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상주 남장사 이백기경상천도

이태백이 노든 달아!

2017-11-28     강호진

“이태백李太白. 이 전후만고前後萬古의 으리으리한 「화족華族」. 나는 이태백을 닮기도 해야 한다.” 
이 문장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당나라 시인 이태백을 역사상 다시없을 고귀한 족속이라 상찬하며 “닮기”까지 하려 하는 이 사람 말이다. 툭하면 한시漢詩를 읊조리며 취향을 과시하려 드는 늙다리일까, 아니면 고전을 공부하다가 일찍 겉멋이 들어버린 인문학도일까. 만약 그가 한국문학의 모더니스트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인 작가에 속하는 이상李箱이고, 고작 26세에 쓴 글이라 한다면 누군가는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당나라 시인을 흠모하는 젊은 모더니스트’란 진술은 빈약한 상상력에 생채기를 내기 십상이지만, 어쩌겠는가, 이상이 유서처럼 써내려간 「종생기終生記」에서 이렇게 말해놓은 것을. 그런데 고전에 관심이 많았던 이상이라 할지라도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나 백거이, 소동파 등을 제쳐두고 이태백을 호출한 까닭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진 : 최배문

“암만해도 나는 십구세기十九世紀와 이십세기二十世紀 틈사구니에 끼워 졸도卒倒하려 드는 무뢰한無賴漢인 모양이오.” 
이상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통과 근대, 조선과 일본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 불안과 고통이 배어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미소년」”이란 사실과 “그렇건만 나는 확실히 노옹老翁이다.”라고 느끼는 감정 사이의 격절隔絶도 이런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이태백 역시 시대와 재능 사이의 시차 때문에 제 한 몸 둘 곳도 마땅치 않았던 인물이다. 처음엔 ‘하늘이 내린 재능은 반드시 쓰일 것(天生我材必有用)’이라 스스로 위안하며 ‘벗 없이 홀로 술을 마시며(獨酌無相親)’ 울분을 견뎠지만 천재를 품기엔 세상은 너무 느리고 비루했다. 결국 그는 ‘고금의 성현 따위는 모두 적막하고(古來聖賢皆寂寞)’, ‘오직 술꾼만 그 이름을 남긴다(惟有飮者留其名)’고 노래하며 유가儒家가 내세운 천명天命이니 인륜이니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버렸다.

대개 규율이나 합리와 같은 아폴론적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 밀려나고 짓밟힌 사람일수록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낭만적 구호 속에 스며든 디오니소스적 무질서와 밤의 정조를 체화하기 마련이다. 태양 아래 질식했던 존재들은 달빛이 어루만질 때 비로소 숨길을 틔운다. 알다시피 이성이 유폐된 시간의 마디를 생장시키는 명약은 술이다. 이태백이 ‘주酒태백’으로 불리고, 이태백이 놀던 것이 ‘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천재’, ‘광인’, ‘주변인’ 같은 기질적 동질감만으로 이상이 자신과 이태백 사이에 가로놓인 시공간의 심연을 메웠던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라는 산맥이 뻗어나간 끝자락에는 으레 초현실주의라는 첨탑이 세워지기 마련인데, 편지와 수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상의 문학이 실은 이태백이란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동경東京이란 참 치사스런 도都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京城이란 얼마나 인심人心 좋고 살기 좋은 「한적閑寂한 농촌農村」인지 모르겠읍디다.” 
“이태백李太白이 노든달아! 너도 차라리 십구세기十九世紀와 함께 운명殞命하여 버렸을든들 작히나 좋았을가?” 
나 같은 이에게 이태백은 기껏해야 ‘달타령’의 첫 소절을 환기시키는 기표이거나, 주사酒邪를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기 위한 알리바이지만, 이상은 이태백을 사숙私淑하며 그의 유산 상당 부분을 제 문학적 토양으로 일궈냈다. 그런데 이상과 꽤 다른 방식으로 이태백에 관심을 두고 그를 위한 공간을 내어준 곳도 있었다. 바로 상주 남장사다.   

