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로서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서예가 석강 이윤용

2007-09-15     관리자


"글쎄요. 그것이 무슨 인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스님의 모습을 뵙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특히 이런 초여름날 풀을 빳빳하게 먹인 승복을 입고 하얀 고무신에 밀짚모자를 쓴 스님의 모습은 정말 가슴을 설레게 해요. 스님께서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곤 하지요."
중진 서예가 석강 이윤용(石岡 李潤鏞 대전광역시 서구 내동)선생. 올해 나이가 쉰여섯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우지 않는다. 원래 미인형이기도 하지만 단아하면서도 청아한 모습이 많아 봐야 40초반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한국인 여인상이다. 그 모습이 한 생을 잘 살아온 인생작품인 듯 아름답다.
올해 20년째 서예를 하고 있는 석강 선생은 일중 김충현 선생과 초정 권창윤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서울과 대전을 오르내리며 해온 공부다. 그리고 지금은 홍익대학교에 계신 홍석창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운지는 7년째가 된다.
그러나 그가 붓을 든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대대로 문인의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때문이었다. 특히 친정 어머니는 마치 신사임당을 연상케 하는 그런 분이셨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지만 한 치의 흐뜨러짐없이 칠 남매를 반듯하게 키우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책과 붓을 늘 가까이 하셨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실 때에도 어머니는 붓글씨로 정성들여 써서 보내시곤 하셨다. 그리고 시집가는 딸 혼서지도 당신이 직접 쓰시어 두루마리하여 함에 넣어주신 분이셨다.

칠 남매 중 장녀였던 석강 선생은 누구보다도 이런 어머니를 좋아하고 존경하며 따랐다. 그런데 20년 전 어느날 어머니는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오빠집 고추장을 담아주시며 "에미야 내일은 너희 고추장 담아주마." 하시던 어머니였다.
세상이 허무했다. 몇 날 몇 일을 눈물을 흘리며 보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떠난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예였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며 최선을 다하라는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대로 열심히 공부한 덕에 국전에도 몇 번의 입선을 했고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1987년에는 국전초대작가가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여성으로서는 넘기 어려운 성벽을 넘은 것이다.
"그동안 여러번의 좌절도 있었습니다. 괜히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따뜻한 배려로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요. 저희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신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제가 서예를 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누구보다도 좋아하며 도와주셨지요."
사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서예를 하는 남편은 그가 하는 일을 좋아하며, 누구보다도 정확한 평을 해주는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지금은 큰댁에 가 계신 아흔일곱이 되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두 자녀의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도 자신의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잘 챙겼다. 특히 남편의 내조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하였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 생각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가정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칫 여성의 사회참여로 인해 자녀교육에 소홀할 수도 있고 특히 남편의 기를 꺾기도 쉬운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굴곡과 좌절이 많겠습니까. 남편을 믿으며 기를 북돋아주는 일을 아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가정의 평화에서 사회의 평화도 있는 것이고 국가 세계의 평화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면 한 여성으로서의 아내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시댁의 영향으로 시집와서부터 시어머님을 따라 복전암에 다녔던 석강 선생은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말씀과 특히 선시와 오도송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자연 자신이 쓰는 붓글씨에도 이러한 내용을 주로 담게 된다. 선시와 오도송을 읽다 보면 자연 탄복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은 명정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고.
그래서인지 석강 선생의 글씨는 그의 외모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모습처럼 여린 여인의 글씨체가 아니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맞을까. 그의 호와 이름이 그렇듯 곧고 굳으면서도 힘찬 대장부의 글씨체다.
석강 선생은 3년 전부터는 유성 성현사 주지이신 만성 스님의 청으로 매주 성현사에 나가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성현사에 다니는 보살님들과 몇 분의 비구니스님들이 함께 공부를 하고 계시다.
"많은 분들이 서예를 했으면 좋겠어요. 서예를 하다보면 우선 마음공부가 되고, 아무래도 글씨를 쓰다보면 좋은 책, 좋은 귀절을 가까이 할 수 있어 좋아요. 자녀들 보기에도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이 좋을테고요.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일이 있다는 것이 좋지요."
국전초대작가가 된 후 그는 한때 서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실에는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스님들이 많이 오셨다. 서실 앞을 지나며 들르시는 스님들도 많았다.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는 그였지만 스님들만 만나면 말이 많아졌다. 스님들을 만나면 편하고 즐거웠다. 어린 아이처럼 꾸밈없이 천진스러우신 스님들이 그는 좋았다. 성현사 주지스님도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 가정일이 아무래도 소홀해지는 것같아 3년 후 문을 닫긴 했지만 그때 많은 스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천수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독경하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원래 친정 어머님의 영향으로 천성이 낙천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모든 일에 너그러워졌다. 이치를 따져보고 상대편 입장을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누가 밉다거나 싫은 감정도 없다. 글쎄 그것이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한다.
" 저는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잘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잘해 드리는 것도 없는데도 늘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던 것 같아요. 전생에 무슨 복인지는 모르지만 특히 스님들께서 저를 각별하게 생각해주실 때에는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께서도 제가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보시며 무척 좋아하세요. 그리고 성현사 주지스님께서는 늘 불교 책을 사다주시며 저를 공부시켜주시고요. 최소한 하루에 한번쯤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모두들 열심히 살고들 있지만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마치 죽음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요. 이만큼 나이를 먹고 돌이켜 보건대 부처님 말씀은 단 한 말씀도 틀린 바가 없어요. 많은 분들이 특별한 욕심없이 서예공부를 해서 부처님 말씀을 사경해 우리의 이웃과 자녀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는 7월에 결혼시킬 큰며느리감에게 보낼 혼수에는 자신이 매일 새벽 독경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사경한 두루마리도 들어있다. 한지 만드는 영담 스님께 특별히 구한 한지에 정성들여 쓴 사경본이 참으로 좋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사경에 대해 좀더 공부를 하여 여법하게 사경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신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