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양산 신흥사 관음삼존도

관음 그리고 페미니즘

2017-07-04     강호진
양산 신흥사 관음삼존도. 사진 : 최배문

사람마다 내용이 아닌 제목 때문에 잊히지 않는 책이 한두 권쯤은 있을 것이다.

내겐 2001년 국내에 번역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란 책 제목이 기억에 남는다. 살다 보면 항상 묻고 싶지만 체면 때문에 차마 묻지 못하는 질문들이 있기 마련이다. 비자발적 교육이나 워크숍에 참여해본 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강의의 내용이나 강사의 자질 같은 것이 아니다. 밥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 중간에 몇 번을 쉬는지, 강의를 얼마나 빨리 마쳐줄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가장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마경』에 등장하는 붓다의 제자 사리불(사리푸트라)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는 고담준론의 법담法談이 오가는 와중에도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이 많은 보살들이 모였는데 대체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유마 거사는 수행자가 음식 생각이나 한다며 사리불을 타박하지만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말하는 유마 거사보다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사리불의 인간적 모습이야말로 더 핍진逼眞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속으론 궁금하지만 선뜻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은 불교에도 있다. 초심자 가운데는 연기緣起나 공성空性의 의미보다는 승려들은 몇 시에 자는지, 뭘 먹고 사는지, 왜 출가했는지 같은 것들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다. 내게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의문이 있었는데 관세음보살의 성별에 관한 문제였다. 불전의 관세음보살은 외모나 복색으로 보면 분명 여성인데 희한하게도 수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유기’와 같은 중국영화에 등장하는 관음보살은 늘 여성 연기자가 맡는데 티베트 불교에서는 관음을 남성으로 대우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묻기도 어려웠다. 흐릿한 대답 뒤에 뒤따르는 ‘대승보살은 무분별의 공성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존재인데, 기껏 보살의 성별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나 보군’ 같은 점잖은 훈계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양산 신흥사 관음삼존도. 사진 : 최배문


관음보살이 최초로 등장하는 경전은 『비화경悲華經』인데, 무념쟁왕의 태자가 승가에 공양한 공덕으로 보장여래에게 내세에는 관세음보살이 되리란 수기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태자가 다음 생에 어떤 성별로 태어나 관세음보살이 되는지에 관해선 알 도리가 없다.

대승의 주요경전인 『관무량수경』이나 『화엄경』, 『반야심경』 등에도 관음보살이 등장하지만 성별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관음보살이 제도의 방편으로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을 가리지 않고 중생의 근기에 맞춰 33가지 모습으로 응현應現한다는 내용이 등장할 뿐이다.

불자들에게 친숙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경우, 관세음보살을 힌두 신인 시바나 비슈누의 별칭에 빗대어 부르고 있는데, 이 두 신은 여신을 배우자로 둔 엄연한 남신들이다. 그렇다면 관음이 우리에게 여성의 이미지로 널리 각인된 결정적 배후는 중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전국사찰에 관음보살도 벽화가 여럿 있음에도 굳이 양산 신흥사를 찾은 이유는 가장 중국적인 관음, 다시 말해 여성 관음보살의 근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산 신흥사 관음삼존도. 사진 : 최배문

양산 신흥사 대광전大光殿 관음삼존도는 불단 뒤에 세워진 벽(후불벽)의 뒷면에 그려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세 명의 관음보살이 한 화면 속에 함께 등장한다. 일반적 삼존도三尊圖 형식의 불화는 중앙에 부처가 앉아 있고 양 옆에서 두 보살이 서서 협시夾侍하는 구도를 취하는데, 부처가 등장하지 않고 관음보살만으로 삼존도 형식을 구현한 그림은 현재로선 신흥사 관음삼존도가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신흥사 관음삼존도는 벽화로선 드물게도 검은색 바탕에 흰색 선묘로 간결하게 그려졌다.

화사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빛이 닿지 않는 후불벽 뒤편에 있어 보면 자명해진다.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듯, 화려한 색감이 의미가 없어지는 어두운 공간에서 불현듯 하얗게 육박해오는 거대한 관음보살의 형상이야말로 종교적 엄숙미와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불가피하고도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관음삼존도 중앙의 관음보살을 살펴보면 오른팔은 무릎 위로 편안하게 올리고 왼팔은 바닥을 짚은 채, 한 다리는 접고 다른 쪽 다리는 늘어뜨린 유희좌遊戲座 자세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 마치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었던 관음이 막 휴식을 취하려 한쪽 다리를 푼 순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늘어뜨린 발아래 찰랑대는 잔물결은 이곳이 바로 『화엄경』에서 관음보살이 거처하는 곳으로 서술된 바다 위의 보타락가산임을 말해준다. 또한 정병에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는 것은 중앙의 관음이 불교도상적으로 수월관음水月觀音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림 왼편에 있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은 주로 『대일경소』와 같은 밀교계 경전에서 중생구제의 권능을 지닌 상징적 보살로 등장하는데 머리부터 흰 천을 늘어뜨리고 긴 소매 속에서 차수叉手를 하고 선 모양이다. 