남장사 극락보전 서측 포벽에는 이백기경상천도李白騎鯨上天圖가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반 극락보전 중수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는 절집그림으로선 드물게 이태백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말이나 사물도 맥락과 배치에 따라 그 의미와 쓰임이 완전히 달라지듯, 극락보전에 그려진 이태백은 시대와 불화不和한 천재의 면모보다는 종교적 초월성이 두드러진다. 이태백이 채석강에서 뱃놀이 중 물에 뜬 달을 건지려다 빠져 죽었다는 전설은 그가 도교에 탐닉했고 시선詩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는 사실과 결합해 이야기의 결말을 확장했다. 그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라 신선이 되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남장사의 이태백은 전설의 최종버전, 즉 ‘시인 이태백’이 아닌 ‘신선 이태백’을 담아내고 있다. 그림과 정확히 마주보는 동측 포벽에 그려진 그림이 도교의 신선 적송자赤松子란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림 속 이태백은 은자隱者의 상징인 화양건을 쓰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친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는 커다란 고래 위에 올라서 있다. 그림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먼저 이태백의 자세부터 보자. 실제로 따라 해 보면 꽤 불편한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이태백이 이런 모습을 취한 것은 화면이 보통의 사각형 형태가 아닌 직각삼각형의 모양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삼각형 화면 속에 어울리는 최적의 구도를 찾기 위한 화사의 고심이 담겨있는 것이다. 오른편 상단에 반쯤 그려진 희미한 달과 이태백의 비스듬한 등, 고래의 꼬리를 한 줄로 이어보면 그 선은 화면 상단의 틀을 거스르지 않고 서로 평행을 이룬다. 그래서 비록 이태백 본인은 불편할지언정 보는 사람의 눈은 한결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고래, 사람, 달로 이어지는 연속적 구도는 주제를 부각하는 동시에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궤적처럼 그림에 상승감을 부여한다. 화사는 이백이 하늘로 올라가는 직접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고도 ‘하늘을 오른다(上天)’라는 화제畫題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림 왼편에 쓰인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을 오른다(李白騎鯨上天)’라는 화제畫題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이백이 타고 있는 것이 정말 고래인가? 차라리 선사시대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가 더 고래답게 보일 정도다. 화사는 고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잉어 비슷한 걸 그려놓고 고래라고 우기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고래가 맞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중국회화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를 살펴야 한다. 현재 남은 것은 원본이 아니라 송대宋代에 모사된 그림이긴 하나 옛사람이 고래를 표현한 방식을 참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낙수의 여신(洛神)이 조식曹植과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낙신을 호위하는 것은 용과 고래다. 거기에 등장하는 고래는 물범의 얼굴에 용의 코 그리고 잉어의 몸통을 조합한 모습이다. 고개지가 고래를 상상의 동물처럼 표현한 이유는 그의 그림 철학이 전신론傳神論이기 때문이다. 이후 동양회화사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고개지의 전신론이란 그림에 있어 대상의 외형을 비슷하게 그리는 것보다 대상의 정신(골수)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낙신부도’의 고래는 물의 여신을 호위할 만큼 영험한 신화 속 존재로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남장사 극락보전의 고래도 마찬가지다. 신선이 된 이태백을 태우는 존재가 동해 바닷가에 출몰하는 고래나 해양생물도감에 실린 고래 사진과 같은 모습일 순 없다. 그것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가공할 만한 자연으로서의 고래나 상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종교적 성물聖物에 가까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화사는 고래를 ‘제대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고래에 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래는 그 자체로 이태백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고래 등 위에 매어놓은 술병을 보라. 술병과 고래를 합치면 다름 아닌 ‘술고래’가 된다. 흔히 술을 엄청 마시는 것을 경음(鯨飮, 고래처럼 마신다)이라 하고, 그런 이를 술고래라고 부른다. 이태백의 전설에 고래가 등장하는 것은 고래가 이태백의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태백이 보편적인 신선의 복장이 아니라 바닷가의 어부마냥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있는 모습도 유사한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벌써 발견했겠지만 그림엔 명백히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태백의 오른발엔 엄지발가락이 밖으로 붙어있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엔 마디가 하나가 더 그려져 있다. 이것이 화사의 실수인지, 이태백이 기인奇人이자 신선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인지, 후대의 개채改彩로 인한 변형인지, 이도 저도 아닌 장난인지 나로선 알 도리가 없다. 화사는 ‘이것도 한 번 풀어보시지.’라며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에게 고맙다. 덕분에 그림에 대한 시답잖은 분별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밖으로 나가 이태백이 놀던 달을 보고 싶어졌다. 문득 겨드랑이가 가려워 온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