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무덤 앞에서

2017-11-28     박재현
그림 : 이은영

고분은 젊은 아낙의 젖가슴처럼 봉긋했다. 44호 고분 위에서 바라본 가야의 능선은 낮은 포복으로 출렁거렸는데, 바람은 능선 너머 먼 들녘에서부터 밀려왔다. 무덤가 늦가을 마른 풀잎은 바람을 따라 파도처럼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 넘실거리는 시간 아래서 가야의 왕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희뿌옇고 누르스름한 빛깔의 송장메뚜기만 말라 바스락거리는 늦가을 풀숲 속에서 튀어 날아올랐다.

죽음이 외로운 길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거나 덜어내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가야의 왕들은 함께 묻혔다. 왕과 함께 묻힌 자들의 주검은 왕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빙 돌아가며 자리 잡았는데, 30대 남녀가 함께 묻히기도 했고, 20대 여자가 혼자 묻히기도 했고, 10대 소녀 둘이 한꺼번에 묻히기도 했다. 

나는 30대 남성과 8세 여아가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앞에서 꽤 오래 서 있었다. 그들을 덮은 돌 덧널은 길이 224cm, 너비 50cm, 높이 28cm에 불과했다. 그 내부에는 남동단 벽에 접하여 어른의 머리뼈, 다리뼈, 발가락뼈 등이 발견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몸을 편 채 머리를 동남쪽으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부녀지간으로 보인다고 설명 판에는 적혀있었지만, 설사 그 내용이 틀림없다고 해도 부녀가 순장되기까지의 곡절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같이 죽어주면, 죽음의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일까. 함께 묻히면 저승 가는 그 길이 덜 외로운 것일까. 외로움은 내가 느끼는 것일 텐데, 죽어 내가 없어지고 나면, 도대체 누가 외로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너무 답답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은 마른 짚처럼 푸석거렸다. 

가야 왕들의 주검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산의 위쪽 능선에 자리 잡았다. 초기 가야의 죽은 왕들은 낮은 곳에 묻혔고 겨우 무덤 모양만 갖추었다. 그들의 권능은 그 주검을 산 정상 가까이 밀어 올만치 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무덤에 순장은 어려웠을 테고, 왕들은 낮은 곳에 혼자 묻혀 저승 가는 길을 감내했을 것이다. 

왕의 권능이 강성해질수록 능침은 높은 곳에 자리 잡았고 규모도 커졌다. 강성해진 가야의 거대한 분묘는 왕의 주검만이 아니라 다른 주검들까지 함께 거두어야 했기에 부득이하게 커졌을 것이다. 가야를 집어삼킨 신라의 왕들은 무덤의 크기가 곧 왕의 권능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혼자 묻히면서도 분묘를 크게 조성했다. 그들은 죽어서도 세상을 호령하고, 누워서도 세상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을 것인데,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그 호국의 전설이 성성할수록 살아 있는 왕들은 더 옴짝달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덩이쇠 위에 얹혀 깊이 잠든 가야 왕들의 고분은 아무리 우람해도 가야의 영토를 다 품어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왕을 묻었다고 해도 무덤은 결국 무덤일 뿐이었다. 무덤은 끝내 세상과 동떨어져 격리된 또 하나의 세상일 것인데, 더는 가야가 아닐 그 세상은 상상되지 않아 막막했다. 살아온 모든 기억을 토악질해내고 난 다음의 세상을 짐작할 수 없어 나는 무덤가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야 왕의 주검이 모인 곳에서 나는 선문禪門의 죽음을 떠올렸다.

