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경영]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배우고 실천해야

2017-11-28     이언오

|    사람의 삼독이 자연의 연기관계를 훼손  

사진=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sangjustory

상주 화밀농원 윤덕수(73) 씨는 경력 55년 양봉가이다. 결혼 전 형님 밑에서 양봉을 배웠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이라 지게에 벌통을 지고 몇십 리를 걸었다. 꿀 모으는 채밀기, 벌 털어내는 탈봉기도 없었다. 형에게 독립할 때 벌통 두 개를 받았다. 아내 결혼반지를 팔아 송아지를 샀고 그것을 키워 판 돈으로 벌을 구입했다. 

초기에는 꽃을 따라 상주, 보은, 남양주, 강화로 옮겨 다니며 꿀을 떴다. 지금은 한꺼번에 개화하는 탓에 5월은 상주 아카시아 숲에, 6~7월은 강화 밤나무 숲에 벌을 풀어놓는다. 수분이 적고 설탕이 안 들어간 꿀을 얻으려고 채밀 시기에 신경을 쓴다. 오전 7시 전에 작업해서 벌이 당일 채취한 수분 섞인 꿀이 섞이지 않도록 한다. 윤 씨의 꿀은 수분 함유량이 18% 이하로 통에 쏟아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벌은 꽃이 피어있는 동안 꿀을 모으고, 꽃이 지면 밀봉을 뜯어 꿀을 먹는다. 윤 씨는 벌이 밀봉을 제거하는 바로 그때 채밀을 한다. 상주와 강화에서 각 한 번씩이다. 그래야 겨울 동안 먹인 설탕이 수확하는 꿀에 섞이지 않는다. 벌이 날개로 수분을 말리고 밀봉해서 보관한 것이 완숙 꿀이라 한다. 윤 씨가 37년 전 꿀을 박카스 병에 담아두었는데 아직 상하지 않았다. 냉장고가 아닌 찬장 아이스박스 속이다. 

일반 양봉가는 벌이 밀봉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양을 수확한다. 꿀 수분을 인위적으로 줄이며 설탕이 포함된 채 판매한다. 윤 씨의 꿀 생산량은 타 양봉가의 30%, 가격은 2배 정도여서 이익이 적다. 매년 강화 마니산에서 꿀 한 통을 제단에 바치는 봉제를 지낸다. 인간 때문에 희생당한 벌들을 위한 위령제이다. 벌과 인간을 위하는 마음이 이제껏 양봉 일을 계속토록 했다. 

윤 씨는 벌을 보면서 인간사회를 반성한다. 벌은 꿀이 모자라면 부지런해지고 남으면 게을러진다. 부족하면 도둑맞을까 봐 그러는지 입구 지키는 벌이 늘어난다. 침입자가 찾아오면 쫓아 보내고 배가 불룩한 경우 받아들인다. 생존에 힘쓰고 경쟁하는 점에서 벌과 인간은 비슷하다. 공동체를 우선하고 자연 속 조화를 유지하는 측면에서는 벌이 인간보다 한 수 위다.

벌은 인간과 함께 오랫동안 살아온 종이다. 최근 꽃 서식지 축소, 농약 살포, 전자파 공해로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다. 벌들이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군집붕괴 현상이 자주 관찰된다. 벌이 매개하는 덕분에 꽃이 열매와 씨를 맺는다. 벌과 꽃이 서로 의지하고 생겨나니 연기이다. 그 관계가 위협받자 자연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중이다. 꽃과 벌이 없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산업화·도시화·정보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두 자연을 낭비·파괴하고 자연과 멀어지는 흐름이었다. 자연 낭비는 탐욕, 파괴는 분노, 멀어짐은 무지이다. 삼독으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천지 격차가 생겨났다. 살충제 달걀을 무심히 먹어왔으면서 새삼 야단법석이다. 생명체를 돈 낳는 기계로 취급한 데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없다. 이번 파동은 큰 파국의 전조일 수 있다. 불살생 계율이 작동하지 않아 세상이 살생 지옥이다. 불교부터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참회해야 한다. 

  
|    자연에서 지혜와 자비를 배워 실천해야   

생명은 살아 있어 생물生物. 중생은 무리 지어 사는 생명. 살려는 발버둥과 서로 먹고 먹힘이 원래 그러하다. 사람이 유독 삶에 애착하고 자연을 낭비·파괴해서 고통을 자초한다. 생사가 공하며 자연이 연기로 존재하는 이치를 모른다. 어리석고 이기적이어서 자연의 순환·조화를 깨트린다. 귀일심원歸一心源, 자연의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 요익중생饒益衆生, 자연과 함께 널리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자연은 지혜의 원천이다. 부처님은 생명체의 고통에 눈떠 출가하셨다. 보리수 밑에서 자연의 원리인 연기법을 깨달으셨다. 연꽃 한 송이로 마음 법 전수가 시작되었다. 자연 밖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은 무지이며 오만이다. 자연과 부합하지 않는 과학은 한낱 환幻이다. 그래서 분석적 뇌과학, 논리적 인공지능은 오류이고 위험하다. 마음수행을 해야 미세와 광대무변을 아우르는 자연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 

자연 비유는 지혜로 이끄는 방편이다. 문자의 손가락보다 깨달음의 달을 보아야 한다. 보살의 연꽃은 세속 진흙에 뿌리박고 있다. 공안은 나무, 불, 동물처럼 주변 자연을 소재로 삼는다. 자연 비유로 법을 드러냄은 진리가 평상심임을 의미한다. 자연과의 괴리가 현대지식을 얕고 겉돌게 만들었다. 자연과 통하면 감각이 살아나고 판단은 현장감이 있게 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의 기준이다. 사람이 기계에 과도하게 의존해서 생각이 없어지고 몸은 속박당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광속의 환幻에 홀리고 비행기에 타서 음속의 허공에 매인다. 스스로가 아니며 그러하지 못하다. 스스로는 중심中心과 방향, 그러함은 중심重心과 운동력이다. 선박으로 치면 중심中心은 선장, 방향은 키, 중심重心은 평형수, 운동력은 돛이다. 이 넷의 마음 행복, 몸 건강, 인간관계, 조직운영 등의 이치가 들어있다.

