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화두는 타파되는가

그림 : 이은영

2017-06-18     박재현
그림 : 이은영

‘타파’로 소리 나는 우리말 발음은 통쾌하다. ‘타’와 ‘파’로 연이어지는 강한 파열음은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다. ‘타’라고 발음할 때, 젖은 혓바닥 끝은 치아 사이를 힘차게 치고 나간다. 또 ‘파’라고 말할 때, 붙어 있던 입술은 둑이 터지듯 갈라진다. 그렇게 강렬하게 치고 나가서 만들어내는 ‘타파’라는 음색은 너무 통쾌해서, 이보다 더 뒤끝을 남기지 않는 소리가 또 있을까 싶다. 화두와 관련해서 타파라는 말귀를 처음 가져다 쓴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재적인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타파’에 상응할 만한 순우리말은 ‘깨다’가 아닐까 싶다. 접시를 깨는 것도 ‘깨다’고, 잠이나 술기운에서 벗어나는 것도 ‘깨다’고,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발휘되는 것도 ‘깨다’로 표현된다. 깨우친다거나 깨닫는다는 말도 다 ‘깨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타파는 한자어고 깨다는 순우리말인데, 화두와 관련해서는 왠지 깨다보다는 타파라는 말이 더 끌린다. 깨다가 타파로 발음되는 소릿값을 감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타파는 한자로 ‘打破’라고 쓴다. 간화선을 말하면 자주 나오는 말귀 가운데 하나가 ‘화두타파’가 아닐까 싶다. 화두타파는 해탈이나 깨침 혹은 성불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선禪에 대한 모든 선이해先理解를 걷어내고 ‘화두타파’라는 네 글자의 한자어만 놓고 보면, 세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 ‘화두가 타파’로 독해할 수도 있고, ‘화두로 타파’로 읽을 수도 있고, ‘화두를 타파’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한문 문법상 이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선 전통에서 화두타파는 ‘화두를 타파’로 주로 독해되어 왔다. 순우리말로는 ‘화두를 깨다’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읽으면 화두가 타파의 목적어가 되므로, 타파의 대상이 화두가 된다. 화두를 타파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야심차게 기획 간행한 간화선 수행지침서의 머리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간화선에서는 말길이 끊어진 화두를 통하여 몰록 불립문자의 세계로 들어선다. 화두를 단박에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한다. 간화선이야말로 교외별전, 불립문자의 세계에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들어가는 문 없는 문이다.”

선문禪門에서 화두타파는 이렇게 ‘화두를 타파’의 의미로 굳어졌다. 그리고 수행 참여자나 불자들은 화두가 타파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당연시했다. 화두타파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화두가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되면, 화두 수행은 그것을 통과하고 나면 어떤 형태의 보상이 주어지는 일종의 관문關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용어에서도 이런 어감이 물씬 풍긴다. 

화두타파는 언제부턴가 쿵후영화의 스토리처럼 익혀졌다. 강호江湖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절대 고수에 이르기까지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戯’는 영화배우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다. 이소룡이 계단형 격투 구조물의 맨 아래층에서부터 맨 위층까지 한 층씩 올라가며 점차 강한 상대와 차례대로 대결을 벌이는 모습에서 화두타파가 연상된다. 사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승려가 등장하는 ‘소림36방少林三十六房’이나 ‘소림사18동인少林寺十八銅人’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화두수행에 무림武林의 관문 통과 같은 이미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선의 공안公案을 두고 몇 개의 화두를 타파해 나간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문관』에는 48개의 관문이 있고, 『벽암록』에는 100개의 관문이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로 돌파하면 마침내 성불한다고 겁 없이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화두타파를 중국의 무림武林 문화와 선이 접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과 선이 접목되어 젠Zen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화두타파는 대개 ‘화두를 타파’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독해 과정을 통해 화두수행은 단계별로 승패를 가리는 게임처럼 인식되고, 타파(통과)하면 보상이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타파의 목적어, 즉 대상이 화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타파한다는 생각 자체가 별다른 검증 과정 없이 얼떨결에 받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실제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화두타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굳어진 용어지만, 또 그런 탓에 이 말을 쓰는 사람은 각자 저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게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게다가 화두타파나 화두를 깬다는 식의 독해 방식이 정확한지를 문헌상으로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선불교 문헌에서는 화두타파라는 용어가 명확히 드러나는 문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간화선의 종장인 대혜종고 선사의 어록에서 ‘타파’라는 말의 용례를 살펴보면, 그 목적어가 대개 칠통漆桶, 번뇌煩惱, 생사굴生死窟, 태허공太虛空 같은 부정적인 말들이다. 타파의 목적어로 화두가 나오는 경우는 내가 아는 한 없다.

‘화두타파’라는 말은 타파의 대상(목적)으로 화두를 상정한다. 이렇게 되면서 화두수행은 관문關門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구조적으로 은유화 된다. 화두수행을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두 가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다. 내면적으로는 통과의례를 행하는 당사자 개인의 심리 혹은 인격의 변화를 의미한다. 외형적으로 집단 내에서의 신분이나 역할의 변화를 의미한다. 화두를 타파한다는 식의 사고를 하는 것은, 화두(관문)-타파(통과)-깨침(보상)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은유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과 같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 1941-)라는 유명한 인지언어학자가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이론을 한마디로 소개하면, 말(언어)이 머릿속에 틀(frame)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은 돈”(Time is money)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는 시간을 돈처럼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쓰거나, 버리거나, 아끼거나, 투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이 머릿속에 틀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메타포metaphor, 즉 은유隱喩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은유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의미의 왜곡현상이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레이코프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면 이렇다. “어떤 개념의 한 측면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해주는 체계성은 필연적으로 그 개념의 다른 측면을 은폐할 것이다. … 은유적 구조화는 전체적이 아니라, 부분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어떤 개념이 은유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부분적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을, 또 그것이 어떤 특정한 방식들로만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은유는 어떤 특징은 부각하고 다른 특징은 은폐하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선禪의 모호함은 개념의 모호함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말이 명확해지면 세상이 뚜렷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평생 말(언어)만 쫓아다니는 나처럼 먹물 든 인사들의 가당찮은 포부일지도 모른다. 또 선의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바로 그런 생각을 경계한 선의 경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이나 깨침 혹은 화두를 설명하거나 전달하려고 할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끝내 말뿐이다. 이 막막함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두를 타파하라고 말하거나 혹은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 십중팔구는 이소룡이 나오는 쿵후영화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설사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더라도, 그렇게 은유적으로 구조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은 애당초 걷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의 은유성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사람이 말을 사용하는 이상 세상은 은유를 통해 적당히 드러나고 또 적당히 은폐될 것이며, 세상은 본래 그러했고 앞으로도 쭉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