그런데 오른편에 있는 관음은 꽤 낯설다. 아미타 화불이 새겨진 관세음 특유의 화관 대신 평범한 부인들의 머리 장식에 비녀를 꽂았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천수관음과 백의관음의 천의天衣에 비해 옷의 노출은 현저히 줄었고, 보살의 맨발 아래에는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연화좌마저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려져 있지 않다. 머리에 둘러진 둥근 광배光背만 아니라면 대나무 장바구니에 물고기를 담아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여느 필부匹婦와 다를 바 없이 보인다. 이 특이한 모습의 관음을 어람관음(魚籃觀音, 물고기 바구니를 든 관음)이라 부르는데, 어람관음이란 말은 당·송 시대에 유행한 영험담과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용어일 뿐 경전적 근거는 없다. 어람관음을 마랑부관음(馬郎婦觀音, 마랑의 부인인 관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법佛法을 모르는 무도한 지역에 어느 날 바구니를 들고 물고기를 팔러 다니는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 고을 남자들이 여인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하자 여인은 「관세음보살보문품」, 『금강경』, 『법화경』을 차례로 외운 남자와 혼인을 하겠다고 말한다. 결국 마랑이란 사내가 시험을 통과해 여인과 결혼했는데 식을 마치자마자 신부는 죽어버린다. 부인을 장사 지낸 후 실의에 빠진 마랑에게 승려가 나타나 여인이 관음의 화신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마랑이 묘를 파서 관을 열어보니 황금 쇄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후 마랑은 불법을 깊이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람관음 고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굳이 관음을 ‘마랑의 처’란 용어로 함께 부르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 이야기가 지닌 관음의 여성성을 맹아로 해서 송·원 시대에 묘선妙善관음 설화가 탄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묘선관음설화의 최초 기록은 1,100년에 북송의 한림학사 장지기蔣之奇가 승려에게 들었다는 「향산대비보살전」을 비문으로 새겨 세운 향산비香山碑에서 찾을 수 있다.

정리하면, 옛날 어느 나라에 장왕莊王이란 왕이 딸 셋을 두었는데 셋째 딸의 이름이 묘선이었다. 묘선이 시집을 가는 대신 출가를 하려 하자 장왕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딸을 ‘마괴’나 ‘요괴’라 생각해 묘선을 죽이려 한다. 용케 살아남은 묘선은 수도를 하다가 아버지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을 알고, 자신의 손과 눈을 바쳐서 아비를 살려내고 관음보살이 되어 중생을 제도했다는 이야기다.

묘선관음고사는 이후 명·청대의 설창문학과 소설에서 수없이 변주되며 관음보살이 여성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확고히 심어주게 된다. 청말에 쓰인 소설 『관음보살전기』에는 묘선이 관음보살이 된 이후에 마랑의 처가 되어 제도했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묘선관음과 마랑부관음의 구별조차도 희미하게 되어버렸다.  

양산 신흥사 관음삼존도. 사진 : 최배문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보살인 관음보살이 생물학적 여성이란 사실은 여성들에게 마냥 자부심을 안겨 주는 일일까? 관음보살이 중국에서 여성으로 바뀌게 된 내력을 살피다보면 남성들의 세상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한낱 ‘요괴’에 지나지 않는 여성이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선 자신의 손발을 잘라 아비를 살리거나 남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성녀聖女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여성을 비하하는 종교는 분명 아니다. 2015년에 작고한 미국의 저명한 불교페미니즘학자 리타 그로스Rita M. Gross는 『Buddhism After Patriarchy』에서 “불교는 페미니즘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주류 불교계 안에서 ‘페미니즘’란 단어는 여전히 낯설고 떨떠름한 어떤 것일 뿐이다. 일례로 한국불교 대표종단의 수장은 비구니들이 뭉치면 선거결과가 좌우되기 때문 비구니에게는 총무원장 선거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말은 여성은 승가의 진정한 구성원이나 주체적 생각을 지닌 인격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성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여성들만 바뀌었을 뿐이다. 침묵하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자신이 남성이고 한국에서 승려나 불자로서 살아가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다고 느껴질수록, 최근 여성들의 목소리가 성가시고 불편하게 느껴질수록, 불교의 인간해방과 실천수행이 곧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한 리타 그로스의 다음 말을 아주 오랫동안 음미해봐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대부분의 불교세계에서 나타나는 불평등한 조건에서 여성 불교도로 살아야 한다면, 불교를 내 종교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