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견문록] 중관학당

공성과 적선의 지혜를 맛보다

2017-09-05     김성동
사진 : 김성동

‘공성空性과 적선積善을 위한 지혜. 논리로 논리를 논파하다.’ 중관학당 하계캠프가 열린 해남 일지암 ‘숲속도서관’에 걸린 중관학당 알림 글이다. 중관학당은 인도 타고르 대학의 인도-티베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티베트 스님들에게 중관사상을 가르쳤던 신상환(51) 박사가 이끄는 공부 공동체다. ‘중관中觀’은 2~3세기 인도의 대학자 용수(龍樹, Naga-rjuna)의 사상을 일컫는다. 오늘(8월 12일)부터 1박 2일 동안 배울 『중론中論』을 쓴 이가 바로 용수다. 『중론』은 모두 27품 445게송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심사상은 공空과 연기緣機로 용수 이후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이 『중론』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수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    용수의 생각, 두 가지

이곳 일지암에 도반들이 찾아온다. 30대부터 60대까지 부산과 서울, 지리산 등의 지역에서 18명이 왔다. 학생부터 한의사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적지 않은 도반들이 이미 중관학당 1기와 2기를 마쳤다. 『중론』을 공부하러 간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인도철학을 전공한 중견 학자는 “오, 중론 그 어려운 것을~”이란 댓글을 달았다. 중관학당 대표인 신 박사는 “이번 캠프는 그동안 배웠던 『중론』을 복습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공부는 반복하는 것입니다.”라며 학인들을 격려했다. 또 배울 것이 있다. 역시 용수 스님이 지은 『권계왕송勸誡王頌』(국내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번역 출간됐다.)이다. ‘『중론』을 공부하는데 도덕을 권하는 게송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데, 곧 신 박사의 말이 뒤따른다. 

“용수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옛날부터 ‘공병空病에 걸리면 약도 없다.’란 말은 왜 생겼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린 그동안 ‘있는 것이 아니다.’란 논파법을 배우며, 공병에 빠지지 않는 것을 공부했는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용수는 왜 도덕적인 삶을 강조했던가, 입니다. 용수는 수많은 사상들을 논파하는데, 왜 논파하는가. 논파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도덕적인 삶입니다. 인도-티베트 전통의 중관사상은 신통방통하고 오묘한 공사상이 아니라, 그냥 착하게 살기 위한 삶의 지침이고, 지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지표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용수가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다. 용수와 윤리. 낯설다. 『중론』은 공과 연기 사상인데, 도덕과 윤리라니. 신 박사에 따르면 용수의 사유는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중관사상에 나타난 공을 위한 논파, 다른 하나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도덕적 삶의 강조다. 그런데 이 도덕적 삶의 강조 부분이 한역 전통에서는 사라졌다. 신 박사는 대중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티베트는 왜 이것이 살아있고, 강조할까. 왜 그럴까.” 신 박사에 따르면 이는 중국과 티베트의 차이 때문이다. 중국은 도덕이 과잉되었고, 티베트는 아예 없었다. 티베트는 이것(『권계왕송』)을 통해 도덕률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쪽은 도덕이 너무 많아서 안 배웠고, 한쪽은 없어서 배운 것이다. 한역에서는 ‘용수, 중론’하면 어려운 중관사상만 생각하는데, 용수의 생각은 두 가지, 공과 도덕적 삶인 것이다. 

사진 : 김성동

|    공空은 연기緣起다

용수를 배운다. 그 첫째는 공이다. 신 박사는 학인들에게 계속 강조한다. 공은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 공성의 목적은 희론戱論 타파다. 공은 연기다, 이것 하나만 각인해도 악취공惡取空에 빠지지 않는다. 학인들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람들이 ‘공사상’ 하면 뭔가 신비롭고 초월적인 것을 생각하지만, 공은 연기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럼 부처님이 강조하지 않았던 공을 용수 스님은 왜 강조했는가. 부처님 말씀이 5백 년 지나오면서 연기緣起를 구사론자들과 초기유식학파들이 이리저리 주석을 붙이고 자기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를 논리적으로 논파한 것이 용수 스님이고, 용수 스님이 이 연기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게 공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것을 배울 것입니다. 공은 연기다, 이렇게 입력키를 바꾸십시오.” 

공은 연기다. 이제 제법 이 명제가 입에 붙는다. 그동안 중관학당은 1기와 2기를 지나오면서 1품부터 6품까지 공부해왔다. 오늘 이 하계캠프 자리는 ‘복습’이라고 했다. 신 박사는 말한다. 중론은 반복이라고. 잘 모르면 계속 반복해서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래서 복습을 강조한다. 1품부터 6품까지의 주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일체무자성,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 오온五蘊에 대한 고찰, 색色 또한 원인과 결과가 있다, 계界에 대한 고찰, 탐욕과 탐욕에 빠진 자에 대한 고찰. 낯설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의 생각들이다.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읽고, 복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    불교의 목적은 고통에서 벗어남

신 박사는 강의에서 자주 강조한다. ‘불교의 목적은 오직 이 하나! 고통에서의 해방.’ 신 박사에 따르면 고苦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항상恒常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기쁨이 곧 고의 바탕이다. 왕이 부처님께 가서 따진다. 아니, 제 왕비가 매우 이쁜데, 왜 이 기쁨이 고통의 바탕인가요? 부처님이 답한다. 왕비가 천년만년 저렇게 이쁜가요? 사람의 몸이란 병들고 늙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그 아름다움이 유지되지 않는 것은 고통인가요, 아닌가요? 신 박사는 이렇게 단언한다.

