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석가의 마지막 걸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처

2017-06-15     김하풍

편집자 주

* 이 기고문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90세의 철학자가 『유행경遊行經』 속에 나타난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의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을 사색하며 풀어낸 글입니다. 노 철학자의 깊은 사유가 배어 있는 글의 일독을 권합니다.

1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여로에 오른 것이 80세 적이었다. 그 걸음에 다다른 쿠시나라 지역 두 사라나무 사이에서 적멸하신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 든 『유행경遊行經』은 그 걸음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는 그 여로에 많은 신도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브라만 출신의 대신도 있고, 또 이름난 유녀도 있었다. 『유행경』은 부처가 그 걸음 속에서 제자들에게 한 설법과 신도들을 만난 이야기도 기록한다. 또 이 경에는 부처와 마라(악마)와의 대화 장면도 나온다. 바로 그 장면에서 입적할 것을 권하는 마라에게 부처는 석 달 후에 적멸한다고 선언하신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기록을 우리가 어느 정도 사실로 읽어야 하는가. 학자들이 의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유행경』을 통하여 부처의 마지막 걸음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부처가 평소에 제자나 신도들과 접한 양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부처의 일상생활의 측면도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독자가 꼭 모든 기록을 사실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처가 교화의 첫걸음에 나선 것이 입멸하기 46년 전이었다. 성도하신 뒤 얼마 안 되어, 중생 제도의 걸음을 나서기에 앞서,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귀의한 61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러 비구들이여, 나는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에서 풀렸다. 그대들도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에서 풀렸다. 다들 길을 걸어갈지어다. 중생이 잘 살도록, 중생의 복락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령과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서. 혼자 갈지어다. 같은 길에 둘이 가지 말고,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진리를 설할지어다. 한결같이 완전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일지어다. 세상에는 마음의 눈이 먼지에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다만 진리를 못 들은 탓으로 어둠에서 헤매니, 들으면 깨달으리라. 나도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로 향하겠다. 가르치기 위하여.”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이란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신조 규범을 가리킨다. 성도함으로 온갖 사슬에서 풀렸으니, 부처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에게 귀의한 비구들도 또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그런 사슬에 갇혀 고생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큰 자비심으로, 그들의 해방을 위해 길에 나서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부처가 말하는 “중생의 복락” 혹은 “신령과 인간의 행복”이란 바로 그들이 현재하는 이 현상계에서의 참된 행복을 뜻하며, 천국과 같은 초현상계에서의 행복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불타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현세적이다. 불교에서 흔히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로 비유하고, 해탈의 경지를 피안彼岸으로 말하는데, 이 피안은 우리가 현재하는 현상계 밖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불타의 가르침은 중생들로 하여금 무명無明에서 깨어남으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온 번뇌의 근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2

부처에게는 평소에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의 교단의 사문들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재가자들이 허다하였다. 『유행경』은 부처가 그의 마지막 걸음에 여러 사문들에게 한 설법은 물론, 이들 신도들과의 대화도 기록한다. 우리는 이 경의 기록을 통하여, 다시금 부처의 현세적인 가르침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는 무엇보다 부처의 관심이 곧 그들 제자들의 관심이었음을 말해주리라. 두 말할 것 없이 재가자의 관심사는 주로 이 세상 일이었다 하겠지만, 또 부처를 따르는 사문들의 관심 역시 깊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사문의 수행 목적은 현상계에서의 해탈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한편 이 경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노구를 이끌고 여로에 오른 부처의 인간적인 측면을 놓칠 수 없으리라. 여기에 『유행경』에 나오는 여남은 에피소드를 들어 중생 제도하는 석가의 모습을 엿보기로 하자. 『유행경』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한동안 라자가하(왕사성)의 영취산에 계셨다. 당시 마가다 나라의 아자타삿투 왕은 밧지 족을 쳐서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그의 대신 밧사카라를 영취산에 보내어, 부처의 충고를 듣기로 한다. 부처가 밧사카라를 접견하는 동안 젊은 아난다는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부처는 아난다에게 묻는다.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자주 회의한다고 들었는가. 또 많이 참석한다고 들었는가?”

아난다는 답한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자주 회의를 하고, 많이 참석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고,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서로 협동하여 모이고, 협동하여 행동하며, 다 같이 할 일을 한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서로 협동하여 모이고, 협동하여 행동하며, 다 같이 할 일을 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새로운 법을 만들지 않으며, 옛 법을 버리지 않고 옛 법에 따라 행동한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새로운 법을 만들지 않으며, 옛 법을 버리지 않고 옛 법에 따라 행동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노인을 존경하고 잘 모시며, 노인의 말씀을 중히 여긴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노인을 존경하고 잘 모시며, 노인의 말씀을 중히 여기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부처는 이와 같은 문답을 아난다와 더 거듭한다.