자연은 소통한다. 여름 정자나무,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햇빛이 고루 스며든다. 바람과 햇빛이 적당히 흘러들고 가려진다. 열리고 포용하고 나누어서 모두에게 이익되는 모습이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이러해야 한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교감을 하지 않는다. 이름하여 자연결핍장애. 공장, 아파트, 도시, 사이버가 원인을 제공했다. 자연식, 친환경주택, 귀농, 숲길 산책 등 자연과의 소통이 치유방법이다.  

자연 공간은 곡선이다. 사람이 의도를 갖고 직선 공간을 만들고, 그것의 지배를 받아 습이 되었다. 직선은 급하고 부딪히며 구분하게 만든다. 한 도시 초등학교의 풍경화 수업, 학생들은 삼각자와 컴퍼스를 준비해왔다. 아파트와 빌딩만 보고 자라 자연의 곡선을 접하지 못한 탓이다. 곡선은 부드럽고 어울리며 통합한다. 일원상一圓相은 궁극의 곡선, 직선의 부분들이 무수히 모여 원이 되었다. 모으면 점, 펼쳐서 세상을 품는다. 직지인심의 직直은 직선이 아닌, 수행으로 우회하는 곡선이다. 

자연은 부분과 전체가 서로 위한다. 사람은 꿀과 꽃가루로 성에 안 차서 여왕벌 먹이인 로열젤리마저 뺏는다. 자연의 부분으로 은혜를 입으면서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 몰라서 그러면 어리석고, 알면서도 그러면 악하다. 자연에 끼친 제악諸惡이 수미산처럼 높다. 부분과 전체의 호혜 관계를 깨트린 업보를 갚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    불교가 사람·자연이 통섭하는 녹색문명 주도

사람 생명의 의지처인 문명이 위기에 처했다. 핵폭탄, 초고층빌딩, 인공지능이 삼독으로 쌓아올린 문명의 상징들이다. 문명의 체體에 무지한 채 상相에 현혹되어 잘못된 용用을 추구했다. 자연과 문명의 체가 한마음임을 알아 바르게 상을 보고 용을 써야 한다. 불교는 자연과 함께하는, 아니 자연 그 자체가 현현한 종교이다. 불법과 방편으로 자연의 낭비·파괴·괴리를 벗어나야 한다. 불교가 사람·자연이 통섭하는 녹색문명을 주도해야 한다.  

불교 공간은 자연에 속하고 자연스럽다. 공간이 자연에서 벗어나면 위태롭고 부자연스러우면 어긋난다. 사찰은 자연에 자리 잡은 하나의 점. 수행하고 자연을 보전해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수행을 소홀히 하고 자연을 낭비·파괴하는 사찰은 불교가 아니다. 도심 포교당은 산중 본사와 연결되어 자연 기운을 받아야 한다. 불교 공간은 자연의 정수를 담은 그릇, 문명이 자연을 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불교의 경쟁력은 자연이 바탕이다. 자연과 일치되게 살아야 하고 자연을 방편으로 활용해야 한다. 수행자의 청빈은 자연을 따르는 삶, 재가자의 보시는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이다. 참선과 자연을 접목시킨 선농, 선차, 선식, 선치유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 산사와 세속, 수행과 보살행, 자연과 문명이 융합된 새로운 불사佛事이다. 세속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시켜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해야겠다.

개인은 몸 치유를 위해 자연을 찾는다. 기업은 사회공헌 사업으로 자연보전에 나서는 중이다. 아직 마음 정화나 경영 전환에는 이르지 못했다. 개인·기업의 자연에 대한 갈증은 불교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 사찰 공간, 수행공동체, 재가단체가 자연을 나누고 연결해주어야 한다. 기업이 사업·경영을 자연 중심으로 전환한다면 문명 위기에 대처하는 길이 열린다.

뉴욕, 도쿄에서는 도시양봉이 자연을 재인식하고 낙후지역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에 그런 힘이 갖추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작은 문을 열었다. 이처럼 불교가 앞장서 일상생활에서부터 변화를 촉진해야 한다. 요일에 따라 작은 행동을 하면 어떨까. 달의 월요일에 자연의 지혜를 학습하고, 불의 화요일에 에너지를 절약하자. 수요일은 물, 목요일은 나무, 금요일은 돈 보시, 토요일은 농업, 일요일은 문명 차단의 테마를 실천하자. 불교가 자연 대상으로 보살행을 펼쳐 관련 고통들을 치유해야 한다. 수행공간을 지키고 불종佛種이 이어지도록 하는 자구책이기도 하다.                    

이언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부산발전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바른경영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대학 때부터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교와 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불교와 경영의 접목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