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 포도나무와 개

2017-07-04     심재관

포도나무

어느 날 비구들은 야차(Yaks.a)에게서 선물 한 꾸러미를 받았다. 야차가 준 것은 분명 과일이긴 했지만 처음 보는 것이라 어떻게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스승에게 돌아가 물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북쪽지방에서 나는 포도葡萄라는 걸세. 양이 많으니 드시고 남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먹도록 합시다. 일단 그것을 으깨서 즙을 내고 그 즙을 끓이시게. 끓일 때는 절대 푹 끓이지 말고 약한 불로 슬쩍 익힌 다음 항아리에 담아 놓으면 나중에 요긴하게 드실 수 있겠네.” 

이 풍경은 실제로 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에 그려지고 있는데, 포도를 낯선 과일로 그리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더 흥미롭다. 이 포도즙은 사실 포도주가 아닌가. 

여기서 북쪽지방이란 필시 인도의 북서부 또는 간다라 지역이나 그 인근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포도를 길렀고 포도즙을 이용한 음료나 와인을 만들었던 증거들이 보인다. 이러한 풍습은 그리스인들이 간다라 지역으로 들어오기 훨씬 오래전에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유행했던 포도주 축제는 아마도 불교 이전에 존재했었던 지방의 토착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간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이 축제를 받아들여 대중과의 친밀도를 꾀했을 것이다. 축제를 감독하거나 또는 필요한 설비들을 보관해주면서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 승려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파키스탄의 고대 사원지 탁트이바히Takht-i-Bāhī 인근에서 특별한 발우鉢盂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 발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따르면 그것은 술을 마시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스님에게 술을 보시했음을 적고 있다. 물론 이때의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알코올 성분이 있는 포도주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포도 거르는 체가 승려 사이에 오갔던 단서도 있다. 이것은 술 빚는 일이 승단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일어났다는 단서가 된다.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에 보이는 스바가타 스님의 이야기는 이러한 정황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코삼비 왕국은 사악한 악룡 때문에 심한 가뭄으로 기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스바가타 스님은 가뭄을 몰고 왔던 악룡을 물리쳤고 사람들은 가뭄을 물리친 스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비구 5백 명을 초대해서 음식을 공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술을 물로 착각하고 올려놓았고 스바가타 스님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 술을 잔뜩 들이키게 된다.   
이 포도주를 먹은 스바가타는 스승께서 설법하던 장소로 돌아왔지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를 하고 만다. 설법중인 스승의 법당 안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분율四分律이나 오분율五分律 등에서는 이 장면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스바가타 스님은 신도가 공양 올린 술과 고기를 먹고 법복과 발우에 다 토해낸 후 의식을 잃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천안통으로 이 광경을 보게 된 스승께서는 아난과 함께 스바가타를 찾아서 우물가로 데리고 간 후 그를 깨끗이 씻기고 해먹에 뉘여 재우려는데, 취기가 오른 스바가타가 스승을 발로 걷어차게 된다. 이에 스승은 비구들을 소집하여 금주를 명하게 된다.

산치탑에 조각된 포도넝쿨

  

이 장면이 보여주듯이, 술에 대한 초기 불교의 유연한 태도는 부처님 당시에도 존재했으며 마침내 경전 속에는 술에 대한 금지가 제정된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부처님 당시 술이 처음부터 승단내부에서 강하게 부정되었을 것이란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불음주不飮酒의 규정이 생겨난 것은 다른 조항들처럼 어떤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술을 먹었던 어떤 제자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처음부터 당시 사회의 음주문화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스승께서는 처음부터 비구들을 향해 술을 먹지 말라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금지조항은 처음부터 없었을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 때때로 신자들은 건강을 기원하며 비구들에게 포도주를 선물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스승께서는 포도즙을 내어 진흙항아리에 보관했다가 한동안 묵힌 다음 먹을 것을 권했으니 이것은 발효된 단맛의 포도주가 아니겠는가. 

 

인도에서 개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동물이다. 최근에야 애완견으로 키우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의 개는 주인이 없는 들개가 대부분이다. 낮에는 나무 밑이나 도로 위에 누워서 한없이 잠을 자다가도 밤이면 야수의 본성을 드러낸다. 인도에서 개는 마치 불가촉천민처럼 취급된다. 많은 동물들이 인도인들의 성스러운 제사에 초대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동물만큼은 예외다. 개가 더럽다는 인식 때문인데, 순수와 오염이라는 관념의 잣대로 계급사회의 관계망을 저울질했던 고대 사회의 습성 때문이다. 집을 지키거나 사냥을 하는 개의 모습이 인도 내에서 아주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인간에게 친숙했던 개의 자리는 몽구스가 대신하게 된다. 

