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행의 필독서 Ⅰ

재가의 선수행

2007-09-15     관리자


'선 수행의 필독서' 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선 수행 지침서인 『무문관(無門關)』과 『벽암록(碧巖錄)』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담겨있는 화두들 가운데 무문관 제 1칙에 나오는 '조주무자' 화두와 조사스님들이 제자들로 하여금 바른 시공관과 생사관을 갖게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참나를 일깨우기 위해 사용한, 직접 시공관을 다룬 화두들을 몇 개 골라 제창(提唱)하기로 하겠다. 아울러 이 화두들을 물리학적인 관점을 곁들이면서 살피고자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물리학과 선적(禪的) 체험은 그 영역이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다짐해 둔다.
참고로 내가 속한 선도회(禪道會)에서는 지난 호까지 연재했던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화두들'을 마친 수행자들은 무문관과 벽암록에 들어있는 화두들을 들고 본격적인 수행을 하게 된다.

무문관과 벽암록
선(禪)은 당(唐)시대(618-906)에 가장 창조적인 활력으로 넘쳐 있었지만 그후 문화적 예술적인 면으로 발전되면서 북송(北宋)시대에는 차츰 회고적(懷古的)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남송(南宋) 말기에 가서야 공안에 의한 선 수행 즉 간화선(看話禪)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무문관은 이와 같은 때에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며 나타나 이 역사적 사명을 다한 소중한 선서(禪書)이다.
그러므로 같은 선 공안집이라 하더라도 벽암록과 무문관은 그 자체가 역사적 배경과 그 출현의 의의를 달리하고 있으며 이것은 두 책의 내용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 벽암록이 영탄적(詠嘆的)이며 경애적(境涯的)으로 쓰여져 문학적인 풍부함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무문관은 직설적이고, 제창적이고 참구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운수(雲水)들의 실천적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격려하려는 뜻을 갖고 쓰여진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차이에서 자주 "무문관은 논리적이지만 이론만 따지는 경향이 강하고, 벽암록에 비해서 고상한 시적(詩的) 선미(禪味) 가 부족하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것은 물론 무문 선사의 성격에 의한 점이 클 것이나 무문관이 간화선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가지고 출현했던 것에 비추어볼 때 이 책의 참구적 성격은 당시 선계(禪界)의 요망에 부응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문관은 수행자들의 지해분별(知解分別)을 철저히 끊을 수 있도록 제창되었기 때문에 선의 실천적 수행에 대한 지침서로 꼭 알맞은 것이다. 한편 벽암록은 유현고아(幽玄高雅:그윽하고 고상한)한 선의 경지를 나타낸 문학적으로 세련된 선서이다.
이상과 같이 두 선서의 성격적 차이를 비교해볼 때 비록 무문관이 벽암록에 비해 100여 년 위에 출현했지만 우선 무문관을 다루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생각된다.

무문관에 대하여
중국 송나라 말기에 살았던 무문 혜개(無門 慧開)스님이 48개의 화두(話頭)를 모아 엮은 책을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본칙(本則)과 무문 스님이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48개의 화두 모두에 평창(平唱)과 송(頌)을 덧붙이고 있다. 특히 맨 처음 나오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는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평생을 씨름하는 화두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담겨 있는 화두들은 무문 스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조사(祖師) 스님네들로부터 내려오던 고칙(古則)이며 무문 스님도 '조주무자' 화두를 받아 대오(大悟) 철저하는 데 6년간이나 걸렸었다. 그리고 무문 스님이 깨쳤던 그 상황은 『중집속전동록』에 잘 남아 있는데 무문 스님이 어느 날 제(齊)를 알리는 큰 북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고 하며 이 때의 상황이 "청천백일에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雷聲)이 울렸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큰 북소리에 깨달음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무문 스님의 수행이 이미 무르익어 있었으며 단지 큰 북소리와 더불어 깨달음이 열렸을 뿐인 것이다. 이후 그는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제자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알맞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화두들을 부과해 수행시켜 오다가 그것들이 어느덧 48개나 쌓이게 되자 1228년 남송(南宋) 이종황제(理宗皇帝)의 즉위를 기념하여 이들을 한데 모아 선 수행의 지침서로서 「무문관」을 엮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무문관은 첫 번째 '조주무자'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나머지 47칙은 모두 이 '조주무자'를 철저히 투과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1974년에 종달(宗達) 이희익 노사(老師)께서 선에 처음 입문하는 초심자들을 위해 매우 친절하게 풀어쓴 『무문관(無門關)』을 출판하셨는데 종정을 지내셨던 고(故) 고암(古庵) 노사께서 이 책을 접하시고는 종달 노사께 너무 노골화시켜 놓았다며 극찬한 책이기도 하다.

무문관 제 1칙 : 조주무자(趙州無字)
무문관 제1칙에 다음과 같은 선 문답(問答)이 있다.
조주 스님에게 어느 때 중〔僧〕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 스님, "무(無)!"라고 대답했다〔趙州和尙 因 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이 화두의 핵심은 경전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다 없다'라고 할 때의 '없다'라는데 걸리면 이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로 남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유(有) 무(無)를 초월할 것인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체득할 일이다. 사실 조주 스님은 불성(佛性) 자체에 관한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본인도 우주도 '무(無)'와 일체가 되어 물음을 던진 중 앞에 그 답을 내던진 것이었다.
자! 여러분!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스님은 "무(無)!"라고 했는지에 관해 여러 조사어록(祖師語錄)들에 담겨있는 언구(言句)들은 모두 다 집어던지고 직접 다리를 틀고 앉아 '조주무자'와 철저히 한 몸이 되어 조주 스님의 배짱을 스스로 꿰뚫어 보라! 참고로 부처님게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개라고 할지라도 불성이 있는 것이나 조주 스님은 어떤 중의 질문에 "무(無)!"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은 다른 중이 꼭같이 물었는데 이때는 "유(有)!"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유'와 '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뜻의 유나 무가 아닌 것이며 팔만사천의 법문을 다 뒤져보아도 이에 대한 견해는 걸코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체득해야만 조주 스님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다.
한편 삼일운동을 일으켰던 33인의 한 분이신 용성(龍城) 노사는 이 '조수무자'를 투과하신 경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셨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함은
조주 스님의 망령된 분별이요
봄날 동쪽 호수의 물은 푸르른데
백구는 한가로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구나!
狗子無佛性 趙州妄分別
東湖春水綠 白鷗任浮沈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종달 노사는 1984년에 펴낸 자서전(自敍傳)인 『인생의 계단』에서 '조주무자'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나투셨다.

간신히 조주무자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
裳得趙州無字 一生受用不盡
한편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中興祖)인 백은(白隱) 선사와 그 스승인 정수(正受) 노인 사이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선 문답이 있다. 정수 노인이 백은에게 물었다. "조주의 무(無)라는 것은 무엇인가!" 백은이 의기양양하게 "우주에 충만해 있으며 손을 댈래야 댈 수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마자 즉시 정수 노인은 손을 뻗쳐 백은의 코를 잡아 비틀며 "나는 얼마든지 손을 댈 수 있지!" 하며 소리내어 크게 웃고는 "이 토굴 속의 사선(死禪) 중아! 그런 무(無)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며 제자 백은을 다그쳤으며 백은은 이를 큰 깨달음을 얻는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신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