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공안公案은 독毒이다

2017-06-15     박재현

선문답이 화석화, 의례화된 지 오래다. 언제부턴가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모두 준비된 사수射手가 되어버렸다. 정해진 질문을 하고, 예정된 대답을 한다. 사수는 준비하면서 헤아리고 헤아리면서 준비한다. 헤아리고 또 헤아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한다. 유가儒家의 깊은 도리는 곧잘 활쏘기에 비유되지만, 헤아림은 선가禪家의 경계처다. 헤아려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선이 지향하는 곳이 아닐 것이다. 화두는, 엉겁결에 들이닥쳐야 화두가 된다.

선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선사도 아니고 출가수행자도 아닌 사람들…. 그냥 오다가다 만날 수 있는 이웃들이다. 옆집 아저씨도 있고, 구멍가게 아주머니도 있고,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그들은 흙 묻은 손과 재 묻은 얼굴을 하고 갑자기 나타나 씩 웃는다. 척박하고 촌스러운 그들이 선이 끝내 지향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놀라워하다가, 이내 가슴이 먹먹하고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지경이 되고 나면, 갑자기 미친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선禪은 너무 가까워서 도리어 멀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시기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선문답은 점점 더 조밀하고 정형화되어 왔다. 이렇게 되면서 선문답의 골수라고 할 수 있는 즉흥성의 묘미는 많이 탈색된 것 또한 사실이다. 선禪 문헌에서 각각의 공안公案마다 제목이 붙기 시작할 즈음부터 공안公案은 풀이 죽기 시작했다. 서술이나 진술 혹은 설명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활구活句가 점점 시들어 사구死句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되고 진술되면서 원래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던 생명력이 소진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술되거나 설명되는 공안은 엉겁결에 들이닥치는 공안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공들인 작품처럼 정교하게 잘 짜여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의 의식을 계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야기가 만들어진 그 현장의 느낌을 되살려내기 위해 우리는, 설명되고 진술되어 왔던 글자를 버리거나 넘어서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날 것에 가까운 공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방 거사가 하루는 (길에서 우연히) 목동을 만나 

물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느냐?”(路從什麼處去)

목동이 말했다.

“길도 모르세요?”(路也不識)

방 거사가 말했다.

“이런 소치기 녀석을 봤나.”(這看牛兒)

목동이 말했다.

“이런 축생 같으니라고!”(這畜生)

방 거사가 말했다.

“지금 몇 시나 되었느냐.”(今日什麼時也)

목동이 말했다.

“밭일 갈 시간이오.”(插田時也)

거사가 크게 웃고 말았다.

 

이것은 『방거사어록龐居士語錄』 가운데 49번째 이야기로 실려 있는 선문답이다. 이해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공안이다. 이 이야기를 그냥 있을 법한 일화처럼 읽으면 웃고 말겠지만, 그저 웃어넘기라고 선어록에 넣어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문답은 자구字句에 너무 치우쳐 해석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엿장수 맘대로 만병통치 약장수처럼 독해하는 것도 문제다.

『방거사어록』은 선어록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문헌이다. 방 거사로 불린 방온(龐蘊, ?-808)은 중국 당나라 때 인물로 선불교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재가 수행자다. 그는 유마 거사와 더불어 동아시아 재가 수행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명나라 말기의 이탁오(李卓吾, 1527-1602) 등 당대의 1급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방거사어록』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와 선시禪詩를 모아 엮은 책이다. 현재 전하는 것은 1637년에 간행된 명나라 판본이 가장 오래된 책이다. 우리말 번역본도 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고, 게다가 반 남짓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위의 선문답 내용 가운데 “路也不識”이라는 말귀에 대한 번역도 많이 다르다. 사사키(Ruth Fuller Sasaki)는 “I don’t even know the road, replied the herdboy.”로 번역했다. 제임스 그린(James Green)도 “I don’t know where it goes.”로 번역했다. 두 가지 번역 모두 단순히 길을 모른다는 대답으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인 불교학자 이리야 요시타카(入矢義高, 1910-1998)는 “길도 몰라요?”라고 핀잔을 주는 물음으로 봤다. 문맥상 후자의 번역이 원의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우아牛兒는 소치기 아이일 수도 있지만, 그냥 소를 나타낼 때도 이렇게 쓴다. 쥐를 서자鼠子로 쓰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문맥상 ‘이런, 소 같은 녀석’ 혹은 ‘이런, 소치기 녀석’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자어 금일今日은 ‘오늘’이라는 뜻과 ‘지금 현재’라는 뜻 두 가지로 쓰인다. 삽전插田은 삽앙插秧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해서 넓은 의미로 다 같은 농사일이다. 굳이 자세히 나눠보면, 밭일과 논일로 구분할 수 있다.

위의 선문답을 그냥 표면적으로 읽으면 방 거사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목동에게 길을 묻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길은 단순히 도로(road)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문화전통에서 길을 나타내는 도道는, 길에서 엉겁결에 마주치게 되는 “도道를 아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그런 맥락의 도를 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내용이 무거워진다. 단순히 길을 묻는 이야기가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소치는 아이는 명색이 수행자라고 하면서 도道를 몰라서 묻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방 거사에게 대든 게 된다. 이쯤 되면 아이가 그저 아이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 거사는 별 생각 없이 소나 치는 어린놈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야단친다. 아이는 그 순간, 그렇게 대응하는 방 거사 당신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되받는다. 방 거사가 소나 치는 녀석이라고 했으니, 아이는 소 눈에는 소나 보이는 법이니 결국 방 거사 당신이 소 같은 축생이 아니겠냐고 되받아친 것이다.

방 거사가 갑자기 시각을 물은 것은 시각이 궁금해서는 아닐 것이다. 궁색해진 어른들의 흔한 말 돌리기 수법이다. 말을 돌려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상대를 겁박하여 모면하려는 것이 어른 된 자들 혹은 윗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의 피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아이는 방 거사를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농사일을 해야 할 시각’이라는 대답은 시계 속의 시각이 아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 사람에게는 시각이 중요하겠지만, 배고프면 밥 먹는 사람에게는 배고픔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은 본래 가상의 것인데, 그 가상의 시간이 배고픔이라는 실상을 오히려 억압하고 강탈한다. 목동의 말은 그래서 오히려 실상에 근접해 있다. 거사의 너털웃음은 “그래 내가 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선문답은 목동의 수행력이 방 거사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시골 아이의 당돌한 대답마저도 스스로 돌아보아 수행의 계기로 삼은 방 거사의 태도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화두로 정해진 것은 없다. 화두는 엉겁결에 들이닥친다. 엉겁결에 들이닥치는 일상을 화두로 삼아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일상을 살아가는 당사자의 수행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옛날의 여러 성인들은 말없이도 전수하였으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스승에게서 배운다. 이렇게 이심전심을 등지고 말로 전수하면서도 그것을 이른바 종지宗旨라고 한다. 스승 노릇 하는 자가 이렇게 눈이 바로 박히지 않았으니 그 밑에서 배우는 이들 또한 올바른 뜻을 내지 못하고, 그저 속히 선禪을 이해하려고만 덤빈다. 그러니 심지心地를 열어 안락함에 이르고자 해도 난감한 일이 아니겠는가. … 기묘하고 신기한 온갖 말과 비밀스럽게 전해 받았다는 옛 공안에 집착하지 마라. 이것들은 모두 독毒이다. 간화선의 종장 대혜종고 선사의 말이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