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 유식唯識(10)

아뢰야식 , 심상속心相續, 마음이 있다는 것의 의미

2017-06-15     김사업

아뢰야식
유식唯識(10)

 

김사업

| 심상속心相續, 마음이 있다는 것의 의미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다. 안식에서 아뢰야식까지의 여덟 개의 마음이 각각 별도로 있으며, 따라서 여덟 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다. 모든 마음, 즉 8식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나서 작용했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연기적 존재요, 찰나적 존재이다. 반짝 빛났다가 소멸하는 빛과 같다.

빛이 소멸하면 밝게 비추는 작용도 동시에 소멸한다. 빛은 소멸했는데 밝게 비추는 작용만 남아 있는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밝게 비추는 작용은 소멸했는데 빛만 남아 있는 경우도 없다. 소멸한 빛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생겨나 밝게 비춘다. 마음은 이러한 빛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의 작용이, 예를 들어 의식의 작용이 멈추었다는 것은 의식 자체가 소멸했다는 것을 뜻한다. 작용만 멈추었을 뿐 의식 자체는 그대로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식 자체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고 한다면 의식은 불교가 부정하는 아뜨만이나 자성自性이 되어 버린다.

의식은 작용을 멈추어 소멸하지만 조건이 되면 다시 생겨나 작용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의식이 5분간 작용했다는 것은 전구가 5분 동안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작용한 것이 아니다. 마음은 찰나적 존재이다. 생하는 즉시 소멸한다. 지금 이 찰나의 의식이 작용하고 소멸하자마자 빈틈없이 다음 찰나에 새로운 의식이 생하여 작용하고는 곧 소멸한다.

의식이 5분간 작용했다는 것은, 의식을 B라고 했을 때 ‘B1(제1찰나) → B2(제2찰나) → B3(제3찰나) …’와 같은 식으로 5분간 이어진 것을 말한다. B1과 B2는 ‘의식’이라 불리는 같은 작용을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의식은 아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나의 뇌세포가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뀌었다 해도, 이 세포가 전혀 엉뚱한 심장 기능을 한다거나 나와 특징이 다른 타인의 뇌세포로 변한 것은 아니다. 바뀌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만의 독특한 뇌세포 기능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뀌기 전과 그 후의 뇌세포를 동일한 뇌세포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뇌세포는 영원불변의 아뜨만이 아니다.

B1과 B2의 관계는 바뀌기 전후의 뇌세포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B, 즉 의식은 불변의 아뜨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B1에서 B2로의 진행, 다시 말해 B2가 생겨나는 데도 많은 조건들에 의존해야 가능하다. 빛 하나가 생겨나는 데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한지 상상해 보라. 따라서 B1과 B2 등 B 계열의 하나하나의 마음은 ‘조건에 의존하여 생한 것’, 즉 연기적 존재이지 아뜨만이 아니다. B1과 B2 등이 어떤 조건에 따라 생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식전변설이다.

5분간 위와 같이 찰나적으로 작용하다가 조건이 다하면, 예를 들어 깊은 잠에 들면 의식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고 한동안 소멸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생겨나 작용한다. 의식은 이렇게 생멸을 반복하면서 독자적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의식뿐만 아니라 8식 모두가 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기능을 하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마음의 이러한 흐름을 마음의 상속, 즉 ‘심상속心相續’이라 부른다.

결국 8식 각각은 자신만의 독특한 기능을 하는 8가지 마음의 흐름을 가리킨다. 안식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나 색깔과 모양을 식별했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마음의 흐름이며, 이식은 같은 방식으로 소리를 식별하는 마음의 흐름이다. 안식이 있다는 것은 ‘안식’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능을 하며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마음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을 늘 주의해야 한다.

부처가 되었을 때 8식 각각은 지혜로 바뀐다고 했다. 이를테면 의식은 묘관찰지라는 지혜로 바뀐다. 이것은 번뇌에 물든 의식의 흐름이 차원이 완전히 바뀌어 번뇌가 전혀 없는 ‘지혜의 의식(=묘관찰지)’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머지 식識도 이에 준하여 이해하면 된다.

 

| 멸진정과 아뢰야식

8식을 나무라고 한다면 그 뿌리에 해당하는 마음이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은 이렇게 근원적인 마음이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대부분의 경우 단 1초도 중단됨이 없이 우리에게 자각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두 마음을 흔히 잠재적인 마음 혹은 무의식의 마음이라고 한다.

말나식의 작용이 멈출 때라도 아뢰야식은 계속 작용한다. 말나식은 멸진정滅盡定이라는 선정에 들면 그동안만큼은 일시적으로 작용이 멈춘다. 말나식의 작용이 멈추었다는 것은 나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까지도 없어진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아뢰야식은 그 멸진정에서조차도 작용한다.