그렇지만 개에 대한 이런 관념이 인도사회에 정착하기 이전, 인도의 개는 훨씬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 인도의 개는 인간들에게 길들여지고 더 충직한 동물이었다. 덩치가 클 뿐만 아니라 집을 지키고 사냥을 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냥견은 주로 왕과 귀족들이 길렀고 때때로 사자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용맹했다. 이런 인도 사냥견의 특징 때문에 부처님 당시 근동의 국가들은 인도에서 개를 수입해 기르곤 했다. 

페르시아왕은 인도에서 수입한 개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특별히 지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 북서부 일부를 탈취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그 지방의 토호세력에게서 특이한 전리품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인도의 사냥개 150여 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은 당시 개와 인간의 관계가 신하와 왕의 관계처럼 각별했으며, 결코 현재와 같지는 않았던 것을 말해준다.         

다만, 그 이후 어느 시기를 거치면서 개가 인간에게 보여주었던 충성과 헌신은 노예근성과 같은 어떤 것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마도 개와 함께 사냥을 즐겨했던 왕이나 귀족들의 스포츠가 고전 종교들의 불살생(ahim.sa) 이념과 함께 사그라들면서 개의 역할은 인간사회에서 크게 위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무관심으로 인도의 옛날 사냥개 품종은 거의 멸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길들여질 필요가 없는 동물은 점차 방치되면서 더러운 동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인도 고전에서 ‘개 같다’는 말은 이 말이 한국에서 갖는 어감과 거의 동일하다. 더럽고 불결하거나 비열하다는 표현이다.   

부처님을 향해 짖는 흰 개. 또데야의 일화를 조각한 것이다. 2세기경.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 살았던 개의 위상이 이 정도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원 전후에 등장한 자타카 문헌에서 개는 여전히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관계 속에게 헌신적인 믿음과 사랑을 주고받는 동물로 자주 그려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스승께서 한 젊은 바라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바라문은 바로 그런 애완견을 집에서 키우고 있었다. 개를 끔찍이 사랑했던 바라문은 마치 자신의 자식과 같이 개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고 방 안으로 들여 편안한 침실을 제공했다. 부처님이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그 바라문은 집을 비운 채 흰색의 애완견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스승께서는 이 개 때문에 욕을 보셨던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서자 개가 끝없이 짖기 시작했다. 개가 짖는 것을 계속 지켜보던 스승은 그가 얼마 전에 죽었던 왕실의 바라문이었던 또데야Todeyya의 환생임을 알아차렸다. 또데야는 생전에 왕실에서 점성술사로 일하면서 많은 재산을 벌어들였지만 가난한 자를 위해 보시를 하거나 다른 수행자들에게 덕을 베풀지 않았다. 게걸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러웠던 또데야는 스승이나 비구들에게 보시를 행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이교도라고 생각해 스승의 가르침까지 조롱하면서 무시했던 적도 있었다. 스승은 그가 전생의 자기 집에 자식의 애완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개가 무섭게 짖어대자 스승은 그에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나에게 짖는다면 아비지옥에 갈 수도 있단다.” 그 말에 죄를 깨우친 개는 곧장 방에서 뛰어나와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아들은 외출에서 돌아온 뒤 개가 아궁이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사연을 집안사람들에게 듣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애견이 아버지의 환생이며,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은 믿기가 힘들었으며 마음 또한 불쾌했다. 아버지는 위대한 바라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범천의 세계에 환생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곧장 스승에게 찾아와 사실을 따져 물었다. 스승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재산을 어디에 보관했는지 말하지 않고 죽지 않았는가? 그 개에게 우유죽을 주고 자신이 어디에 재산을 숨겼는지 찾아달라고 말해보시게. 그러면 의문이 풀릴 걸세.” 아들은 스승이 말한 바대로 개에게 우유죽을 주고 아버지의 유산을 찾아달라고 말하자, 개는 아궁이에서 나와 곧장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거기서 아들은 아버지가 남겼던 유산을 다시 찾았다. 그가 찾은 것은 유산만이 아니었다. 스승에 대한 믿음과 존경도 함께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스승의 일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간다라 조각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옛날에도 무섭게 짖는 개는 스승에게도 위협적이었을까.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금강대학교 HK 연구교수, 상지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동국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