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11)

식전변識轉變과 분별 그리고 자유

2017-06-18     김사업

| 같은 소리가 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까?

김사업

유식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일체는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 만든 우물 안에서 평생을 산다. 눈에 보이는 광경, 귀에 들리는 소리, 옳고 그름,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이 연출하는 세계요, 내 마음이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그리는 그림일 뿐이다.

마음에 의해 꽃의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 나는 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꽃을 마음에 의해 찍힌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이다. 이에 반해 마음이 그리는 그림은 외부의 사물 없이 마음 독자적으로 그리는 허구의 그림이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내 마음이 그리는 허구의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중생은 자신에게 보이는 꽃이 자신의 마음에 의해 그려진 가공의 그림인 줄 모른다. 보이는 그대로 꽃은 저기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오인해 버리고 만다. 중생은 뿌리 깊은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시시각각 이렇게 오인한다. 이 오인의 결과로 눈에 보이는 좋거나 싫은 것, 나아가서는 자신이 파악한 모든 상相이 자신에게 보이고 생각되는 그대로 실제로 그렇다는 맹목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꽃은 꽃이고,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진짜 나쁜 것이다.’라고 맹신하는 집착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여기서 시작된다. 중생은 평생 이 집착의 그물에 걸려서 ‘꽃’, ‘좋다’, ‘나쁘다’ 등의 상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거미줄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는 나비와 같다. 중생은 심지어 그것들이 허구의 그림이라는 진실에 의심을 품기 일쑤이다. 간혹 어렵게 수긍하는 것 같다가도 금세 기존의 집착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이 집착의 그물은 언제 소멸할까? 모든 상이 허구의 그림일 뿐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사무치도록 뼈저린 자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의해 그려진 허구의 그림일 뿐이다.’를 유식의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면, ‘모든 것은 내 마음(識)이 그런 형상을 띠고 나타난(=현현顯現한) 것일 뿐이다.’가 된다. 마음의 속성상 마음이 어떤 형상을 하고 나타나면 그 형상은 본인에게 그대로 인식된다. 내 마음이 꽃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면, 그와 동시에 나는 꽃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상의 내용을 전문 용어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2016년 12월호에 상세히 언급해 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내 마음의 외부에 어떠한 존재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경無境’이고, 오직 그러한 모습으로 마음이 나타나 마음 스스로에 의해 그렇게 인식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유식唯識’이다. 미운 사람도 내 마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산과 들, 삼라만상 모두 내 마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마음은 지금 왜 많고 많은 형상 중에 어떤 특정의 모습으로, 예를 들어 꽃의 형상을 띠고 나타날까? 또 그 꽃에 대해 친구는 너무도 아름답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식전변설識轉變說이다. 식전변설이 단지 위의 의문에 대한 답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식전변설은 유식무경이 성립하는 근거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식(識=마음)이 연기적 존재며 찰나적 존재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아뢰야식과 7식(안식~말나식)의 상호 인과因果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경험이 생겨난다는 것을 밝히는 체계이기도 하다.

식전변설에는 이와 같은 복잡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며 매우 전문적으로 설명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에게 주어진 제한된 지면과 여건으로는 이 식전변설 전체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또한 일반인이 식전변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적으로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필요한 부분에 한정하여 이해의 편의 위주로 식전변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문을 닫고 법당 안에서 목탁을 딱딱딱 쳤다. 바깥에는 불교 신자인 할머니와 유치원생 손자가 있었다. 문을 열고 물었다. “방금 전의 소리가 무슨 소리였어요?”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 대답했고, 손자는 나무 두드리는 소리라 했다. 같은 소리가 목탁 소리로도 들리고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도 들린 것이다.

혹자는 두 소리가 결국 같은 소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탁 소리와 나무 두드리는 소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는 소리이지만 후자는 그냥 나무 부딪치는 소리일 뿐이다. 같은 소리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상식적으로 설명하면, 할머니는 절에 다니면서 스님께 목탁에 대해 배우고 그 소리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고, 손자는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정보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식은 어떻게 말할까?

 

| 식전변識轉變

할머니는 스님께 목탁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했다. ‘스님께 설명을 듣는 순간 그 내용이 할머니의 아뢰야식에 종자로 심어졌고, 그 종자는 계속 보존되어 간다.’라고. 여기서 스님의 설명이 할머니에게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 유식은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보자. 세친(4~5세기경)의 『유식20론』에 근거해서 언급하면 이렇게 된다.

