2018-01-02     심재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칼파브릭샤kalpavr.ks.a

초여름이 되면 개와 함께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일어나면 구름을 쳐다보며 이런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만일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아무 소리 없이 그늘을 내어주던 나무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당돌하고 엉뚱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 나무를 신성시했던 이유는 동물이 피해갈 수 없는 폭력과 그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직접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가 나무를 잡아먹는 경우가 있던가? 또는 대지가? 가장 오랜 인도의 문헌을 살펴보면, 인도인들은 그것이 유정물이건 무정물이건 그것에 어떤 물리적 변형이나 폭력을 가하는 일에 대해 끔찍이 두려워했던 흔적을 자주 보여준다. 베다 제사를 위해 땅을 파거나 나무를 자를 때 심지어 돌과 같은 무생물을 옮기고자 했을 때도 이들에게 보상하고 치유하고자 했던 모습은 매우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자연에 가하는 어떤 변형도 폭력으로 인식했으며, 그 폭력이 죄와 벌로써 자신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도인들의 물활론적 태도와 정서는 아마도 불교나 자이나교가 비폭력 정신을 탄생시켰던 매우 근원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나무의 매력은 그것의 조용한 침묵에 있으며, 바람이 불 때만 가만히 대답하는 겸손함에 있다. 서슴없이 자라나지만 또한 서슴없이 팔과 몸통을 내준다. 이런 나무는 인간 누구의 가슴 속에나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쉘 실버스타인의 그 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일찌감치 인도의 종교 문학 속에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인도, 아니 전 아시아를 걸쳐서 이 나무는 세상의 모든 나무와 인간관계를 대변한다. 이 나무의 이름은 칼파브릭샤Kalpavr.ks.a, 다시 말해,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다. 이 나무는 상상의 나무지만 지상의 특정한 나무와 결합하면서 소원수所願樹나 기원수祈願樹를 대신해왔다. 마치 보리수菩提樹가 어떤 특정한 한 종류의 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지상의 칼파브릭샤는 어떤 때 코코넛 나무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슈바타(피팔), 어떤 때는 반얀나무를 가리키기도 했다. 어떤 나무를 기원수로 삼을 것인가는 그 땅의 주인들이 나무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어떤 나무가 칼파브릭샤로 선택되던지 그 나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내주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었던 그런 나무였다.  

이런 신성한 나무의 등장은 불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현재 인도에도 잘 남아있는 수목신앙은 나무를 통해 소원을 빌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심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며, 힌두교와 불교도 이러한 수목신앙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목의 정령 야차yaks.a를 인정한다든가, 부처님의 일생 동안 등장한 수많은 나무의 출현은 고대 인도인들과 나무의 긴밀한 관계를 읽어내고도 남는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나무에 우유와 옷가지를 공양한다. 이것은 특정한 종교를 떠난, 훨씬 더 원초적인 자연과의 교감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인도의 신화 속에서 이 칼파브릭샤는 창조신화 속에 등장한다. 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 속에서 칼파브릭샤는 불사의 감로수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창조된다. 감로수를 만들기 위해 신과 아수라들이 바다를 휘젓자, 감로수와 함께 이 나무가 바다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신과 아수라들의 전투 끝에 이 감로수뿐 아니라 소원수所願樹 칼파브릭샤는 신들이 차지하게 되며 신들의 왕인 제석천 즉 인드라가 자신의 거처인 메루산 정상으로 가지고 올라간다. 인드라는 자신이 사는 도리천忉利天의 정원에 이 나무를 심어놓았었는데, 결국 아수라들과 신들은 이 나무를 놓고 끊임없는 분란과 전쟁을 일으키곤 했다.