“단 하나라도 항상하는 것이 있다면 불법의 역사가 달라졌을 겁니다. 항상하는 것이 없다,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바뀌는데 우리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 우리의 감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혹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가 없는 것이 고의 바탕입니다. 고의 바탕은 무상입니다.”  

신 박사는 학인들에게 중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다시 한번 새겨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데 신 박사는 “부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해방시킬 수 없다.”고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우리다. 부처님이 아닌 것이다. 신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업은 우리가 짓고, 우리가 받고,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타자他者입니다. 중생의 근기가 팔만 사천 가지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팔만 사천 법문을 하신 겁니다. 근데 중생의 근기가 팔만 사천 가지밖에 안 되겠어요? 부처님께서 자식이 죽은 여인에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를 갖고 오라’고 하셨죠. 정신을 스스로 차리게 했죠. 부처님은 방편만 알려주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여인입니다. 나에게 맞는 법문이 여러분에게 맞을까요. 여러분에게 맞는 법문이 나에게 맞을까요. 자기가 자기의 잘못을 보는 것은, 눈이 눈을 보지 못하듯이 어렵습니다. 이를 끊임없이 점검해나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고통에서의 해방. 이것을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진 : 김성동

|    세상을 똑바로 사는 법, 『권계왕송』

『권계왕송』을 대중들 모두 한 게송씩 읽어나간다. 용수는 삼계육도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고, 수행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인간이 가졌다고 본다. 이 시각을 자기 친구인 싸따바타 왕에게 해준 이야기가 바로 『권계왕송』이다. 말하자면 ‘용수 스님의 세상 똑바로 사는 법’이다. 신 박사는 이 편지를 이렇게 읽는다.

“이 편지는 인간 몸을 가진 것이 왜 수행하기 좋은지 설명하는데, 이것을 읽으면 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합니다. 타 종교는 천신 또는 신을 우리보다 초월적으로 존재로 간주합니다. 타자와 주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근데 용수 보살이 본 신은 ‘천신, 저 불쌍한 것’입니다. 천신은 너무 긴 기간 동안 즐겁게 노니 공부할 시간도 짧고, 공부하지 않고 오랜 기간 놀다 보니 선업善業이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반면 인간은 시간을 알아서 쓰기에 인간 몸을 받기를 가장 복덕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천신, 저 불쌍한 것. 신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에서 바로 용수의 명쾌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신 박사는 대중들에게 묻고 스스로 답한다. “우리가 천신을 부러워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천신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수는 천신이라는 타자 자체를 해체시켜버린다. 그래서 금생에서 공동체 의식의 고양을 위해 수행하라는 것이다. 불교를 신통방통한 그 무엇이라고 하면, 저쪽(천신)으로 가는 것이고, 똑바로 살고, 공동체적인 도덕적인 삶을 고양하려면 이쪽(인간)으로 가는 것이다. 신 박사에 따르면 “불교는 신통방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선업을 쌓고 살 것인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    부처님의 부정과 용수의 부정

강의 중에 가장 매력적인 주제다. 부처님의 부정과 용수의 부정. 신 박사에 따르면 인도 논리학에는 부정의 언어가 없다. 때문에 전통의 브라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트만ātman이다.’ 부처님은 이를 부정한다. 어떻게? ‘인간은 안아트만anātman이다.’ 부처님은 아트만의 부정을 ‘안아트만’, 즉 명사형으로 부정한다. 이는 선법善法의 부정이 악법惡法이 아니라, 불선법不善法인 것과 같다. 아트만은 고정불변한 존재라면, 안아트만은 고정불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불법의 근간은 연기법이고, 안아트만은 연기적인 실체로서의 아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부정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신 박사는 강조한다. “무아無我라는 한역은 잊어버려라.” 연기적 존재로서의 아트만이 곧 안아트만인 것이다.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아트만, 이것이 인간이다. 부처님 말씀이 여기에 있다. 한역의 ‘무아’라고 하면 이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용수의 부정은 무엇인가. 용수의 부정은 다르다. 신 박사에 따르면 용수는 문장 전체를 부정한다. ‘인간은 아트만이다.’가 아니다. 이것이 용수의 부정이다. 이 때문에 중관사상은 인도에서 논리학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도 논리학은 ‘있는 것’ 자체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수는 인도 전통의 논리학, 이 개념을 부정한다. 신 박사는 이렇게 정리한다. “‘아트만이 있다.’의 부정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붓다의 경우는 ‘안아트만이 있다.’로 말했고, 용수는 ‘아트만이 없다.’로 말했다. 붓다와 용수 사이의 이 간극이 얼마나 작고, 얼마나 큰 것일까?” 부처님의 부정 방법과 용수의 부정 방법의 차이는 여전히 숙제인 것이다.    

이야기는 다양하며, 깊고, 때론 난해하다. 많은 것을 지면에 모두 담지 못한다. 신 박사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공성의 지혜, 연기의 실상을 체화하라고. “무아의 이치, 연기의 실상을 체화하는 공성의 지혜와. 복덕을 쌓는 자세는 공부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몸에서 생활이 되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자꾸 훈련하면 세상 사는 모습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