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고려대장경연구소 종림 스님

아침 공양이 끝나자 종림 스님(74)은 곧바로 깍두기 그릇 옆에 두었던 당뇨약 세 알을 입에 넣었다. 5년 전부터다. 주름진 얼굴과 마른 손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주위에서 ‘노장님’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1년 전 인사동 어느 골목길 밥집에서 만났던 그때보다 더 여위었다. 옆에 있던 중관학당 신상환 박사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몇 달 전까지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놀라서 물으니 동국대학교에 고려대장경 전산화본(DB) 기증 및 활용 협약으로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5일 고려대장경연구소(이사장 종림 스님)는 23년의 전산화 결과물인 ‘고려대장경 데이터베이스(DB)’ 자료를 동국대에 기증했다.

팔만대장경(재조) DB (162,516판), 초조대장경 DB(2,040권, 약 6만 판), 돈황불교문헌 DB(341롤), 화엄석경 DB(13,000여 점)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대장경을 공공재로 생각하고 공공의 활용을 바라며 전산화 사업을 추진해온 스님의 결정이었다. “한계가 온 거지. 전산화를 통해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지. 대장경 전산화는 마무리가 됐고.”

- 작품이라면 어떤 것인가요?

“인터넷상에 가장 맞는 불교를 만들고 싶었지. 관념어 사전이지. 경전이 한 권 있으면, 주제어가 나오고, 인물도 나오고. 다른 경전의 주제와 인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지. 또 하나는 용어집이지. 연기緣機라면, 연기는 어느 경전에 어느 정도로 나오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 수 있지. 같은 용어라도 시대와 경전과 종파에 따라 변화되니까, 이것을 추적하고 싶었어.”

- 연구소가 그것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던 것이군요.

“그렇지. 대장경 전산화를 인지과학과 연결하고 싶었어. 카이스트 교수들과 접촉해도 쉽지 않았어. (연구소가 담당하기에) 프로젝트가 너무 커. 이제는 종단이나 대학에서 할 수밖에 없어.”

- 만약 스님께서 말씀하신 관념어 사전이나 용어집 등이 나온다면 불교학뿐 아니라, 삶에 기반한 불교가 펼쳐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우리 생각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장場이 될 수 있어. 내 생각이 불교의 어디쯤에 있는지, 이것을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 내 생각을 거기에 끼워 넣을 수 있지. 이게 내가 재밌어 하는 부분이야. 인력과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지.”(웃음)

|    나는 나를 사막 한가운데 두었어

스물아홉에 출가했다. 도반들이 열 살쯤 아래였다. 나이 값하기에도 어중간했고, 기존 질서에 매끄럽게 편입하기도 불편한 나이였다. 해인사 강원을 거쳐 제방 선원에서 몇 년을 보냈다. 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 편집실과 도서관장을 거치며 대장경 전산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장경 목록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해인사를 나와 대흥사 선방에서 종묵, 본해, 보윤 등 7~8명의 스님들과 당시로는 파격적인 논강으로 『중론』과 『임제록』을 연찬했고, 매일 2시간씩 농사 울력을 이어나갔다. 기존 선원의 풍토를 개선하려는 다양한 시험이었다. 

- 1년 후 선방을 나왔는데, 그 이유가 “더는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도사’라는 꿈이 있었지. 지금은 쳐다보는 점이 없어졌어. 그러니까 다 밑바닥에서 기고 있어. 그때는 목탁 두드리면서도 ‘선방에 도 닦으러 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 ‘도인道人이 있다면 찾아가봐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버릴 것 다 버리고 출가했는데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야. 그래서 선방에 갔어. 묵언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도 하고 해볼 건 거의 다했지.(웃음) 나는 내 갈등을 해소하려고 갔어. 선방을 나온 것은 내 갈등이 더 이상 내 문제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갈등이 해결은 아니지만, 해소는 된 것 같았지.” 

