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구례 천은사 바수반두존자도

민물장어의 초상肖像

2017-09-05     강호진
사진. 최배문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란 존재는 언젠간 내가 아니게 될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관통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 「유년기의 노래」다. ‘내가 되기 전에 난 뭐였을까?’라는 물음은 향엄이 스승 위산에게 받은 유명한 화두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과 맞닿아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나 이전의 나’를 찾으려는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급기야 ‘나’와 ‘나 이전의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어지러워진다. ‘나’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익숙했던 ‘나’는 금세 낯선 어떤 것으로 변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묻기를 그치는 순간 우리는 천국에서 추방당해 어른들의 세계로 내던져진다.

나이가 들어서도 질문을 잊지 않는 이들도 있다. 붓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을 뛰쳐나와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답을 구했다. 붓다의 수많은 스승 편력을 쫓다 보면 그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는 타인에 의지하는 것으론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아이처럼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모든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붓다가 얻은 자유를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참된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붙잡는 것, 즉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과 세계의 근원이자 고통을 일으키고 소멸시키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연기법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든 지 900년쯤 뒤 간다라 지역에 세친(世親, 바수반두, 320-400)이란 천재가 등장한다. 마명馬鳴, 용수龍樹 등 극소수의 승려에게만 허락된 보살이란 칭호가 세친에게 붙는 것만으로도 불교사에서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세친이 없었다면 이후에 전개된 불교사상사의 볼륨은 몹시 빈약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적 행로를 살피면 붓다에 버금가는 방황이 있었다. 붓다가 이웃 종교인들에게 종종 모욕과 멸시를 받았듯, 세친 또한 그 방황으로 인해 적대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부파불교의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계승자인 중현(衆賢, 상가바드라)이 『순정리론』에서 쏟아낸 악담만 보아도 그렇다.

“세친은 무슨 이유에서 경량부 상좌들과 함께 사악한 패거리를 이루어 수승한 공덕과 뛰어난 깨달음을 갖춘 불타의 성스러운 제자들을 비방하고 중생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가? 지금부터라도 헛소리를 멈추기 바란다.” 

중현이 괜히 욕을 퍼부은 것은 아니다. 세친은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핵심교리를 담은 『아비달마구사론』을 쓰면서 곳곳에서 경량부의 학설을 빌려 설일체유부를 비판했던 것이다. 『바수반두법사전』에 의하면 세친은 처음에 설일체유부로 출가했으니 고향을 배신한 셈이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량부의 사상적 경향이 짙은 『성업론』을 집필하고, 종국엔 대승불교로 전향해 중관학과 더불어 대승교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유식학을 정초했다. 대승불교도에게 세친은 대승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상징, 즉 먼 길을 방황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탕아였고, 부파불교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철새처럼 날아간 변절자였다.

세상이 그에 대해 이런저런 칭송과 비방을 덧붙일지라도 세친 자신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이력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방황했던 한 인간의 기록,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 최배문

세친을 만나기 위해선 구례 천은사로 가야 한다. 천은사에는 드물게도 33조사 벽화가 남아있다. 천은사 33조사(실제론 27명) 벽화 중 하나로 등장하는 바수반두(세친)존자도는 극락보전 좌측 내목도리 윗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벽화를 통해 세친의 실제 면목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33조사 속 세친은 선종의 프레임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린 가공의 인물에 가깝다.

천은사 벽화의 조성시기를 보통 18세기 후반 극락보전 중수 때로 추정한다. 벽화들은 대개 명확한 기록이 없기에 법당의 중수나 탱화의 조성과 연관해 시기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벽화는 훨씬 후대에 제작되었거나 이후 대대적인 개채로 인해 원형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50여년의 세월을 견뎠다고 믿기엔 벽화의 필선과 채색이 너무 생생한데다 모본이 되는 『삼재도회』와  『홍씨선불기종』의 도상을 충실히 따르는 1753년 순천 선암사의 33조사도와 다르게 천은사 벽화는 도상적 변형이 많기 때문이다. 

