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견문록] 봉녕사 사경반

경을 베껴 쓰면 바로 집중한다

2017-08-01     박선영

“물은 대자비로 흐른 지혜의 물이요, 먹은 깊은 선정의 굳은 먹입니다. 선정의 먹으로 지혜의 물을 갈아서 실상법신의 문자를 옮겨 씁니다.”

사경寫經에 앞서 한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이들은 수원 봉녕사 사경반 불자들이다. 이들은 경전을 따라 쓰며 부처님의 정신을 새기려는 목적으로 여기 모였다. 사경의 공덕은 쓰는 사람뿐 아니라 널리 이웃을 이롭게 하리라며 그들은 합송을 이어갔다. 

“이 경의 말씀은 온누리의 모든 중생을 살펴보아 근기에 맞춰 설법하여 널리 이웃을 이롭게 합니다. 이런 까닭에 제가 지금 경전의 사경을 봉행합니다.”

사진 : 최배문

|    이웃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사경

흰옷을 입은 사경반원들이 개경게, 사경 발원문, 참회문, 시방염불, 사경관념문을 거쳐 죽비에 맞춰 입정을 한다. 마음의 파도가 잔잔해지면 이제 사경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손바닥만 한 벼루에 먹을 갈아 약간의 먹물을 만든다. 먹물을 찍어 농도를 가늠하는 붓은 마치 음식의 간을 보는 예민한 혀와 흡사했다. 화선지의 특성상 묽으면 금세 얼룩강아지의 점처럼 번지고, 물이 적어 뻑뻑하면 선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거나 갈라진다. 그러니 적당한 먹물 농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모본模本 위에 화선지를 올리고, 네 면을 풀로 고정한다. 이때 나중에 책으로 묶을 때를 대비해 왼쪽 면은 일정 넓이를 정해 남겨둬야 한다. 이렇게 기본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인 사경으로 들어간다. 붓을 들고 처음 할 것은 전체 테두리와 행과 행 사이를 구분하는 계선界線을 긋는 것이다. 자를 대고 특수 제작된 유리 막대를 붓 아래 받쳐 두께가 고르게 선을 친다. 

사경이 시작되자 각자의 작업에 몰두한 회원들. 그 사이를 지도법사인 ‘불향지佛香智 전통사경수행원’ 이미화 원장이 다니며 개별지도를 한다. 이곳 사경반의 태동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간다. 봉녕사의 초청으로 사중에서 사경작품 전시회를 한 이미화 원장은 전시를 보고 감동한 불자들과 봉녕사 주지스님의 요청에 따라 12월부터 사경반을 창설,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열정적으로 수행에 관심을 갖던 이 원장은 염불, 절, 참선, 명상 등의 다양한 수행과 불교공부를 하다가 붓펜으로 하는 사경을 접했다. 경전을 외우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법화경』을 14권 썼다. 그러다가 2004년 대구 보현사에서 외길 김경호(한국전통사경연구원장) 선생에게 전통사경을 배운 이래 2007년 대구에 ‘불향지 전통사경수행원’(이하 사경원)을 개설했다. 사경에 관심을 갖는 대구, 경북 지역 불자들의 사랑방 용도로 문을 열었는데, 10년 세월을 거치면서 배출 인원도 5백 명이 넘는 여법한 수행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부산, 울산, 서울에서도 찾아와 붓을 들고 마음을 바라보는 재미에 흠뻑 젖고 간다. 사경원은 화요일, 토요일에 정규반을 운영하고 있다. 

봉녕사 사경반은 매주 수요일 열려 이 원장이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온다. 불교 초심자부터 나이 지긋한 회원들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한 획 한 획 그으며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법사는 멀리서 찾아오는 고단함을 잊는다.

이 원장에게 일반 사경과 전통 사경의 차이점을 물었다. 일반 사경은 책으로 인쇄된 것에 덧쓰는 것이고, 전통 사경은 붓, 먹, 한지 등의 재료와 더불어 경전의 역사적인 기록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직접 묶어내는 것이다. 두 가지 사경법을 다 경험해 본 이 원장은 전통 사경의 최고 장점으로 “바로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사진 : 최배문

|    사경을 하면 삶이 변한다

입정 후 허리를 세우고 붓을 꼿꼿이 드는 순간 바로 몰입이 되며, 마음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점 때문에 수행하기에는 제격이라고 한다. 거기에 자신의 수행으로 책 한 권이 엮어지는 것 또한 성취감을 주며, 이런 성취감 덕에 주변 사람들에게 전법을 하게 된다. 