- 갈등은 뭐였고 어떻게 해소된 것이죠? 

“내가 탑을 똑바로 쌓아도 바닥이 삐딱하면 출렁거렸어. 나는 나를 사막 한가운데 두었어. 동서남북도, 길도 없어. 거기에 나를 둔 것이 편했지. 나를 똑바로 세우기보다 바닥이 평평해지게 되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어디에 갖다놔도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평평해진 것이지. 그 전에는 나를 세우려고 고민하고 갈등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 가도 나를 세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선방을 나왔지. 주변에서는 계속 선방에 있으면 조실도 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아쉬워했지. 나는 수좌 소릴 듣지 못했어. 다른 방법으로 했으니까.”

- 아까 예전 수행자들은 어떤 점을 보면서 정진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종지로 하는 것도 정화 이후인데, 그만큼 종지를 세우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닌데,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져서…. 그런 꿈, 점, 이런 것을 주어야 하는데, 이게 없으면 풀어갈 길이 없을 것 같은데….”  

 -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시나요? 스님 때는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이전에는 불교 논쟁도 불교 내부 논쟁이었지. 지금은 철학, 종교 등이 다 불교 내부에 들어왔고. 이전에는 불교 안에서만 이야기했지. 지금은 테두리가 없어졌어. 기독교나 공산주의 등에도 답을 해야 하고. 전에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지금은 들어올 것이 다 들어왔으니 살아남는 것이 살아남겠지. 물론 그때도 답을 했지만, 그때 답이 지금의 답이 될 수는 없지.”

- 지금은 왜 답을 할 수 없게 됐죠?

“아, 고민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뭐.(웃음)”

서울 광화문에 있는 ‘중앙전산학원’을 출입했다. 80년대 말이었다. 대장경 전산화를 위해 혹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시는 전산이 대부분 계산용이지, 인문학용으로 쓸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90년대 초반 당시 유행했던 비판불교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나조노대학 연구원이었지만 스님은 “1년 동안 놀았다.”고 했다. 당시 일본은 전산으로 한문을 6천 자까지 사용하였다. 이를 눈여겨봤고 한자인식 프로그램을 갖고 해인사로 돌아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해인사 대장경을 하나하나 입력하면서 93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출범시켰다.

|    공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 연구소의 많은 일을 동국대로 넘겼으니, 대중들은 최근 스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궁금해합니다. 

“아직 구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 봐봐. 우리가 세상에 이렇게 떨어졌어. 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데도 우리는 알고 싶어 해. 나는 왜 왔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이런 질문을 해. 흔히 업대로 왔다거나 신의 소명을 받고 왔다고 해.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어 하지. 근데, 실제로는 그게 다 허구야. 진짜.”

- 그것이 허구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렇지. 허구라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하기도 하고. 그게 이념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그게 편하지. 근데 그렇게 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해.”

- 대부분 사람들은 이념과 꿈을 갖고 삽니다.

“그렇게 살면서 결국은 끝에 가면 다 후회하니까. 결국 바로 보는 것을 유예시키는 거지. 공空으로 보면 그런 병폐에서 벗어날 수 있어.”  

- 공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마음을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념이나 신은 나를 이끌어 줘. 공의 길은 내가 가는 길이야. 나를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니까 사람들이 힘들어해. 대신 병폐도 없고, 자유를 줘.(웃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해. 닦여진 길을 가면 얼마나 편해. 따라만 가면 되니까. 그런데 내가 길을 선택하는 것이 힘들어.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 고타마 붓다도 그런 길을 간 것인가요.

“아, 인도는 만신의 땅이지. 그런 곳에서 (고타마 붓다는) 이를 따르지 않고 발버둥쳤어. 그 많은 신들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한 거지.”

- 왜 따르지 않았을까요.