그림은 지상에 서있는 두 명의 인물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세친의 대비구도로 짜여있다. 왼쪽 중앙에서 오른쪽 아래로 길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절벽은 그림에 두 가지 효과를 부여한다. 세친이 세속의 사람들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경지를 지닌 인물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평면적인 화면에 입체적 깊이를 불어넣는다.

절벽이 없었다면 세친은 고작 한 길도 안 되는 높이에 동동 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성스러움과 속됨으로 분할된 인물들을 다시 이어주는 것은 눈길이다. 사내와 세친이 지그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들 사이에 모종의 공감대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 공감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그림의 바탕이 된 『조당집』의 일화를 살펴야 한다. 

세친은 교화를 위해 나제국那提國에 들러 상자재왕常自在王에게 불교를 가르치게 된다. 어느 날 사신이 급하게 들어와 백만 코끼리 군사가 남쪽에서 쳐들어왔다고 전한다. 세친은 왕에게 둘째 태자 마나라摩拏羅로 하여금 적을 보고 가볍게 고함을 지르게 하라고 말한다.

태자가 성 남쪽에서 왼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자 코끼리 군사들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질 못했다. 왕은 이에 감탄해 세친에게 태자를 거둬주길 청했고, 이후 태자는 출가하여 계를 받는다. 이제 우리는 안다. 그림 왼편의 두 인물이 나제국의 왕과 태자이고, 태자는 오른손을 들어서 넘어진 코끼리 부대를 가리키고 있으며, 세친과 왕은 평화를 되찾은 기쁨과 태자를 출가시킬 계획을 눈으로 나누고 있음을.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조당집』은 선종을 선양하기 위해 33조사의 계보와 오대五代까지의 중국 선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세친은 전등법맥의 21조로 22조인 태자 마나라에게 법을 전하는 역할만 맡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진. 최배문

천은사 바수반두존자도에서 주목할 것은 벽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림에 숨겨진 다소 충격적인 반전이다. 벽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명대明代 화보畫譜인 『삼재도회』와 『홍씨선불기종』 등의 도상과 구도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곳곳에 모본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 모본의 ‘수반두대사脩盤頭大士’라는 화제畫題는 벽화 속에서 ‘大士’가 아닌 ‘大師’가 되었고, 머리가 희끗한 세친은 검은 머리의 젊은이로 바뀌었다. 모본에서 민머리로 표현된 태자 역시 쌍상투를 튼 동자로 그려졌다.

이것이 벽화를 그린 화사의 애초 의도였는지 후대의 개채로 인한 변형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림 속 최고의 파격은 왕의 머리에 그려진 성자의 광배다. 속인의 머리에 뜬금없이 광배를 씌운 화사의 의도를 추적하기 위해선 천은사 조사도 전체에 나타난 광배의 패턴을 파악해야 한다. 화사(원작의 화사든 개채를 맡은 화사든)는 각각의 존자들에게 광배를 그렸고, 존자와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성스러운 인물이라 여겨 모두 광배를 그려놓았다.

광배가 없는 이는 오직 시동侍童으로 보이는 아이들뿐이다. 이제 벽화에서 임의로 그려놓은 왕의 광배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태자의 머리에 광배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화사가 태자를 왕의 시동쯤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주고. 자신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도 모른 채 벽화를 그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애초 모본에 없는 광배를 그림에 집어넣어 자신의 개성을 과시하려 했던 화사의 욕심(혹은 습관)이 뜻밖에도 어두운 진실을 폭로하게 만든 셈이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섣불리 화사를 비웃긴 어렵다. 화사야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하는 짓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달캉살캉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가수 신해철은 사고로 죽기 전 자신을 대표하는 곡으로 「민물장어의 꿈」을 꼽았다. 뱀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살다가 죽을 때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을 하고 일생을 마친다. 그는 자신의 꿈을 뱀장어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 흐느껴 울고 웃으며 /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그가 붓다나 세친처럼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는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자신을 향한 끝없는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사진. 최배문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