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경영]음악은 소리의 즐거움으로 사회를 바꾼다

베네수엘라 아브레우 박사가 엘 시스테마el sistema 운동

2017-09-28     이언오
아브레우 박사

|    조화의 음악이 불협화의 세상에 주는 희망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은 유럽이다. 전성기는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약했던 1800년 전후. 유럽 제국이 중남미를 약탈해서 가져간 부가 밑바탕이 되었다. 왕실과 귀족들은 취미로 음악을 즐기면서 음악가들을 지원했다. 당시를 뛰어넘는 작품은 이후 나오지 못했다. 식민지 지배의 결과물로 위대한 음악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1975년 베네수엘라 아브레우 박사가 엘 시스테마el sistema 운동을 시작했다. 음악교육을 통해 빈민가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한 음악도가 자기 악기를 불태우는 걸 보고 나서였다. 아이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쳤고 또래들이 함께 연습·연주토록 했다. 슬로건은 ‘연주하고 싸워라.’ 세상 편견에 맞서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라는 뜻이다. 

현재 전국 900개 오케스트라에서 6천여 명 교사가 30여만 명 학생을 교육한다. 학생들은 성취도에 따라 유아 - 아동 - 청소년 - 직업 오케스트라의 상위 단계로 진입한다. 엄격한 훈련, 내부경쟁, 동기부여에 힘입어 상당수가 전업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지휘자·연주자도 여럿 배출했다. 음악을 그만둔 경우에도 다른 분야에서 더 나은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아브레우 박사는 성직자처럼 독신으로 살면서 헌신했다. 비전을 제시하고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후원을 얻어냈다.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어린 후배나 부진한 동료를 가르친다. 유럽의 정상급 음악인들이 이들의 열정에 감동하여 현지를 방문해 재능기부를 한다. 식민지 약탈이 주었던 고통이 조금은 치유되었다 하겠다. 엘 시스테마는 수십 년간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을 감화시키고 기회를 열어주었다.

요즘 베네수엘라는 정정이 불안하고 반정부 시위가 끊이질 않는다. 엘 시스테마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시위 도중 다치기도 했다. 음악운동이 사회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국에서는 10년 전 엘 시스테마를 모방한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주목적은 기업 사회공헌과 지자체 홍보. 서양음악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얼마나 지속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음악이 개인을 넘어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줄 수는 없는 걸까?

오랫동안 엘 시스테마 운동을 지속시킨 정성이 대단하다. 음악은 들어서 감동 받지만, 창작·연주에 정진하면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조화의 음악이 불협화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는 탓이다. 요즘 색色에 지배당하고 소음에 찌들어 음악音樂, 즉 소리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돈과 기술이 게으르게 만들어 정진의 인내를 감수하지 않는다. 음악은 본래 그 자리인데 개인은 무지·방일하고 사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불경은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로 시작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소리로 설했고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었다. 후세가 문자에 파묻혀 부처님 소리의 진실과 즐거움을 놓친 건 아닐까? 불경이라는 위대한 악보를 갖고서도 연주·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수행으로 금강의 침묵을 체득하고, 보살행으로 화엄의 화음을 울려야 한다. 음악에서 불교적 사회변화의 지혜를 꺼내고 방편을 써야겠다.

 

|    음악은 소리의 즐거움으로 바른 변화를 일으킨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change or die)’가 대세, 앞서느라 힘들고 뒤처질까 불안하다. 변화 본질에 무지하면서 거기에 집착하니 이중으로 어리석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하셨다. 정진해서 변화가 고통인 이치를 깨닫고 변화에 무애하라는 가르침이다.

『대승기신론』의 본각本覺·불각不覺·시각始覺으로 변화를 바라보자. 불각에서 헤매면 잘못된 변화이고, 불각에서 본각으로 나아가는 시각이 바른 변화이다. 본각은 원래 자리이며 불각이 자연스럽게 시각을 일으킨다. 고통 속에서 지혜·자비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이치이다. 음악으로 치면 본각은 침묵·화음의 통섭, 불각은 소음, 시각은 소음을 정화시키는 연주·감상이라 하겠다. 

음악의 관점으로 변화를 바라보자. 세속은 변화를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 여긴다. 출발점·과정·종착점을 모른 채 아집에 빠져 서로 싸운다. 무상·무아의 변화는 진리로 돌아감과 진리 작용들의 널리 퍼짐이다. 『화엄경』에 “묘한 소리로 충만하고 모두 응해 듣고 기뻐한다.”고 나온다. 각자 자리에서 변화 떨림을 일으키고 주위와 울림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음악은 쉽고 즐거운 방편이다. 『법화경』의 화택火宅 비유, 아이는 장난감에 혹해 불에서 벗어난다. 딸랑이 소리를 아니까 듣고 좋아하니 반응한다. 교학의 번잡함, 참선의 고고함이 현대인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마음 소리와 접속되는 쉬운 가르침들이 보다 효과적이다. 일상 즐거움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자비를 실천토록 해야 한다. 고통에 무지·둔감하니 즐거움의 뗏목에 태워 피안으로 이끌어야겠다.