“아, 그거야 가봐야 뻔하니까지.(웃음)”      

- 스님은 『망량의 노래』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어도, 신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 글이 어렵고 생뚱맞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어. (『망량의 노래』 책을 가리키며) 저걸 80년대 중후반에 대부분 정리했는데, 그때 밥값 다했다고 생각했지. 사람이 태어나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힘들 때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어딘지 알고 싶었지. 내가 오고 싶어서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인데, 귀찮게 계속 부딪치고….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어느 한군데 점點을 찍어놓고 매진하는 거지 뭐.”

- 스님께서 몰입했던 그 ‘점’은 무엇인가요?

“공空이지. 나는 그것을 설명해내야 하지. 그 공에 나 자신을 걸고 살아가는 것. 또 하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로 나를 투사시키든지, 아니면 과거의 좋은 시절로 나를 도피시키든지. 뭐, 몇 가지 방법이 있어.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그것을 나는 생각을 했어. 그러면서 진짜 우리가 그려야 할 마지막 점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금은 그렇지.”

- 지금은 뭘 하고 싶으신 것인가요.

“지금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은 나를 공의 입장에 두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고 싶어.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 보이는 것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쳐다보고 해석하고 싶지.” 

- 스님께서는 80년대 이후 계속 세상을 불교로 해석하는 시각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한데, 그전에는 세상을 공으로 보지는 않았어.” 

|    유有의 세계와 초월의 길을 넘어 

- 스님께서 말씀하신 “공의 입장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이 질문을 하자,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 방으로 들어가 노트 한 권을 가져왔다. 노트에는 틈틈이 써내려간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내가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것인데, 여길 한번 봐봐. ‘1에서 시작하지 말고, 0에서 시작하라.’ 나는 이 0을 공으로 해석해. ‘1에서 시작한다면 살아도 죽은 송장이다. 0에서 시작한다면 1도 살고, 0도 산다.’ 봐봐. 왜 이것을 시작으로 하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 둘 이렇게 있는 것으로 조합하고 살아. 우리가 주어진 것, 있는 것으로 우리는 살 수 있을까. 물론 아마도 이를 잘 운영한다면 아마 괜찮은 삶을 살 거야. 그런데 그것은 있는 것으로 사는 거지. 있는 것은 언젠가 벽에 부딪치지. 거기 한계에 부딪치면 사람들이 초월하려고 해. 신적인 것 또는 뭔가를 뛰어넘으려고 한다고. 내가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 조합해서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거지. 물론 일상에서는 살아가. 거기에 한계가 왔을 때 초월을 꿈꿔. 그러면 초월의 길이 있는가? 여기에도 뭔가 헛된 구석이 있어. 허구지. 부처님 당시에 이런 초월은 없었어. 경험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주이지. 불교철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Kalupahana)가 용수(龍樹, Na-ga-rjuna)를 비판한 것 중 하나가 공을 이야기하면서 대승불교로 초월의 문을 열었다고 비판했지. 대승불교가 갖고 있는 신적인 요소를 열었다는 것이야. 공도 잘못하면 초월로 갈 수 있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것 아니면, 경험 이상의 것이니까. 종교적으로 보면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은 훨씬 수월해.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 사람들은 경계에 부딪치면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으로 쉽게 이동합니다. 

“있는 것만 가지고는 세상이 풀리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초월의 길이 있는가? 없어. 있는 것으로 세상을 살기에는 한계가 있고, 초월의 길도 없다. 대신 공과 0에서 바라보고 살아가자는 것이지.”

