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양산 통도사 달마도

그런 달마는 없다

2017-08-01     강호진
사진 : 최배문

늦깎이로 불교철학을 공부하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첫째로 공부는 젊을 때 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공부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가 다 있더라도 학문적 재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 재능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 즉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정답을 잘 찾아내는 능력과는 무관하다. 철학에 있어 학문적 능력이란 세상을 끊임없이 삐딱하게 바라보는 눈, 그러니까 주어진 텍스트와 세간의 상식을 매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대면하는 활발발活潑潑한 정신을 의미한다. 불교철학을 하는 데 학문적 결기가 중한 이유는 불심佛心과 학문 사이에서 갈등하다 주저앉는 이들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불전에 기록된 모든 것이 진리라 믿는 호교론적 입장에선 불교철학이란 말이 불편할 수도 있다. 경전이나 어록에 대한 지고지순한 신심信心이야말로 불교학의 요체인데, 그 텍스트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주된 업으로 삼는 철학이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다.

불교계에서 불교‘철학’이란 말보단 불교‘교학’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자체가 비판적 시각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과 세상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집착을 해체해버리는 비판적 시선이야말로 불교의 출발점이 아니던가. 그 시선은 얄팍한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2,600년의 불교사상사란 불교로 불교를 비판한 제 살 깎아 먹기의 기록이다. 긴 세월 동안 불교가 살아남은 비결은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해 의심과 긴장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불교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의한 주류와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붓다 이래 불교사상사를 수놓은 수다한 싸움들 가운데 가장 과격하고 치열했던 싸움판을 하나 꼽으라면 중국의 선불교를 앞에 세울 것이다. 물론 ‘제2의 붓다’나 ‘보살’이란 별칭을 부여받은 용수(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도 만만치 않다. 용수의 저작을 읽다보면 광활한 전장을 혈혈단신으로 누비며 적을 닥치는 대로 베어나가는 무장의 칼춤이 보인다.

그러나 천하의 용수조차도 “모든 희론을 적멸하는 상서로운 연기를 가르쳐주신 붓다에게 예경합니다.”라는 문구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귀의처가 붓다임을 밝힌 데 반해, 선불교의 선사들, 특히 남종선 계열의 조사들은 불교의 근본부터 부정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그들은 교주인 붓다를 똥 막대기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붓다의 말씀을 담은 경전은 고름을 닦아낸 종이라고 일축해버렸다. 영원한 고향, 붓다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백척간두에 세웠다.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처럼 “오늘만 사는 놈”을 이길 순 없다. 오늘만 사는 놈, 그것이 선불교가 지닌 괴력이자 매력이다. 

선불교의 도도한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보리달마菩提達磨라는 발원지와 만나게 된다. 불자치고 그의 초상 하나 집에 걸어놓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니 설명을 더하는 것은 덧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달마에 관한 신화적 거품을 걷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달마에 관한 수많은 기록 가운데 달마와 동시대에 쓰인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달마는 6세기 무렵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낙양에서 활동한 페르시아 출신의 승려이다. 이게 전부다. 향지국 왕자 출신인 달마가 갈댓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왔고, 양무제를 만나고, 9년간 소림굴에서 면벽좌선을 하고, 소림무술을 창시하고, 죽은 후 부활해 신발 한 짝을 메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후대에 가공된 이야기다.

심지어 일본에는 달마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와 불교를 진흥한 쇼토쿠(聖德) 태자와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낙양가람기』에서 밝힌 달마의 나이는 150살이다. 이쯤 되면 달마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달마의 핵심 가르침이 담긴 『이입사행론』과 돈황본 어록들을 증좌 삼아 달마가 실존했다고 확고히 믿는 이들도 있고, 달마의 어록들은 단지 이름을 가탁假託한 것이라 판단해 말을 아끼는 부류도 있다. 달마의 실존 여부보다 긴요한 것은 중국의 선불교가 달마라는 인물을 자종自宗의 초조初祖로 내세워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사진 : 최배문

  
그림을 보기 위해 통도사를 찾았을 땐 반월삼성교半月三星橋 주변의 연등이 환히 밝혀진 저녁 무렵이었다.

통도사의 저녁 풍경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컴컴한 대웅전에 촛불이 켜지면 수없이 밟히고 닦여 반짝이는 나무 바닥은 흔들리는 촛불을 물결처럼 반사한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승려가 나지막한 예불을 시작하면 사리탑을 향해 낸 작은 창으로 검푸른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세상의 사찰들이 흠모할 만한 전범典範으로서 품격을 갖춘 통도사는 10여 년 전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번 찾았던 절이다.