음악은 중도로 아름답다. 적당히 당겨진 거문고 줄이 제소리를 낸다. 뛰어난 연주는 단속斷續과 완급이 섞여있다. 절대로 혹은 항상 옳은 변화란 없다. 갈등이 심하면 침묵으로 여유를 갖고 화합 조치들을 작게, 자주, 시도해야 한다. 무기력하면 충격을 주고, 공격적이면 부드러움으로 제어할 일이다. 외부 강제는 지속되지 않고 엇박자를 내므로 스스로 진동·공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음악은 수행·보살행의 길을 보여준다. 수행으로 자신의 고유 파동을 찾아 체득해야 한다. 보살행으로 중생의 파동이 조화를 회복토록 해야 한다. 부처님이 내보인 마음·우주의 조화로운 파동이 충만해 있다. 자등명·법등명, 자신과 진리의 파동이 공명을 일으키면 된다. 참선으로 뇌 파동을 변화시키면 지혜가 얻어진다. 물질의 쏠림과 막힘은 파동의 원리를 적용하면 해소가 가능하다.

세종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정음正音, 즉 바른 소리를 창제했다. 말귀를 알아듣고 뜻을 이해하라는 배려였다. 박연에게 옛 악기들을 복원토록 해서 풍속 순화를 도모했다. 그 백미는 특정 진동수의 돌을 찾아내 서로 다른 크기로 다듬어 편경을 만든 것이다. 이처럼 바른 소리는 무명·고통을 치유하면서 변화의 즐거움도 준다. 

 

|    부처님은 작곡자, 불법은 악보, 승가는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는 화합 승가와 통한다. 부처님은 작곡자, 불법은 악보, 승가는 오케스트라이다. 승가는 불법을 연주해서 재가자를 변화시켜야 부처님 은혜에 보답한다. 재가자는 감상의 즐거움으로 활력을 얻고 보시로 고마움을 표해야겠다. 프로 수행자가 중요하지만 아마추어 재가자가 많아져야 불법이 융성한다. 엘 시스테마 운동은 불교 전법, 수행 생활화, 보살행 확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속은 변화로 고통받는데 불교는 전통에 머물고 외부와 고립된 듯하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다투어 이사무애理事無礙하지 않고, 분열의 소음이 바깥까지 들린다. 부처님은 밧지족이 전통 존중과 내부 단합의 힘으로 번영한다고 지적하셨다. 불교가 변화의 중심에 서서 세속을 이끌어야 한다. 중심中心은 마음 가운데이니, 마음에 통달한 불교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불교부터 먼저 변해야 한다. 불법이라는 위대한 악보가 있으니 연주·감상만 잘해도 된다. 세상이 달라졌고 소음이 많으므로 그 방식은 과거와 달라야 한다. 유일신 종교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전투적 선교를 하는 마당에 그냥 머무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무주상은 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유로 생각·행동하라는 것이다. 경전·전승의 재해석, 수행·전법 방식의 혁신이 요구된다. 

불교는 세상 정화의 방편으로 음악을 활용해야 한다. 보는 글자나 따지는 알음알이가 아닌 마음으로 파고드는 직지인심이다. 아침 예불, 기도, 염불, 법석의 사자후, 범패의 장엄으로 신심·지혜·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야겠다. 진리 계합, 고통 치유의 음악을 만들어 법회, 행사, 방송에 사용해야 한다. 불교 음악이 침체된 국악, 소멸 위기의 월드뮤직과 연대하는 것도 필요하다. 

불교가 바른 소리로 세속에 기여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정치는 분노의 소음이 심해 침묵이 양약이다. 기업은 탐욕의 단음單音이 지배해서 할로 깨트려야 한다. 정치인들이 조건 없이 만나 상대를 경청해야 서로 스며든다. 기업가는 한 소식을 접해 충격을 받아야 바뀐다. 팔정도 해석이 개인, 고통, 수행에 치우쳐 있다. 새로운 팔정도로서 사회, 행복, 보살행을 추구하는 정음, 정변正變 등을 논해야 한다.  

변화를 말하고 행동하는 이에게 돌아오는 한마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답은 내가 할 일을 할 뿐. 깨달음 상관없이 수행하고 불국토 가는 길 멀어도 보살행 해야 한다. 부처님은 소리로 불법을 전하며 실천을 당부하셨다. 만법귀일 귀일하처萬法歸一 歸一何處의 귀歸는 변화, 하나(一)는 바른 소리. 나는 그 소리와 하나 되어 변화의 삶을 살고 있나? 스콧 니어링의 100세 생일에 이웃들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당신이 살아서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나는 어떤 소리를 울려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있는가?      
 

이언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부산발전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바른경영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대학 때부터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교와 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불교와 경영의 접목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