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뭘 어떻게 해야 되지?

- 시골 늙은이의 궁금증

2017-11-28     윤구병

날개 달린 새가 되고 싶어 비행기 만들고, 사슴보다 빨리 뛰고 싶어 자동차 굴리고, 온갖 날짐승 길짐승 흉내 내다 못해 땅굴 파는 두더지, 배로 기어 다니는 벌레 흉내까지 못 내는 흉내가 없다.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한다.

다른 산 것 가운데 사람 흉내 일삼는 것 있나? 없다.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산에 사는 것, 들에 사는 것, 물에 사는 것 저마다 생긴 대로 살아간다. 왜 사람들 가운데 도시에 떼 지어 사는 것들만 이런 흉내 내고 저런 시늉을 하면서 덕지덕지 처 바르고 이 탈 저 탈 뒤집어쓰고 살려고 들까?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사는 시늉을 할까? 왜 두 발로 걸으면서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저 먹을 것, 남 먹일 것 마련 못하고, 함께 먹고 두루 살릴 길 찾지 못할까? 그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 있을까?

5조 홍인의 맏제자였다는 신수가 제 딴에는 부끄러워서(따지고 보면 남에게 널리 알리고 자랑질하고 싶어서) 조실스님 담 벽에 써 붙였다는 ‘오도송’, ‘몸통은 (깨우침의) 나무고 마음은 거울이다. 날마다 씻고 닦아서 먼지 한 톨 없게 해라.’ 까막눈 혜능이 옆에 있는 중노미한테 읽어 달라고 해서 듣고 난 뒤에 혼자서 중얼중얼. ‘(날마다 디딜방아 찧는다고 돌확 지고 낑낑대는데) 뭔 소리여, 몸 씻을 틈 어디 있고 맘 닦을 새 어디 있어?’

‘몸’과 ‘맘’(마음)은 본디 둘이 아니다. 한 뿌리에서 나왔다. 몸 없이 맘이 저 혼자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업業’ 짓나? ‘죽었다’는 말을 점잖게 ‘열반하셨다’고 이르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맘이 몸에 끄달릴 일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하면 되는 일도 있고, 해도 안 되는 일도 있다. 할 짓 하면 되고, 못 할 짓 하면 안 되는데, 할 짓만 알아서 하고 못 할 짓 안 하는 사람 드물다. 할 짓만 하고 못 할 짓은 않는 게 좋다. 할 짓 하면 되고, 안 할 짓 하면 안 된다. 그게 헛심(헛된 힘) 안 쓰는 길이고, 안 되는 짓에 매달려 쓸데없는 짓에 힘 쏟지 않는 길이다.

(사람 빼고) 못 할 짓, 안 할 일 일삼는 산 것 드물다. 살아 숨 쉬는 다른 것들은 모두 힘을 아낀다. 힘에 겹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힘이 덜 들더라도 안 할 일은 삼간다. 할 일 하더라도 어떤 때는 뜻대로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애써 보지만 안 되기도 한다. 못 할 짓 저질러도 마찬가지다. 마음먹은 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할 짓 하고, 안 할 짓, 못 할 짓 안 해야 한다. 되더라도 안 할 짓은 말아야 하고, 안 되더라도 할 짓은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왜 할 일을 해야 하는가? 그게 좋기 때문이다. 왜 못된 짓 안 해야 되는가?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먼저, 못된 짓, 안 할 짓은 헛심을 쓰기 때문에 나쁘다. 다음으로 그런 짓을 견뎌야 하는 쪽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나쁘다. 할 짓, 못 할 짓 마구잡이로 저지르는 까닭이야 알고 보면 한둘이 아니다. 배운 게 (보고 들은 게) 없어서 그러기도 하고, 나만 살자고 그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일삼아도 탈 잡히지 않기 때문에 덩달아서 하기도 한다.

도시에서 오글오글 떼 지어 사는 것들 가운데 ‘철’이 없어서 할 짓, 못 할 짓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꼴 보기 드물다. 할 일, 될 일 가려서 한다. 힘쓸 때 쓰고 안 쓸 때 안 쓴다. 할 일 하고 안 할 일 안 한다. 그렇게 삼가고 또 삼가도 안 되는 일도 있다. 그럴 적에는 어쩔 수 없다. 하늘에 맡긴다. 안 되는 일 아득바득 우격다짐으로 하지 않는다. 한철한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서도 그렇고, 한철한철 나면서 ‘철’이 나서도 그렇다.

도시내기들은 촌놈들 힘없다고 깔본다.(꼭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힘을 쓸 때, 쓸 데에 쓰고, 아낄 데에 아낄 때 아끼는 것을 도시내기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아끼면 겉보기에는 힘없어 보인다. 촌놈들은 치고 패고 꺾고 목 조르는 데에 힘쓰지 않는다. 채찍질하고 가두고 죽음으로 내모는 데에 힘쓰지 않는다. 저 살고 남 살리는 데에, ‘살림’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 호미와 낫을 들 힘은 있어도 총이나 칼을 들 힘은 없다.