목탁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도(思)를 가진 스님의 의식意識에 영향을 받아 할머니에게는 스님의 설명 내용이 음성의 형태를 띠고 이식耳識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식은 소리만 인식할 뿐 그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 이식에 의거하여 그 음성의 의미를 파악하는 의식이 할머니에게 생하여 할머니는 목탁을 알게 된다. 스님의 음성을 이식이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스님의 의식에 영향을 받아 이식이 스님의 음성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고 한 점에 유념해야 한다.

우리의 상식대로 하면, 소리나 음성은 마음과는 별개이며 마음은 그것을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그러나 위의 내용, 즉 유식은 소리나 음성은 결코 마음과 별개인 것이 아니며, 마음이 소리나 음성의 형태로 나타나 마음 자신에 의해 그렇게 인식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음과 별개인 음성은 없으므로 3업 가운데 구업口業은 결국 마음의 작용이다. 마찬가지로 신업身業도 마음의 작용이다.

얼마 후 스님이 목탁을 쳤다고 하자. 목탁을 치려는 의도를 가진 스님의 의식에 영향을 받아 할머니에게는 그 소리의 형태를 띤 이식이 생겨난다. 이 이식에 의거하여 할머니의 의식은 그 소리가 ‘목탁’ 소리임을 안다.

유식에서 말하는 위의 내용은 잠깐 접어 두고 상식선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자. 나에게 들리는 소리는 같은 소리라도 시시각각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게 들린다. 같은 음악이라도 언제는 시끄럽게 들리고 언제는 유쾌하게 들린다. 개의 청력은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고 한다. 그 음악이 개에게는 분명히 나와는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들리는 저 소리는 언제나 내 마음의 작용에 의해 그렇게 들리는 것이지, 저 소리 자체가 나에게 ‘있는 그대로’ 들린다고는 할 수 없다.

나의 외부에 고정된 소리 자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혹자는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는 기계에 찍힌 수치가 그 소리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동일 소리라도 대기 중이냐 수중이냐, 산속이냐 도심이냐 등 주위 환경에 따라 그 수치는 다르다. 또한 측정 기계가 발달할수록 그 수치도 미세하게 다르게 측정될 것이다.

질량과 무게는 다르다고 한다. 지구에서 몸무게가 60㎏중인 사람이 달에 가서 몸무게를 재면 10㎏중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질량은 지구에서나 달에서는 언제나 60㎏이다. 이와 같이 장소나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물질의 고유한 양을 질량이라 한다. 같은 장소에서 무게는 이 질량에 비례한다.

질량과 마찬가지로 주위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소리 자체’라고 부를 만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원리에서 밝힌 대로 질량도 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물체의 속도에 따라 변한다. 더군다나 질량은 비물질인 에너지의 한 형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량은 다수가 허용하는 일종의 약속으로서의 양이지 고정불변의 뭔가는 아니다. 고정불변의 질량이 없듯이 세기 등이 고정된 ‘소리 그 자체’도 없을 것이 당연하다.

고정된 소리 자체가 없는 한편 내게 들리는 소리는 항상 내 마음의 영향을 받은 소리이다. 나는 그런 소리만을 알고 있으며, 그 소리가 아닌 ‘소리 자체’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소리는 내 마음이 그리는 그림, 내 마음의 나타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유식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고 일단 이해하자.

이제 할머니의 목탁 소리 듣기와 관련하여 식전변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세친의 『유식30송』과 이에 대한 안혜(6세기경)의 주석, 『성유식론』의 관련 부분에 근거하여 말하겠다. 식전변의 기본을 이루는 두 뼈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안식~말나식)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생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 마음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있어야 하고, 생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해야 해당 종자에서 해당 마음이 생한다. 예를 들어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안식 종자에서는 무기의 안식이 생하고, 의식의 선善종자에서는 선의 의식이 생한다. 종자에서 마음이 생하는 것을 중국의 법상종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종자가 현행을 생한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2016년 9월호에 자세히 언급해 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만 거기에서는 ‘안식에서 말나식까지의 7식’이라고 써야 할 부분에 ‘신체적 행동·말·생각(이나 과보)’라고 적어 놓았다. 7식과 유식무경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초보자들을 단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신체적 행동·말·생각이나 과보’는, 모든 것은 마음의 나타남이라고 보는 유식의 입장에서는 결국 7식의 나타남이다.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음성 등이 마음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신업과 구업은 마음의 작용인 점을 안다면 납득이 갈 것이다.