신들끼리도 이 나무를 탐내어 전쟁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부인과 함께 도리천을 방문했던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kr.s.n.a는 부인의 요청에 따라 몰래 인드라의 칼파브릭샤를 지상의 왕궁으로 옮겨왔다가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칼파브릭샤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꽃과 열매가 매우 향기롭기 때문에 특히 인드라의 부인 사치Śacī를 비롯해 도리천의 여신들이 몸을 치장하는데 썼던 나무이기도 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나무는 전생의 모습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크리슈나가 자신의 왕궁으로 이 나무를 옮겨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그 나무 앞에 세우고는 전생을 떠올리도록 했다.  

이것은 비단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나무가 아니다. 불교에도 이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아시아에서 흔히 이 칼파브릭샤는 파리자타pārijāta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불경에서 이 나무를 음역하여 파리질다波利質多 또는 파리질다라波利質多羅 등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더 흔하게는 원생수圓生樹라 부르기도 했다. 인드라가 이 나무를 자신의 궁성이 있는 곳에 심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이 나무가 서 있는 장소가 바로 도리천임을 상징하기 위해 빈번히 불경 속에서 그려졌다. 

이 나무의 표현은 특별히 동남아시아의 조각과 그림 속에 널리 펴져 있으며, 동아시아에도 원생수圓生樹는 불경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사는 원주에도 이 나무의 조각이 매우 생생하게 남아있다.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탑비가 그것인데, 비신의 머리장식으로 새겨진 원생수는 힌두 경전과 불경에 묘사된 것처럼 가지에 보석을 가득 달고 수미산 정상에 서 있다. 지광국사의 탑을 모신 그 장소가 곧 세계의 중심 수미산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칼파브릭샤는 인간의 무병장수에 대한 희망을, 부자가 되고픈 욕망을, 가정의 복되고 평화로운 삶의 희구 등을 모두 담은 나무다.      


아낌없이 주는 동물, 카마데누ka-madhenu 

칼파브릭샤와 같이 카마데누ka-madhenu는 상상의 동물이다. 카마데누도 역시 인도의 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 속에서 등장한 동물이다. 신과 아수라들이 저 어두운 혼돈의 바닷물을 돌리자 그 속에서 우주의 보배로운 존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마데누는 그 신성한 존재 가운데 하나다.

카마데누는 ‘소원을 들어주는 소’ 특히 암소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상상의 동물로 이들은 왜 암소를 택했을까. 암소는 특별히 힌두교에서 더 신성시되었지만 불교뿐 아니라 인도 전체 종교에서 암소가 무시되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힌두교와 같이 암소나 황소를 신과 같이 숭배했던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도 이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동물은 죽은 후에도 고기로 섭취하지 말기를 당부하시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인의 사랑은 유별나다. 

암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신성한 물질은, 우유와 요구르트, 기이(Ghee, 인도인들의 정제 버터), 소똥과 오줌 등이다. 우유와 요구르트 그리고 기이는 음식을 만들 때나 제사를 지낼 때 빠질 수 없는 재료이며, 오줌은 민간의료를 위해, 소똥은 땔감과 건축자재로 매우 유용한 재료다. 칼파브릭샤에 해당하는 나무들처럼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는데 이 모든 것을 암소로부터 얻어 살림살이에 사용해 왔다. 

하지만 카마데누가 꼭 암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인들의 관점에서 암소가 카마데누(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존재)에 해당할 뿐이지 실제 카마데누는 사람에 따라 어떤 동물도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마데누와 인간이 어떠한 방식의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칼파브릭샤와 카마데누를 무한한 사랑과 존경으로 길들이고 가까이할 때에만 이들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준다. 

카마데누는 암소의 형상으로 많이 표현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이상화理想化한 동물이다. 이 신화적 동물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폭력으로 침해하거나 살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을 희망한 상상의 동물이다. 

인도의 거리에서 쉽게 개와 원숭이가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찻길이나 학교의 등굣길에서도 멧돼지 무리나 소 떼를 아주 쉽게 마주친다. 인도사람들은 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에게도 인간의 도로를 점령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들이 우리에게 카마데누로 나타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금강대학교 HK 연구교수, 상지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동국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