멸진정에서는 안식부터 의식까지 전육식前六識의 작용도 당연히 멈춘다. 따라서 어떤 생각도 어떤 인식도 어떤 감각도 없다. 그러나 멸진정에서 나오면 전육식이 행하는 평소의 생각과 인식 등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가족도 알아보고 추위와 더위도 느끼며 평소대로 운전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멸진정에서도 평소의 인식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어떤 형태로든 존속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멸진정에서 평소의 인식이 되살아날 씨앗조차 소멸해 버린다면 멸진정에서 나와도 그 인식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멸진정에서는 전육식의 작용이 멈췄고 따라서 이때는 전육식 자체가 소멸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평소의 인식이 되살아날 씨앗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거에 평소의 인식들, 곧 전육식이 작용하는 순간마다 남겨진 종자들이다. 따라서 멸진정에서조차도 종자는 보존된다. 그런데 그 종자를 보존하는 것은 아뢰야식이다. 결론적으로 멸진정에서조차도 아뢰야식은 존속하며 작용하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멸진정 대신에 숙면이나 기절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대입하면 이해는 더 쉬울 것이다. 숙면 중일 때는 평소의 인식, 즉 전육식은 소멸된다. 잠에서 깨어나면 평소의 인식이 되살아난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 종자들을 보존하는 아뢰야식은 지속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멸진정에서처럼 안식에서부터 말나식까지 여타의 식이 다 그 작용을 멈춰도 아뢰야식은 멈추지 않는다. 멸진정에서 육체적 생명이 유지되는 것도 아뢰야식의 작용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단 한 찰나의 멈춤도 없이 지속된다. 숙면 중일 때와 식물인간일 때 작용하는 것은 아뢰야식과 말나식뿐이다. 참고로, 꿈은 안식에서 신식까지 전오식前五識의 작용이 소멸한 상태에서 의식만 작용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론 꿈을 꿀 때도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작용하고 있다.

 

| 아뢰야식의 주요 기능

아뢰야식에서 ‘아뢰야阿賴耶’란 산스끄리뜨 ‘알라야ālaya’를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긴 음역어이다. 유식의 완성에 큰 공헌을 한 인도의 세친(世親, Vasubandhu, 기원후 4-5세기경)이 유식의 입장에서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재조명한 저술이 『오온론』이다. 거기에서 세친은 왜 아뢰야식이라 불리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그 문맥을 잘 살펴보면 아뢰야, 즉 알라야에는 ‘곳간’, ‘집착’, ‘육체에 내재하는 것’ 등의 의미가 있고, 이 의미들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의미들은 아뢰야식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아뢰야식이 하는 주요한 기능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행위가 남기는 영향력인 종자를 저장하여 보존한다. 둘째, 육체의 생명을 유지한다. 셋째, 윤회의 주체이다.

우선 첫 번째 기능부터 알아보자.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생각이나 말이나 육체적 행동 중의 어느 하나이다. 모든 행위는 과거에 행해진 같은 성질의 행위가 남긴 종자에서 나오며, 행위가 일어남과 동시에 아뢰야식에 그 행위와 똑같은 성질의 종자가 심어진다는 것은 이미 누차 이야기했다. 아뢰야식은 행위가 남기는 이 종자를 하나도 유실됨이 없이 저장하고 보존하는 식識이기 때문에 ‘곳간’이란 의미를 갖는 아뢰야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게 된 것이다. 아뢰야식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간과 같은 마음인 것이다.

세계 최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 산맥, 그 ‘히말라야’라는 말은 ‘히마hima’와 ‘알라야ālaya’가 합쳐져서 된 합성어이다. 히마는 ‘눈(雪)’, 알라야는 ‘곳간’을 의미하므로, 히말라야는 ‘눈의 곳간’, ‘눈이 쌓여 있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히말라야를 설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일 년 내내 눈을 머리에 인 설산들이 늘어서 있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뢰야식은 종자를 저장・보존하는 식이므로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또는 ‘장식藏識’이라고도 불린다. 장식에서 ‘장藏’은 ‘곳간’, 간직하다’, ‘저장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장식은 아뢰야식의 의역에 해당한다.