-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들이 반 개나 한 개 혹은 두 개를 갖고 단체에 들어왔어. 근데 갖고 들어온 만큼 다 불평등이야. 그런데 각 개인이 공의 마음으로 보면 열 개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해. 내 것, 네 것 부딪치면서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지. 만약 내 것, 네 것이 아니라, 공의 마음으로 만나면, (불평등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 공과 공이 만나면 다른 무엇을 만들어낸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병폐가 해소될 수 있을 거야. 또 우리가 초월하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한계가 올 거야. 이념에 매어있을 때는 나를 제거하기도 하고, 남을 무시하기도 해야 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이념과 욕망과 신의 눈으로 봤어. 나는 공으로 보면 지금보다 좋을 것이라고 봐. 그런데 (내가) 얼마나 (공을) 쳐다보고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지 아직 모르지…. 지금까지 논리로 그것을 추구해왔는데, 이제는 마지막 찍을 점을 봤으니 여기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생각하고 있어. 0과 1은 내가 세상을 분류하는 선線이지. 이 분류하는 선을 잡으니, 아, 내가 이제는 세상을 쳐다보고 재단할 수 있겠다, 했지. 민족주의자라면 민족이란 선으로 세상을 보잖아. (신을 믿으면) 초월이라는 선으로 세상을 보기도 하고.” 

- 스님이 세상을 분류하는 선線은 공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지. 봐봐. 우리는 보통 이념에 걸고, 신에 걸고, 하잖아. 그런데 공은 걸 곳이 없어. 논리는 아닌데, 논리로 설명을 해야 해. 합리적으로 말을 해야 하지. 오늘의 말과 언어로 해야지. 논리의 선에 끼어 넣어야 해.”

|    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

고반재考般齋. 스님의 고향인 경남 함양 안의면 기슭에 ‘지혜를 생각하는 집’이란 의미의 ‘책 박물관’이다. 작년 12월 3일 개관했다. 대장경을 연구하면서 모은 고서 등 2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스님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꿈을 그리고 가꾸는 장소”다. 이곳 안의는 한국 최초의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일까. 스님은 젊었을 때 아나키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웃음) 그건 그냥 취향이지. 나는 형식을 싫어해. 젊을 때 공산주의 책을 많이 봤지. 근데 공산주의의 강제된 질서보다 혼란스런 자유가 더 좋았어. 그래서 사회주의에 끌렸고, 그보다 아나키스트가 가지는 태도가 더 좋았어. 아나키스트도 정치적이기보다 인식론적이지. 인식론적 아나키스트에 끌렸어. 정치적 아나키스트는 매일 노선 싸움 해서.” 

- 아나키스트 취향이라고 하셨는데, 스님은 교단에서도 늘 바깥에 있었습니다. 

“나는 불교계 기존 질서에 편입하지 않았어. 수좌도 못 되고, 사판도 못 되고, 학자도 못 되고. 그런 식의 분류에 나는 어디에서 속하지 않아. 그렇게 살았는데, 떠돌았는데…. 기존 질서에 임시로 머물고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는 해주고 또 떠나고. 머물지 않았지. 

- 스님께서는 지금 우리 교단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우리 교단이 지금의 질서를 어차피 강화시키고 개선시킬 것인데, 마지막에 봉착했을 때 탈출구로 어떤 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점이 있는데, 그 점의 한계가 있을 때, 아, 저 점 같으면 내가 가볼 만하다, 거기까지 와야지. 그 전에는 강요할 수 없지. 지금 우리는 불교교리를 자꾸 정리하고 되씹어. 근데 그것은 과거의 문제고 과거의 틀이야. 그것을 지금 살아있는 틀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불교학자보다 불교사상가가 나와야 하지. 이제는 나올 수 있을 거야. 우리 세대는 서구의 사고를 쳐다보기바빴어. 불교인의 입장에서 지금의 문제를 보는 것이지. 그러면 해결책이 나오지. 나는 이제는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봐.”

- 지금은 그런 상황과 조건이 되었다고 보는 것인가요?

