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얻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화두

2017-08-01     박재현
그림 : 이은영

사고무인四顧無人
의발수전衣鉢誰傳
의발수전衣鉢誰傳
사고무인四顧無人

경허(鏡虛, 1846-1912) 선사의 「오도가悟道歌」로 알려져 있는 글귀다. 어려운 한자가 없고, 한문 문리文理를 따지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략하다. 그런데 글귀가 단순하다고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말이 짧으면 문맥을 잡아 해석하기는 더 어렵기 마련이다. 맥락 없이 그냥 툭 던져놓는 말귀가 사람을 가장 난감하게 한다.

경허의 「오도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사고무인은 사고무친四顧無親이나 같은 말이다. 아무리 돌아봐도 주위에 속내를 털어놓거나 맘 놓고 기댈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의발衣鉢은 다들 알다시피 선문禪門의 안쪽에서 정통성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수전誰傳은 대개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랴.”로 읽는 게 맞다는 의견도 있다. 별 차이는 없다. 앞의 것은 변변한 후배가 없는 상황을, 뒤의 것은 이렇다 할 선배가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한 심정으로 읽은 차이뿐이다.

어떻게 읽든 간에 ‘전傳’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는 성성하게 살아있다. 뭔가를 전해주거나 전해 받거나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경허 선사는, 밥그릇과 해진 옷가지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는 상황이 「오도가」로 한탄해야 할 만큼 사무쳤던 것일까. 무려 깨치기까지 한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아는 한, 석가모니 붓다 이래로 역대 선종의 선사들 가운데 누구도, 깨달은 순간에 이런 걱정을 한 인물은 기억에 없다. 선문에서 주고받는 행위 혹은 그와 관련된 표현은 민감하고도 신중한 문제다. 

화두 수행과 관련해서도 자주 등장하는 한국어 표현으로 ‘얻다’ 혹은 ‘받다’가 있다. ‘주다’ 역시 같은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다. 화두를 받는다고 할 때의 그 ‘받다’는 ‘의심받다’, ‘사랑받다’, ‘질문받다’와 같은 피동형 접미사가 아니다. 물건 따위를 받아 가진다(accept, get, take)는 의미에서의 ‘받다’이다. 따라서 화두를 주거나 받는다고 말할 때, 화두는 어떤 물건처럼 여겨진다. 이런 것을 존재화 혹은 존재론적인 은유현상이라고 부른다.

원택 스님의 기억을 빌려 선문에서 스승과 제자가 화두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여기는지 잠시 엿보자. 스님은 중앙일보 지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으로 성철 스님과의 일화를 연재했다. 그중에 일부다.

 다시 간청했다. “큰스님, 불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저는 본디 참선 공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제가 참선할 수 있게 화두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으로 큰스님 얼굴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지금까지 무뚝뚝하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호상虎相의 굵은 주름이 확 펴진다. “니가 참선하고 싶다 했나. 오냐 그래, 그라면 내가 참선하도록 화두를 줄게. 나 따라 오너라.” 성철 스님이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간다.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 절을 세 번 했다. … 성철 스님이 준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들고 낑낑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 “참선한답시고 괜히 큰스님한테 화두 얻어 생고생하는 것 아닌가.”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풋것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호기 있는 젊은 수행자와 그 제자를 노련하게 다루는 산승의 모습이 산수화처럼 그려지는 대목이다. 선문에서는 이렇게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두를 주고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왔다. 그런데 주거나 받는다는 말을 하면서 화두는 어떤 물건처럼 여겨진다. 화두를 주고받는다는 말 때문에, 실재하는 어떤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연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비슷한 사례로 ‘깨닫다’ 혹은 ‘깨친다’는 표현도 있다. 깨침에 해당되는 한자어는 각覺 혹은 오悟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을 얻다’라는 말도 자주 쓴다. ‘깨닫다’와 ‘깨달음을 얻다’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깨닫다’는 자동사형 표현이고 ‘깨달음을 얻다’는 타동사형 표현이다. 이게 별게 아닌 것 같아도 매우 중요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용어보다 문법이 사고방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주체가 먼저 나오느냐 아니면 객체가 먼저 나오느냐에 따라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자동사를 쓰느냐 타동사를 쓰느냐에 따라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파울러(Roger Fowler, 1939~1999)는, 언어는 현실을 창조해내는 사회적 수단(Reality-Creating Social Practice)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언어가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측면, 언어의 구성적(Constitutive) 역할을 강조했다. 세상이 말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세상을 빚어내는 것이다. 문법을 파악하는 시각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불러온다. 자동사는 주어가 행위를 하는 동시에 행위의 결과가 된다. 이에 비해 타동사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타동사는 행위의 대상을 대상화하도록 유도한다. 

자동사형 표현인 ‘깨치다’ 혹은 ‘깨닫다’는 수행자와 깨달음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타동사형 표현인 ‘깨달음을 얻다’는 수행자와 깨달음을 분리한다. ‘얻다’ 형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과정은 곧 화두가 어떤 물건처럼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화두가 서로 주고받는 목적어로 표현됨으로써 수행자의 의식 속에서 화두는 물건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수행자는 화두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다시 물건이나 물질처럼 다루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표현은 한자어 ‘득오得悟’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싶다. 득오를 글자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悟는 목적어이고 득得은 타동사로 기능한다. 그런데 한문에서 득은 뒤에 술어가 오면 영어의 ‘하다’(do) 혹은 ‘할 수 있다’(can)처럼 조동사로 구실 한다. 따라서 득오를 조동사 - 본동사의 관계로 본다면, 득오는 ‘깨달음을 얻다’로 번역하면 안 된다. 그냥 ‘깨닫다’ 혹은 ‘깨치다’로 번역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은 자연스러워 보지만, 득오라는 한자어에서 ‘득’을 버리지 못하고 무리하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도출되었고, 상투적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굳어진 표현은 수행 당사자의 의식 속에서 은유적 사고를 유발한다. 득오라는 한자어의 순서가 바뀐 ‘오득悟得’이라는 표현도 불경에 등장한다. 이것을 두고도 ‘깨달아 얻다’로 번역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한자어 득得을 억지로 살려 번역한 것인데, 이것 역시 우리말 표현으로는 많이 어색하다. 

2006년 겨울에 막 들 무렵이었으니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무렵 나는 경허의 「오도가」를 새롭게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는데 의발을 누가 전한다는 것인가. 의발을 도대체 누가 전한다는 것인가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경허는 그간 선문에서 애지중지해왔던 법통과 법맥의 원천무효를 선언한 것이 된다. 좀 더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나는 혼자서 깨쳤고, 나의 깨침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나에게 의발을 전하겠는 자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번역을 해 놓고도 가당찮은, 주워 담지 못할 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그래서 조금 더 용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두려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세상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한 5년 동안 나는 내내 경허와 혼자 씨름했다. 2006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배운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했다. 겨울이 따뜻해졌으니 온난화라는 것인지, 지구가 온난화되어 겨울이 따뜻해졌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