둘째, 종자에서 생한 안식에서 말나식까지의 7식 각각은 생하는 순간과 동시에 아뢰야식에 자신과 동일한 성질의 종자를 심는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인식이나 경험을 하는 순간, 미래에 동일한 성질의 인식이나 경험을 할 수 있는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 아뢰야식에 남겨진다는 말이다. 이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현행이 종자를 훈습한다)’라고 한다.

이렇게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는 유실 없이 보존되어 간다. 그 보존되어 가는 과정을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가 종자를 생한다)’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 내용은 2016년 9월호를 참조 바란다. 보존된 종자 가운데 식으로 생할 조건을 만난 종자에서 식이 생한다. 이것은 곧 처음의 ‘종자생현행’의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국 ‘종자생현행 → 현행훈종자 → 종자생종자 → 종자생현행 …’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식전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순환적 반복의 과정을 통해 모든 존재와 인식과 경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목탁 소리라고 인지한 것은, 그 소리의 형태를 띤 이식과 이 이식에 의거하여 ‘목탁 소리’라고 식별한 의식이 할머니에게 생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이식과 의식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그에 합당한 종자가 있었고 그 종자가 식으로 생할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이식을 생한 종자는 어떤 것일까? 과거에 목탁을 설명하는 스님의 음성으로서 나타난 이식과 목탁을 칠 때 그 소리로서 나타난 이식이 남긴 종자이다. ‘목탁 소리’라고 식별한 의식을 생한 종자는 어떤 것일까? 과거에 해당 이식에 의거하여 ‘이것이 목탁 소리다.’라고 식별한 의식이 심은 종자가 그것이다.

이 이식과 의식의 종자들이 아뢰야식에서 이어져 오다가 유사한 상황을 만나 그 이식과 의식으로 생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지한 순간 그 이식과 의식은 동일한 성질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새로이 또 심는다. 결과적으로 목탁 소리라고 식별할 수 있는 이식과 의식의 종자는 증가한다. 따라서 같은 행위가 반복될수록 ‘이것은 목탁 소리다.’라는 인식은 강해지며 이에 대한 집착도 강해진다.

 

| 분별과 자유

다음의 『유식30송』 제17송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 식전변이란 분별이다. 분별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일체는 유식唯識이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분별이란 위에서 말한 식전변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단언한다. ‘종자생현행 → 현행훈종자 → 종자생종자 → 종자생현행 …’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우리의 인식과 경험 등이 바로 분별이라 한 것이다.

이어서 게송은 그렇게 인식되고 경험된 내용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로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꽃은 실제의 꽃이 아니며, 미운 놈은 내가 생각하듯 진짜 미운 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마음이 그리는 허구의 그림이다. 게송에서 말하듯, 그러므로 일체는 유식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마음 스스로에 의해 그렇게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엄청난 짐들을 짊어지고 있다. 여태껏 심어 온 번뇌 종자들이 그것이다. 분노의 종자, 괴로움의 종자, 미움의 종자, 끝을 모르는 욕망의 종자, 일체를 자신 위주로 바라보는 아집의 종자 …. 때가 되면 이 종자들은 실제의 분노·괴로움·미움·욕망·아집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목탁 소리로 인식한 결과로 심어진 종자 때문에 그 소리는 언제나 목탁 소리로 들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 소리가 목탁 소리로 들릴지라도 그 소리는 결코 ‘고정된’ 목탁 소리가 아니다. 요강이 요강이 아니라 양념 단지이기도 한 것처럼.

더 심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중생의 현실이다. 중생에게 미움의 종자에서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 상대는 영락없이 미운 놈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려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보인다. 밉게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밉게 보인다. 목탁 소리로 들으려고 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탁 소리로 들리고 그 결과 그것은 틀림없는 목탁 소리라고 믿게 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자신이 심은 종자대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지 실제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중요하다. 내가 괴로워할 만한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요컨대 내가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본인이 심은 종자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마치 그것은 허공에 떠다니는 터럭 하나와 같고, 거대한 강물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과 같다.

이 한계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될 것인가? 수행하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조 선사가 제자인 백장 선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갔다.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게 뭔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머리 굴리거나 읽고 들은 것으로 흉내 내서 답한다면 영원한 중생이다.

2014년 11월부터 지금까지 2년 8개월에 걸쳐 연재한 글을 이번 호로 마친다. 불광 관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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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를 끝으로 ‘불교를 만나다’를 마칩니다. 「불광」 창립 40주년을 맞아 2014년 11월 40주년 기념호부터 2년 8개월 동안 연재해주셨습니다. 학문과 수행을 통해 얻은 정확한 불교를 제시하고 교리가 몸과 마음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셨습니다. 활발발한 불교를 전해주신 김사업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