아뢰야식의 두 번째 기능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기능 때문에 아뢰야식은 ‘육체에 내재하는 것’이란 의미를 갖는 아뢰야를 그 이름으로 하게 되었다. 유가사瑜伽師들은 깊은 선정 체험과 통찰을 통해, 육체에 내재하여 한 찰나도 단절됨이 없이 생명을 유지시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미 알려진 전육식이 아니며 항상 작용하는 새로운 마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새로운 마음에 ‘육체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아뢰야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참고로 말나식은 8식 가운데 가장 나중에 정립된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우리는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른다. 자기 전에 “내가 잠에 떨어지면 전혀 모르니까, 몸 너는 그때도 꼭 생명을 유지시켜야 한다.” 하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저절로 호흡을 하고 신진대사가 이루어져 생명이 유지된다. 식물인간인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균이 몸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병원균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몸은 병원균을 알아채고 면역 체계를 가동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죽은 사람의 몸은 호흡도 없고, 신진대사와 면역 작용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육체의 생명 유지는 단순히 몸만 있다고 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깊은 잠에 들거나 식물인간일 때는 안식부터 의식까지 전육식은 소멸한다. 우리는 몸에 들어온 병원균을 알아채기는 하나, 그것은 자각적 감지가 아니다. 자각적 감지는 전육식에 의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병원균에 대한 알아챔은 전육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깊은 잠, 식물인간, 병원균의 침입 등 어느 경우든 생명을 유지시키는 작용은 지속된다. 이것은 생명이 전육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다.

죽은 사람의 몸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은 생명 유지가 전적으로 몸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또한 말나식이 중단된 멸진정에서도 생명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말나식에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생명은 무엇에 의해 유지되는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은 그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작용한다고 했다. 또한 단 1초도 멈추는 일 없이 언제나 작용한다. 멸진정에서는 나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까지도 완전히 끊어진다. 그러한 깊은 선정의 상태에서도 지속되는 아뢰야식의 작용에 의해 우리의 생명은 유지된다.

아뢰야식은 이와 같이 늘 우리 몸의 상태를 파악하고 생명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나, 그 작용이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종자를 보존하는 일 이외에 아뢰야식이 하는 또 하나의 일은 이렇게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세 번째 기능은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생이 마감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원願과 상관없이 본인이 지금까지 어떠한 행위(업)를 행했는가에 따라 죽은 뒤 무엇인가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로도 태어날 수 있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용모와 재능, 가계 등을 매우 달리해서 다양하게 태어난다. 각자가 행해 온 행위가 다르기 때문에 태어나는 상태도 제각각이다.

새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으면 재차 어딘가에 다시 태어난다. 수레바퀴가 끝없이 반복하여 구르며 앞으로 나아가듯이 이렇게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윤회’에서 ‘윤輪’은 수레바퀴를 뜻하고, ‘회廻’는 회전을 뜻한다. 이 괴로움의 윤회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누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이 질문에 “갑이 윤회한다.”고 답한다면 갑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아뜨만과 같은 ‘영원불변의 나’가 있어 이것을 윤회의 주체라고 하면 윤회는 쉽게 설명된다. 아뜨만은 개개인의 변치 않는 영혼에 해당한다. 행위에 대한 과보로 이루어지는 것이 윤회이다. 행위를 한 자도 나의 아뜨만이요, 그 과보를 받는 자도 동일한 나의 아뜨만이기 때문에 아뜨만을 인정하면 윤회는 쉽게 설명된다. 바라문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아뜨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뜨만과 같은 ‘영원불변의 나’를 부정한다.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표방한 말이 ‘무아無我’, 곧 ‘영원불변의 나는 없다’이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 무아와 윤회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려는 여러 사상이 나왔다.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본다.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남긴 종자를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본 것이다. 아뢰야식이 아뜨만과 같은 영혼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다룬 심상속의 내용을 통해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왜 갑은 명석한 머리에 인자한 성격을 가지고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는데, 을은 그렇지 못한가? 태어나기 전에 행한 각자의 행위, 즉 업業이 남긴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갑과 을은 다 그렇게 태어날 만한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달리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론적인 것은 아니다. 각자의 아뢰야식에는 본유무루종자를 비롯한 수많은 선善종자도 있다. 따라서 비록 불우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선업을 행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선업을 행하는 순간 그 종자는 아뢰야식에 심어지고 그 선善종자에서 때가 되면 합당한 과보가 나오게 된다. 이렇게 앞으로 어떤 행위를 해서 어떤 종자를 심어 나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앞에서 아뢰야에는 ‘집착’이라는 의미도 있어 아뢰야식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뢰야식은 말나식에 의해 끊임없이 ‘나’로 오인되고 집착되는 대상이다. 이 이유로 ‘집착’의 의미를 가진 아뢰야가 명칭으로 채택된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과연 빈손으로 왔다가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갈까? 어느 누구라도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새로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견도見道에 이르지 못한 중생인 한, 지금까지 심어 온 종자를 다 가진 채 떠나고 태어난다.

 

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김사업 부원장은 장휘옥 원장과 함께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