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 보령 세원사 정운 스님

머무는그곳이 법당이더라

2017-09-05     김우진
사진 : 최배문

|    포교의 인연

세원사 하면 청소년 포교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원사는 역사가 오래된 전통사찰은 아니지만 저의 젊음과 혼신이 고스라니 녹아 있는 그런 곳이지요. 창건한 지가 올해로 28년입니다. 돌이켜 보면 불모지인 이곳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많은 일들을 해내었습니다. 그렇게 청소년 포교의 일선에서 노력하게 된 이유들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선원으로 입산을 했습니다. 선원에서 행자 생활, 사미니 생활을 하면서 익힌 것이 항상 스님들의 참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더욱이 은사스님은 훌륭한 선객이기 때문에 늘 참선수행을 강조하셨던 터라 저 또한 당연히 수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타가 인정할 만큼 은사스님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강원 졸업 후 3년 결사에 동참했지만 저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회의감이 생겼습니다. 선배스님들의 정진하는 모습과 선원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여러 가지 수행습관을 받아들이기가 역부족인 것 같아 많은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구니대학이 설립이 되었다며, 각 선원에 비구니대학 홍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때 3년 결사를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비구니대학이 아닌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바라보는 비구니대학은 전공할 만한 학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비 또한 스스로 해결하여야 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이 법회 법사 소임을 맡았습니다. 이때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저는 포교와 현대학문에 매료되었습니다.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서울에서 활동을 하던 중 저는 심한 결핵을 앓았습니다. 더 이상 서울에 머물 수 없어 도반스님 소개로 이곳 보령에 휴양 차 내려와 어느 토굴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시내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승복을 입은 저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불교는 도대체 무엇을 했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생각에 구지레한 욕심들을 모두 버리고 이곳에서 포교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실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어떤 분인지 기억에도 없지만 세원사를 만들게끔 한 불보살님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입니다.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을 한 셈이지요. 여기저기 반연으로 시주를 하여 고추밭을 개간하고 가건물을 지어 놓았지만 불상을 봉안할 비용이 없었습니다. 마침 포교당을 그만두는 곳이 있어 그곳 부처님을 모셔 놓고 기도를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한문, 영어도 가르치면서 어린이 법회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바람이었습니다. 어린이 법회가 체계적으로 운영되던 시기도 아니었고, 충청도가 타 지역에 비해 불심이 강한 지역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이곳 보령은 자원이 풍부한 곳이지만 전통적인 불교보다는 교회와 점술집이 더 많은 그런 곳이지요.

어린이 법회로 인하여 아이들이, 어머니 중심으로 성인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법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세원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 했습니다. 또한 이 어린이 법회가 청소년 사업을 하게 된 동기가 된 셈이지요.

|    잠시 멈춤, 다시 나아감

혼자서 어린이 법회를 운영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첫째는 아이들이 없었고, 함께 뛰어 줄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가건물은 비바람이 불면 날아가기 일쑤였습니다. 불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지요. 그래서 가건물을 헐고 불사를 하는 동안 어린이 법회를 잠시 쉬었습니다. 혼자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불사를 마치고 다시 법회를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도반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고민 그만하고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청소년교화연합회 보령지부를 만들어 찾아가는 법회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일요일 어린이 법회 시간이 되면 생겼던 무거운 마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설치하여 보령시 전체 청소년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찰 안에서 업무를 보자니 불교 포교만을 위한 단순 종교단체로 인식하는 것 같아서 시내에 사무실을 얻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을 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찰 살림을 최소화해야 했습니다. 청소년자원봉사센터에 운영되는 그 모든 비용을 사찰에서 감당했습니다. 세원사는 지금도 공양주가 없습니다. 주지인 제가 공양주가 되고 채공이 되고 부전이 되며, 때로는 정원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비용을 청소년 사업에 환원했습니다.

세원사의 위치가 사찰에서의 포교 활동을 하기에는 여의치 않는 지역일 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사찰의 재정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선택한 포교의 전략은 사찰 밖으로 눈을 돌리고 지역과 관청의 협조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자로 살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신념이 뚜렷했기에 청소년자원봉사센터 활동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몇 년에 걸쳐 아낌없는 인적, 물적 투자와 쌓아 놓은 신망이 그리 만든 것입니다. 

1995년도를 시작으로 보령시에 새로운 청소년 사업 깃발을 꽂았습니다. 1998년도에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단’을 위탁받았고, 보령시로부터 ‘청소년상담실’도 위탁받았습니다. 2005년에 ‘청소년 문화의집’, 2015년에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 2016년에 ‘학교폭력 원스톱 지원센터’까지 모두 위탁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불교의 직접적인 포교에는 미약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없는 우리 아이들이 향후 종교 선택을 할 때 청소년기의 일상과 그 기억은 종교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간접 포교도 직접 포교만큼 중요하지요. 현재의 청소년포교활동은 보령시 청소년 사업의 성과로 지난해 대통령포장까지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사찰 밖의 여러 활동과 함께 사찰 안의 살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불자와 지역주민들의 문화충족을 위해 도예공방과 차 문화 교실을 개원하여 매주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년에 한 번 도예전시와 들차회를 개최하여 지역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또한 불자들의 기본교육을 위해 매년 불교대학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머무는 그곳이 바로 법당이었습니다. 모두가 수행이라는 매개체로 끌어 들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결정체를 만들어 가는 정진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고 활동하는 스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직접포교에 열중하는 사례는 많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 포교(어린이, 청소년)는 사실 미약합니다.

사찰 안에 안주하여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은 그냥 사람 사는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그 사찰 형편에 맞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입으로 하는 포교가 아니라 몸과 마음, 행동이 함께하는 포교가 불국토를 이루는 근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당이 사찰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무는 곳곳이 법당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전하는 것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법문. 정운 스님

보령 세원사 주지. 1975년 석남사로 입산하여 운문사 강원을 나왔다. 한서대학교 아동청소년 석·박사를 졸업했으며, 사회복지학 박사로 한서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보령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세원아청문화육성회회장, 보령시 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 청소년문화의집 관장, 청소년 유해환경감시단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