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살행론]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게 하소서

2017-07-04     재마 스님
그림 : 재마 스님

 

聞  -  행보리심
중생이라는 병든 자가 있는 한 그 병이 모두 치유될 때까지 그들을 위해 약과 의사와 간호자가 되어 함께 하게 하소서.(3:8) 저의 이 몸으로 자타 모두에 대해 해악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하리니, 언제 누구라도 저를 만날 때마다 이익을 얻게 하소서.(3:15~16)

 


중생은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중생들의 모든 고통은 탐진치 때문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 진정한 행복인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러한 중생의 병을 낫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보리심과 보리행 수행입니다. 지난달까지 살펴보았던 불보살님들께 올리는 예경과 공양, 악업에 대한 참회 등의 공덕은 모든 중생의 온갖 고통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 공덕으로 쌓은 선업의 목적은 일체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한 것으로 보리심 수행을 위한 기초인 셈입니다.

보리심은 “중생의 죽음을 없애는 불사의 감로, 중생의 가난을 없애는 다함 없는 보물의 곳간, 이 세상의 병을 없애는 최고의 영약, 윤회의 길을 헤매는 중생이 쉴 수 있는 나무, 일체중생이 악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널목, 번뇌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달, 중생의 무명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걷어내는 태양, 정법의 정수”로, “지고의 안락인 행복에 머물게 하고 큰 만족을 주는 것(3:29~33)”입니다.

그러므로 원願보리심은 죽음, 가난, 병, 윤회, 악도, 번뇌, 무명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최고의 안락과 행복과 만족을 보장해주는 ‘여행자 보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행行보리심은 매일, 매 순간 말과 행동으로 일체 존재들의 복지에 보탬과 유익이 되게 납입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행보리심은 일체중생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내가 붓다를 이루겠다는 원보리심 수행을 닦은 후, 그 원願을 실현하는 길(道)입니다.

원願보리심은 중생들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제거하기 위한 비와 물과 스스로 음식이 되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보물의 창고가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어 항상 곁에 있겠다(3:9~10)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행行보리심은 재물뿐만 아니라 몸과 과거·현재·미래에 수행한 모든 선한 공덕을 일체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아낌없이 다 주겠다(3:11)는 결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생을 마치고 저세상으로 갈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인들에게 주고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샨티데바 스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 죽을 때 말고 지금 이곳에서 필요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는” 바라밀 수행을 권합니다. 주는 수행은 열반에 도달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며(3:12), 중생들이 요구하는 무엇이든 주는, ‘해악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하는’(3:15) 것이 ‘행行보리심’입니다.

‘주는 수행’은 가슴과 마음을 열어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집착을 잘라내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티베트의 큰 스승이면서 밀라레빠의 수제자인 감뽀빠(Gampopa, 1074-1153)는 『해탈장엄론』에서 보시바라밀 수행은 우리의 편협함과 인색함, 애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투와 교만을 없애고 조화를 실현하는 수행법이라고 가르칩니다.

보리행은 보호자가 필요한 이에게는 보호자가, 길 떠나는 이들에게는 안내자가, 강을 건너려는 이들에게는 배와 뗏목, 다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또 의지할 곳을 구하는 이에게는 의지처가, 빛을 찾는 이에게는 등불이, 쉼터를 구하는 이에겐 쉼터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도우미가 되는 것(3:18~19)입니다. 보리행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 조직에서 왕따나 은따 등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과 위험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그들에 맞게 돕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여의수如意樹, 여의우如意牛, 풍요의 보배병, 성취의 진언과 영험한 약(3:20)의 보리행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나눔은 부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아주 적은 것들을 가졌다 하더라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냥 주는 것이 보리행자입니다. 불안과 경쟁이 우리 삶의 뿌리가 된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보리행이 더욱 필요합니다. 미래를 위해 모아둔 우리의 통장들을 조금씩만 헐고, 냉장고의 공간을 조금씩만 늘리고 비울 수 있다면 이 땅에서 식사권을 포기하는 굶주린 이들에게 뗏목과 다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밖에도 보리행은 대지와 그 밖의 원소들이 되며, 허공처럼 무수한 중생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 생존의 바탕이 된다(3:21)고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의 능력도 다양한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어떤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과 타인의 필요가 서로 공명한다면 나눌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눔을 허공 끝이 다하도록, 항상, 모든 중생이 열반을 얻을 때까지(3:22) 반복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보리행 수행입니다. 보리행 수행은 몸과 마음의 어느 것 하나라도 나의 것으로 남겨놓지 않습니다. 언제 누구라도 만날 때마다 이익을 얻도록(3:15) 모두를 바칩니다.

우리 자신들이 원하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나누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목숨이 위협을 당할 때도 이미 일체중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다른 이를 시켜 해를 가하거나 모욕과 조롱을 하더라도(3:17) 말입니다. 악의로 조롱과 경멸, 장난을 치는 등의 수모를 겪더라도 자신을 아끼지 말고 내어주라고 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경험이 깨달음을 위한 인연이 되기를(3:17) 바라는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역사적, 현실적으로 악업惡業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의 중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가끔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악업에 노출될 경우,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가르침들이 우리들에게 유용하게 잘 적용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미리 공격하거나, 정당방어로 행하는 폭력에 더 익숙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라면 악업과 조롱에도 어떠한 저항도 없이 기꺼이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샨티데바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상대자가 악업을 계속 짓도록 조작하거나 방관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가 가득한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폭력과 악업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자칫 폭력에 거름을 주어 또 다른 해나 폭력을 배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직시하여 지금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는 강력한 수행이 그냥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성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또는 믿는 마음이 생겼을 때, 깨어있음이 필요합니다. 이를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린다면 그 자체로 이익을 성취하는 원인(3:16)이 됩니다. 

샨티데바 스님은 눈먼 이가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것처럼 희귀한 일이 우리에게 귀중한 보리심이 생기는 것(3:28)이라고 했습니다. 보리심이 생겨난 이는 부처님의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 자손(3:26)입니다. 그래서 이 가문에 누累가 되지 않는 행동을 서원합니다. 부처님의 고귀한 가문에 어울리는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의 필요에 얼마나 민감하게 경청하고 있을까요? 인간 존재의 큰 의미를 찾고 삶의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또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피안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다리나 뗏목, 배가 된다면, 지금 당장 누구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에 아픈 약자와 소외된 이들, 빈곤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남아있는 인색함과 애착, 질투와 교만을 없애기 위해 무엇인가를 주는 수행을 하면서 7월을 보낸다면 우리는 분명 고귀한 가문의 자손일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모든 중생을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으로 초대하는 기쁨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재마 스님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불교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움직이는 법당, 춤추는 절을 꿈꾸며, 소마명상여행을 이끌고 있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 ‘마음비추기’ 피정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완화의료(암)병동에서 매주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위한 영적 돌봄 봉사를 하고 있다. 박사논문으로 「사무량심의 가치 재발견과 체화프로그램 개발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