그때 응진전 외벽에 그려진 달마도를 처음 보았다. 통도사의 달마도는 첫인상부터 강렬하다. 번잡한 구도 속에서도 한눈에 쑥 들어오는 것은 달마의 얼굴이다. 안광이 터져 나오는 듯한 커다란 눈이라든지 제멋대로 뻗치고 말린 호기로운 수염, 이역에서 온 승려임을 증명하는 곱슬한 머리카락에 눈길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그림 속 다른 풍경은 사라져버린다. 달마의 머리 위로 소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맞은편에 한 승려가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나중 일이다. 달마 앞에 선 자그마한 승려를 찬찬히 살피다 보면 통도사 달마도가 품은 기묘한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사진 : 최배문

벽화로 그려지는 달마 관련 소재는 대개 세 가지인데, 혜가가 달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팔을 잘라 법을 구하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달마가 갈대를 꺾어 바다를 건너는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 신발 한 짝을 꿴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걸어가는 척리서귀도隻履西歸圖이다. 이 가운데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혜가단비도다. 그런데 통도사 달마벽화에서 혜가로 추정되는 이의 팔은 멀쩡하다.

온전하다 못해 경전經典까지 양손에 쥐고 있다. 달마가 교학승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전승을 고려하면 달마 앞에 선 인물이 혜가가 아닌 달마와 대적하러 온 승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달마가 앞으로 내밀고 있는 발우는 선가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함)의 징표로 쓰이는 것이니 그가 혜가임이 분명하다. 경전을 들고 선 제자에게 달마가 혼을 내기는커녕 법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우리는 불교를 잘 모르는 이가 제멋대로 그린 그림에 속아 괜한 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실은 통도사 달마도야말로 불교를 잘 아는 화사가 그린 벽화이다. 화사는 『속고승전』에서 달마가 혜가에게 자신의 선법禪法을 전하며 『능가경』을 넘겨주었다는 대목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후대 선종의 계보에 따르면 달마는 모든 교학을 폐기하고 불립문자의 기치를 최초로 드높인 이여야만 한다.

그런데 달마는 『능가경』이야말로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담고 있는 경전이라며 혜가에게 넘겨주었다. 이 모순에 대해 달마의 경전 전수는 단지 방편이었다고 변명하며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진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은 종교나 정치의 영역이지 학문의 영역은 아니다. 

사진 : 최배문

복잡하다면 복잡한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의외로 간단하다. 중국 선종의 초조가 달마라는 기록이 불변의 진리라는 집착만 버리면 되는 것이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심법을 지니고 중국에 전해주러 왔다는 달마는 선종의 정통성을 부여해주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고, 달마의 벽관壁觀이나 이입사행二入四行의 선법 또한 조사선의 사상적 흐름과 직접 연결 짓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해석에 ‘그럴 수도 있겠군.’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교론적 입장에서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겐 하나라도 무너지면 전체가 다 무너진다는 두려움이 있다. 선종의 초조에서 달마가 이탈하는 순간 붓다의 법을 이어받은 삽삼(卅三, 33)조사라는 전등법맥 또한 무너질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달마다라선경』과 『부법장인연전』에 나타난 조사들의 들쑥날쑥한 숫자와 명단은 남종선이 확정한 33인의 전등법맥이 진리가 아닌 종파의 자의적 선택이었음을 드러낸다.

남종선이 그토록 경멸했던 북종선에서 먼저 초조를 삼은 달마를 뺏어와 자신들의 초조로 정했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달마라는 거대한 상징자본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고, 남종선이 역사의 승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달마는 없다. 모든 경전을 폐하는 선법을 전하고, 독약으로 죽었다가 예수처럼 다시 살아난 그런 달마는 없다. 그림을 걸어놓으면 복을 주고, 재앙을 소멸케 하는 그런 달마는 없다.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모른다(不識).”라고 답하는 달마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달마가 선종의 초조로서 지니는 유일한 의미일 것이다. 설령 선종의 거룩한 계보나 달마의 신이한 행적이 모두 꾸며낸 것이라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선불교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 선불교의 신화를 비판하는 이 글을 쓰도록 이끈 것이 바로 선불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