할 일 안 하고 못된 짓만 하는 망나니는 마을 안에서 멍석말이를 해서 버릇을 고치거나 하다하다 안 되면 마을 밖으로 내친다. 그런 망나니들은 이 마을에서도 못 살고 저 마을에서도 살 수 없다. 그 못된 것들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 떼 지어 모여 살던 곳이 옛 이오니아 식민지 같은 도시였다. 한곳에 모여 패거리를 이루고 호미와 가래 같은 ‘농기구’를 벼리던 대장장이 붙들어다 칼과 창을 벼리게 해서 그걸로 무장하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 입을 것 빼앗고, 부녀자 겁탈하고, 대드는 사람 목 베고… 앙갚음을 일삼았다.

시골 마을에는 따로 우두머리(임금이나 통치자 따위)가 없었다.(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할배, 할매들이 머리 모아 마을 일을 의논했다. 이 늙은이들이 살아오는 동안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들을 겪어 보아서 가장 슬기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어른 대접을 받고, 할 일, 못 할 일, 될 일, 안 될 일을 가려주었다. 어린애들, 젊은이들은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른 말씀’이 ‘맞는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겪어봐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 굴려서 살길을 찾는 도시내기들은 다르다. ‘늙은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이’가 되어버린다. 머리 빨리 굴리는 게 장땡이다. 할 짓, 못 할 짓 가리다 보면 살길이 막힌다. 그래서 할 일, 못할 일, 되는 짓, 안 되는 짓 가리지 않고 마구 저지른다. ‘이 일 해도 될까?’ 망설이다 보면 ‘(안 할 짓, 못된 짓 가리지 않고) 하면 된다.’고 나서는 놈한테 뒤처지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못 할 짓’이 없다. 돈만 되면 ‘불량식품’도 만들고, 싸워서 이길 수만 있으면 수십만, 수백만을 애 어른 가릴 것 없이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핵무기’도 만들어낸다. 우두머리가 내몰면 졸개들은 죽을 자리임을 뻔히 알면서도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다.

나무줄기가 가지를 치듯이, 가지가 곁가지를 치듯이, 우두머리 한 놈 밑에 두 놈, 두 놈 밑에 네 놈… 임금 밑에 정승, 정승 밑에 판서… 대통령 밑에 총리, 총리 밑에 장관, 장관 밑에 … 이렇게 줄래줄래 줄을 지어 ‘위계질서’를 이룬다. 죽어나는 건 맨꼬래비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이다. 죽지 못해 사는 건 밑바닥 뭇산이(중생)들이다. ‘정치’도 ‘위계’, ‘경제’도 ‘위계’, ‘종교’도, ‘학문’도 ‘위계’다. ‘대장’ 밑에 ‘중장’, ‘중장’ 밑에 ‘소장’이 있는 군대에만 ‘위계질서’가 있는 게 아니다. ‘이등병’이 맨 먼저 죽는다.

‘있는 놈’이 휘두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없는 놈’한테서 나온다. ‘없는 놈’들이 쌔빠지게 일해서 먹이고 입히고 좋은 잠자리에 재우면, 힘이 펄펄 살아나서 ‘있는 놈’들은 할 짓, 안 할 짓, 되는 짓, 못된 짓 가리지 않는다. 이 땅에서 가장 힘없는 놈은 누구인가? ‘농사짓는 놈’이다. 이 ‘힘없는 놈’들, 할 짓만 하고 못 할 짓 안 하는 사람들, 못된 짓 안 하고, 될 일 안 될 일 가려서 힘 아끼는 사람들, 그러면서 못된 짓, 안 할 짓을 하는 놈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사람들은 고개 돌려 하소연할 곳도 없다. 이놈도 가로채고 저놈도 앗아간다. ‘통치’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과학기술’의 이름으로, ‘학문’과 ‘문화예술’의 이름으로….

쓸데없는 데에, 쓸 때 없는 때에 힘을 쓰면 힘이 빠진다. 힘이 없으면 할 일 못 하고 될 일도 안 된다. 그런데도 죽자사자 ‘못된 짓’, ‘안 할 짓’만 일삼는 무리들. 해도 되고, 하면 안 될 짓을 가리지 못하는 것들. 그 못돼먹은 것들이 날로 늘어나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힘자랑 하고, 제때 힘쓸 곳에 제대로 힘쓸 사람들을 죽을 길로 몰아넣어, 가장 기름진 땅에 뒤이어 농사지을 젊은이들이 없어서 그 땅값 똥값이 되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도시 한복판 땅이 금값보다 더 치솟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죽을 날 코앞에 둔 이 늙은이에게 부처님은 뭐라고 하실까?

온 땅, 온 바다, 온 하늘을 쓰레기로 가득 채우면서 할 짓 제쳐두고 못된 짓만 하는, ‘함’도 ‘됨’도 모르면서 헛되이 함부로 ‘힘’ 쓰는 저 어리석은 무리들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나요? 묻고 또 묻는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아직 말이 없다. 죽을 때까지 물어야 하겠지. 그래야 되겠지.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