“나는 그렇게 봐. 당분간은 제자백가식의 쟁론이 있겠지만, 거기서 정리되고 살아남겠지. 옛날에 선과 정토가 내부에서 가장 큰 갈등이었지. 정토는 신적인, 타력적인 것이 있었는데, 선은 그게 없었지. 그 갈등 요소를 중화시키는 것이 불교 내부의 가장 큰 요소였어. 지금도 그렇고. 근데 내가 볼 때는 지금은 폭이 넓어졌지. 과학과 철학, 유신론 등이 있으니까. 특히 유신론은 우리에게는 없는 개념이 있는데, 직격탄으로 우리에게 날아왔지. 거기에 적응하려고 정토적인 요소가 강화될 수 있어. 그러나 아무리 강화해도 창조적인 유신론에는 미치지 못해. 유신론은 아주 강하지. 그래도 과학이 우리 편을 들어줘. 근데 과학도 완전히 우리 편은 아니야.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곧 나올 것이라고 봐. 지금 내가 볼 때 우리 안에 갇혀 있을 때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교리적인 정리로 지금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오기 어렵지. 지금은 조금 자유스럽게 콱 밀고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지.” 

- 불교의 힘은 거기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유일신적인 도전이 강하지만, 우리에게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힘이 있으니까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아. 유리하지. 근데 효험이 약해. 그것을 이겨내야 해. 다른 수는 없을 걸.”

-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오히려 유일신적인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맞아. 얼마나 편한데. 근데 우린 신 없어도 근사하게 살 수 있어.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보여줘야 할 거야. 그것을 만들어야 해. 과학적 유용성만으로도 안 되고, 유일신 초월성으로도 안 되지. 이 두 개를 해결하면 세상이 좀 보이지 않을까 싶어.”

- 불교 안에서 이를 찾아볼 수 없을까요.

“중론의 논리와 선적인 태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중론의 논리가 공의 논리고, 선적인 태도는 지금 있는 것을 떠나지도 않으면서 초월을 설정하지 않지. 우리는 주적主敵을 유신론과 과학으로 잡아야 해. 이에 대해 우리 내부의 입장을 정하면 사회문제와 세계를 보는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고 봐. 종단 질서가 ‘자, 이제 방향을 바꾸자.’ 하는 입장이 나와야겠지. 지금 아직도 제도를 정비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곧 한계가 올 거지.”

- 스님께 영향을 주었던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인가요?

“뭐, 도반들이 영향을 많이 주었지. 기억 남는 것은 「해인」지 편집하면서 성철 스님 글을 정리했는데, 성철 스님 법문이 아주 좋았어. 깨끗하고 대구가 딱딱 맞았지. 근데 난 성철 스님 안 좋아했어.(웃음) 내가 볼 때는 그 분은 영원한 무언가를 추구하셨지.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 1993년도 이후 24년을 이어오신 것인데, 그 이전까지 보면 30년을 넘게 대장경전산화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나에겐 일이었지. 좋은 시절 다 보냈어.(웃음) 나는 불교가 정보화 사회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으면 했지. 제도라는 틀을 통해서 우리를 바꿀 수 있는데, 또 하나 인식 기반을 바꾸는 게 우리를 바꾸는 진짜 좋은 수단이지. 그게 바뀌면 나오는 것도 달라지지. 그러면 인식 기반이 달라지고, 활동의 폭이 자유롭게 되고. 기존의 관습적인 틀, 책이 갖고 있는 틀, 거기에 갇혀서 개념을 뽑아내기보다, 거기서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게 되지. 그러면 어떤 식의 불교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개인이 노력한 만큼 찾아낼 수 있지. 그동안 아주 재밌게 잘 놀았어.(웃음)”

- 잘 노신 것 치고는 오랜 기간이었습니다.

“음. 맞아. 빨리 일을 털고 내 일을 했으면 (나에게) 좀 더 유리할 수 있었지. 끌려온 것도 있었지. 책임 때문에.”

- 대장경 일이 아니었으면 어떤 것을 하셨을 것인가요?

“나는 공에 대한 것을 정리했을 것 같아. 이젠 논리적인 정리를 하기는 너무 힘들지. 쳐다보고 느낌을 말하는 정도지. 일찍 했으면 전체적인 틀을 정리하기 위해 욕심을 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