이 원장은 사경원 회원 중 변화하는 이들을 수없이 봐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 사람은 어머니에게 『금강경』 병풍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며 울산에서 찾아왔던 중년 남성이다. 이 원장은 눈빛이 만만하지 않은 그를 1년간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네 번째 찾아왔을 때,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다. 그로부터 8개월,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사경원을 찾아왔는데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와 싸우는 여러 고비를 겪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내딛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덕에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가장 큰 변화는 눈빛과 피부색이다. 타는 듯하고 불안정하던 눈빛은 온화하게 바뀌었고 검붉었던 피부색도 건강한 빛깔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벌어졌으니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놀라워했다. 극단적인 변화 외에도 가정에서의 문제, 타인과의 갈등 등 살아가면서 소소하게 겪는 일들을 극복해나간 예는 숱하다. 이 원장은 회원들의 고민을 상담하며 자신의 수행경험을 들려주고, 현재 고민에 걸맞은 경전으로 사경 내용을 정해준다. 사경의 또 다른 장점은 다른 수행처럼 개인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 더해 작품으로, 예술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국가의 보물급인 경전을 베껴 쓰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역할을 한다. 

사진 : 최배문


지난 6월 17일부터 7월 30일까지 해인사 성보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불향지 사경원 주최의 전시가 열렸다. ‘사경, 수행, 공덕,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다’라는 주제의 해인사 성보박물관 초청전시에는 이미화 원장의 작품을 비롯해 사경원의 오랜 회원들의 개인작품들이 전시됐다. 이 원장은 그동안 은해사, 동화사, 봉녕사 등지에서 수많은 개인전과 사경원 회원전을 했지만, 이번 전시는 봉녕사 사경반의 합동작품 ‘관세음보살 42수진언’이 내걸렸기 때문에 더 뜻깊다.  

그중 봉녕사 사경반 장경옥 씨는 딸인 김미연 씨와 개인작품을 나란히 출품했다. 장경옥 씨의 ‘보살도’ 옆에 범어로 쓴 김미연 씨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걸렸다. 김미연 씨의 작품은 먹보다 다루기 어려운 경면주사로 쓴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모녀가 나란히 사경을 하게 됐을까?

장경옥 씨는 사경반에서 받아온 모본으로 집에서도 꾸준히 사경을 했다. 그 모습은 본 딸 김미연 씨가 관심을 보였다. 요즘 가장 어려운 계층이라고 일컫는 취업준비생 미연 씨는 공부에 지치고 앞이 안 보이는 미래 때문에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딸이 먼저 사경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장경옥 씨는 반가운 마음에 모본을 받아다 줬다. 어머니의 조언을 받으며 사경을 하던 미연 씨는 제대로 지도를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 원장의 추천대로 미연 씨가 토요일마다 대구에 있는 사경원을 다녔다. 주중에는 취업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연 씨는 첫 책 한 권을 묶을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서울, 대구를 오갔다. 절실했던 것이다. 

사진 : 최배문

|    사경에는 연습이 없다

“그동안 딸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말을 안했어요. 엄마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전에 힘들었던 것들을 얘기해요.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고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대요. 그런데 사경을 하면서 아이가 달라졌어요. 이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웃는답니다. 돈보다 취업보다 더 중요한 ‘행복’을 얻게 됐으니 이게 부처님의 가피죠.”

장경옥 씨는 자신보다 먼저 완성한 딸의 진언집을 부처님 앞에 올리던 날을 떠올린다. 관음재일이 평일이라 직접 오지 못한 딸을 대신하면서 어머니는 딸의 고난이 그대로 느껴져 울음을 참아야 했다. 부처님께는 한없는 감사를 담아 예를 다했다. 그날 저녁 딸에게 부처님께 보여드린 진언집을 다시 돌려줬을 때, 어머니도 딸도 말없이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뒤 도반이 된 모녀는 매일 저녁 일과 후 거실에 놓은 두 개의 책상에 나란히 앉아 사경을 한다. 그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평온할 것만 같다.  

봉녕사 사경반 회원들은 창립부터 해온 이들과 나중에 들어온 이들의 진도가 다르다. 초창기 회원들은 33관음의 모습을, 뒤에 들어온 이들은 42가지 수인手印과 진언이 담긴 것을 그대로 따라 쓴다. 현재 나가는 진도는 사불寫佛을 포함한 사경이다. 사불은 글자가 아닌 부처님과 관련한 그림을 따라 그린다는 점에서 사경의 넓은 개념에 속한다. 

이 원장은 처음 입문한 사람들에게 계선, 그림, 한자, 범어표기 등이 고루 들어있으면서도 단순한 『42수진언집』을 사경하게 한다. 그 다음이 33관음보살도다. 

창립 회원들은 직접 만든 자신의 『42수진언집』을 소장하고 있다. 예부터 내려오는 사경보존 방식으로는 두루마리, 병풍처럼 접는 절첩,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는 선장본 등이 있는데 이곳 회원들은 손쉽고 보관하기 좋은 선장본 방식으로 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천공기를 구비해놓고 이 원장의 시범 후 회원 스스로 책을 맸다. 

이들이 언제 모본 위에 덧쓰는 ‘연습’을 마치고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이 법사는 “사경에는 연습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덧쓰건 베껴 쓰건 모두 사경이며, 본인도 작품을 쓰기에 앞서 모본으로 두어 번 덧써야 오탈자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본 없이 쓰려면 4, 5년이 지나야 한다는 말을 추가했다. 

한 자 한 자 쓰고 불보살의 모형을 따라 그린 낱낱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과정, 그리고 자랑스럽게 부처님 앞에 회향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환희로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