옛날 인도 땅에서 여인 일곱 사람이 시다림屍多林, 즉 시체 버리는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중에 한 여인이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체는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屍在者裏 人向甚處去)” 다른 한 여자가 “무슨 소리요!(作麽作麽)” 하고 물었다. 그 순간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이 여인들을 본 제석천帝釋天이 감동해서 꽃을 뿌렸다. 그리고 여인들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 들어 줄 테니 말해보라고 호기를 부렸다. 여인들은 망설임 없이 세 가지 것(三般物)을 말했다. 그 세 가지는 뿌리 없는 나무(無根樹子) 한 그루, 음지도 양지도 없는 땅(無陰陽地) 한 뙈기,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골짜기(叫不響山谷) 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온갖 것을 다 가진 제석천조차 끝내 구할 수 없었다. 민망해진 제석천이 붓다를 찾아갔다. 붓다가 충고했다. “내 제자 중에 큰 아라한들도 이 이치를 알 수 없고 오직 큰 보살이라야 이 이치를 아느니라.” 결국 제석천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곱 여인이 말한 세 가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겠다.

이 이야기는 『선문염송禪門拈頌』 제18칙에 실려 있다. 제목은 「지시指屍」, 즉 「시체를 가리키며」이다. 시다림은 범어梵語 Śītavana의 음역音譯이라고 한다. Śīta는 ‘서늘함(寒)’을, vana는 ‘숲(林)’을 뜻하는 단어다. 이 인도 말을 번역하려고 애썼던 사람은 한자어에 주검을 나타내는 시屍 자와 많음을 나타내는 다多 자 표기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을까. 음이라도 빌려 올까 했는데 뜻도 덩달아 담아낼 수 있었으니 아마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다른 음역으로 서다림逝多林도 있다. 이것 역시 절묘하다. 음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의미를 풀어 봐도 “많이들 떠나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참으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뜻을 살려 번역한 용어는 한림寒林이다. 그곳을 지나는 이는 모두가 등골이 오싹해지기 때문에 찰 한寒 자를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좀 더 사실적인 설명도 있다. 시다림은 원래 중인도 지역인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의 북쪽 숲을 가리키는 지명인데, 이 숲에 서늘한 기운이 서린 곳이 있어 사람들이 이곳에 시체를 버렸다는 설명이다. 

적당한 말을 간절히 찾아 헤매다가, 지금껏 찾아 헤매던 그 말과 마침내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사람은 얼마나 왜소해지는가. 말은 비록 사람이 내뱉는 것이지만, 사람이 온전히 장악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다가, 마침내 말이 사람과 무관하게 마치 벼락처럼 의미와 만날 때, 사람은 말 앞에서 마침내 숨죽이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의 후반부가 어쩐지 께름칙하다. 너무 인위적이고 다분히 기획된 이야기처럼 보인다. 마치 붓글씨에서 가필 같은 인상을 준다. 활구活句가 사구死句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 이랬지 않았을까 싶다. 이 공안을 접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 가지 없는 물건’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이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이것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일곱 여인의 견해에 따른다면 스스로 가시덤불에서 벗어날 수 없다(據七賢女見處 自未出得荊棘林在).”고 경고했다. “주검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질문에서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다고 봐야 한다. 

공안이 전하는 핵심 중의 핵심은, 물어야 할 때 망설이지 않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묻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궁금하지 않거나, 궁금하지만 묻기 두렵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주검을 앞에 두고, “시체는 여기에 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고 묻지 못하는 것은 어디에 해당할까. 죽음이 궁금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해 말하고 듣는 게 두려운 것일까. 

어쩌면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말조차도 쓸데없다. “주검은 여기 있는데…. 아, 주검은 여기 있는데….”라는 말 한 마디로 모두 마친 것이나 진배없다. 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단말마의 비명 같은 질문 앞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세 가지가 있네 없네 하는 얘기는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가.

무덤가에서 죽어간 것과 살아 있는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죽음은 영, 남의 일처럼 보인다. 송장메뚜기는 저승 이야기를 전하려는 듯이 무덤가에서 튀어 날아오르지만, 죽음은 끝내 이해되거나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막막함의 힘으로 살아있는 것들은 또 겨우 살아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살아있음이 너무 짠해서 몸서리쳐진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