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삶에서 뽑은 명장면] 보여주라, 행복한 삶을!

2017-06-15     성재헌

붓다가 꿈꾼 세상은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되려면 세상 사람들이 이기심과 폭력을 극복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이기심과 폭력을 극복한 삶이 과연 가능할까? 종족보존욕구와 자기보존욕구에서 비롯되는 이기심과 폭력은 생명체의 본능本能이다. 본능을 극복하려면 그 욕구가 터무니없고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깊이 자각自覺해야만 한다. 깊은 자각, 즉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

본능을 제압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자각, 탐욕과 분노의 뿌리를 스스로 뽑게 하는 깨달음은 붓다 자신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과연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일까?

붓다는 그 가능성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후 가장 먼저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를 떠올렸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대해 토론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던 다섯 수행자였다. 그들 역시 오랫동안 붓다와 함께 수행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면 굳이 먼 길을 걷고 갠지스 강까지 건너야 하는 힘든 여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네란자라 강변의 가야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빠까와 만났던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라나시로 향하던 붓다는 길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한 수행자를 만난다. 그는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모습은 맑고 얼굴은 환히 빛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모든 욕심과 애착에서 해탈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굽니까? 당신은 어떤 법을 배웠습니까?”

“나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내가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이니, 홀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우빠까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최고의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요.”

“벗이여, 나에게 번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와 같은 승리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벗이여, 내가 바로 승리자입니다.”

우빠까는 입을 삐죽거렸다. “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붓다의 실험은 깨달음을 성취한 가야에서부터 시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하고, 자신의 말을 믿어줄 가능성이 높은 옛 벗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은 초기의 붓다는 교화에 소극적인 자세였다.

붓다가 타인을 깨우치는 교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된 데에는 ‘야사’와의 만남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라나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야사는 붓다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에게 야사는 낯선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교류하며 신뢰를 쌓은 사이도 아니고, 당시 붓다에게는 대중이 제 발로 찾아오게 할 만한 유명세도 없었다. 하지만 숲에서 우연히 만난 야사는 붓다의 가르침에 마음의 문을 열었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붓다께선 이 사건을 통해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거센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지만 낯선 사람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감이 교화에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하였을 것이다.

붓다는 숲으로 찾아오는 야사의 친구들을 깨우쳤고, 그들 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깨우침을 통해 스스로 탐욕과 분노의 뿌리를 뽑은 제자는 어느새 6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자 붓다는 제자들을 모으고 이렇게 권유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가엽게 여기며 길을 떠나라.

마을에서 마을로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말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

원만하고 완전하며 청정한 행동을 보여주라.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법을 듣지 못하면 퇴보하겠지만

들으면 분명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법을 전하러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갈 것이다.

 

하나의 이념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려면 주장과 실험과 선전만으로 불가능하다. 그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야만 한다. 직접 보여주어야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신뢰와 존경이 쌓여야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 너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가를.”

그리고 붓다 자신도 처음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영광의 땅, 하지만 교화를 포기하고 침묵해야만 했던 치욕의 땅 우루벨라로 다시 돌아가신 것이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의 활약으로 곧 세상 곳곳에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인 승가(僧伽, san.gha)가 생겨났다. 붓다의 제자들은 승가를 통해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직접 보여주었다.

이기적 욕망에 압도당한 폭력적인 삶을 떠나려는 자들, 이기적 욕망에 압도당한 폭력적인 삶을 떠난 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형성된 집단인 승가는 ‘법치’와 ‘평등’을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출가자로 구성된 승가에서는 규제를 통해 소유물의 평등을 지향하였고, 또한 인종이나 계급,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격의 완성도에 따라 특별히 존경받는 분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만 부여된 특권은 없었다. 그들의 행위 역시 공동체의 규약에 따라 똑같이 규제되었고, 대중에게 심판받았다.

평등과 법치를 기반으로 한 승가의 전통은 경전과 율장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이었던 난다가 출가하던 날 있었던 일이다. 출가를 허락받은 난다는 대중 스님들께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던 난다의 행동이 우바리 앞에 와서 갑자기 멈췄다. 왜냐하면 우바리는 예전에 자기 집에서 부리던 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예배하기를 주저하는 난다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수많은 강물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또한 사방의 강물은 제각각이지만 바다에 들어오면 모두 똑같은 하나의 맛이 된다. 계를 받은 순서에 따라 예의를 다할 뿐 신분과 귀천의 차별은 여기에 없다. 흙과 불과 물과 바람, 이 네 가지 요소가 합해진 것을 짐짓 몸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텅 비어 ‘나’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마땅히 성스러운 법률을 생각하고, 절대로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붓다는 온 세상이 승가공동체를 모델로 삼아 자율과 평등을 기반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다. 붓다가 꿈꾼 세상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기적 욕망과 폭력을 극복하려는 불제자들의 노력 역시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보여주면 한 가정이 행복해지고, 한 가정이 행복한 삶을 보여주면 한 마을이 행복해지고, 한 마을이 행복한 삶을 보여주면 한 나라가 행복해질 것이다. 불제자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