마가다 나라의 대신 밧사카라는 그 문답을 듣고 나서 말했다.

“고오타마여, 그대는 밧지 족이 멸망하지 않을 이유 일곱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로 족할 것입니다. 그런즉, 마가다 나라의 아자타삿투 왕이 밧지 족을 칠 길은 없겠습니다. 나라 일이 많으니, 나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브라만이여.”

부처는 말씀하셨다. 밧사카라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 에피소드에서 우선 전쟁을 뜻하는 마가다 왕이 부처의 충언을 구하여 대신을 그에게 보낸 것이 부처의 가르침을 아는 독자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살생을 일체 금하는 부처가 아닌가. 또 얼른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부처가 한 마디도 살생의 악(그릇됨)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부처는 힌두 사회에서 그 전통에 비추어 그저 현명한 인간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부처 자신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교리를 설하지 않았음을 말하지 않는가. 이런 인상을 주는 에피소드가 『유행경』에는 여러 번 나온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부처가 제자들과 같이 파탈리 마을에 도착하셔서 거기서 그 마을의 신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범하는 자에게는 다섯 가지 화가 올 것이다.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은 빈곤에 빠질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쁜 평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왕족의 모임에 가든지, 브라만의 모임에 가든지, 거사들의 모임에 가든지, 혹은 수도자들의 모임에 가든지, 무슨 모임에 가더라도, 불안스러워 조마조마할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죽음을 당할 때 정신이 착란할 것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후에 무서운 곳에 가며,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는 자에게는 다섯 가지 복이 올 것이다.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은 번성할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왕족의 모임에 가든지, 브라만의 모임에 가든지, 거사들의 모임에 가든지, 혹은 수도자들의 모임에 가든지, 무슨 모임에 가더라도, 태연하여 조마조마할 일이 없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죽을 때 정신이 착란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후에 좋은 곳에 가며,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부처는 밤늦도록 거사들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셨다.

이 에피소드에서 하시는 부처의 말씀도 역시 우리가 아는 바 불교의 가르침과는 꼭 관계가 없는 말씀이 아닌가. 그의 말씀은 대체로 힌두 전통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과연 그렇다면, 부처는 재가자에게 그가 깨달은 진리, 예컨대 사성제四聖諦나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을 설하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사실 이 에피소드 끝에서 『유행경』은 “부처는 밤늦도록 거사들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셨다.”고 할 뿐,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그 내용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 사회의 도덕관에 비추어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의 기록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 기록에서는 아래에 보는 바와 같이 『유행경』은 반드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 내용인즉 우리가 아는 바, 부처의 가르침이다.

이 대조는 역시 부처가 재가자들에게는 그가 깨들은 바 진리를 가볍게 논하기를 꺼려하신 탓이 아닐까. 여기서 하나 유의할 것은 이 에피소드 끝에 나오는 글과 같은 혹은 비슷한 표현이 부처가 또 다른 신도들과 만난 에피소드의 끝에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역시 내용을 쓰지 않는다. 즉, 부처는 당시 힌두 사회의 윤리관에 따라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유행경』은 사문들에게 하신 부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다음 말씀은 그가 제자들과 같이 코티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하신 설법이다.

“비구들이여, 우리가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모르고 깨닫지 못한 탓으로, 그대들과 나도 윤회하여 왔다. 무엇인가.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진리, 괴로움을 멸하는 진리, 괴로움을 멸하는 길의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 네 가지 진리를 알고 깨달음으로 생존에 대한 집착이 근절되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무명으로 인한 생존에 속하지 않는다.”

다음 설법은 부처가 제자들과 같이 기녀 암바팔리의 망고 숲에 묵으셨을 때 하신 설법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항상 정신을 가다듬어, 주의할지어다. 이것이 우리가 사문에게 가르치는 바다. 사문은 정신을 어떻게 가다듬는가. 몸 가짐에는 모든 육체의 일에 조심하여, 탐욕과 두려움을 없애고, 느낌에는 모든 세상 일에 조심하여 욕망과 걱정스러움을 없애고, 마음가짐에는 늘 조심하여 모든 탐욕과 두려움을 없앨 것이다. 또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는 늘 조심하여, 탐욕과 걱정을 없앨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사문은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3

부처는 암바팔리의 망고 숲을 떠나서, 제자들과 같이 벨루바 마을에 가셨다. 거기에 도착하신 뒤, 부처는 사문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우리는 우기 안거에 들어갈 터인데, 그대들은 벨루바 인근에서 친구나 친척과 같이 있도록 하게. 나는 벨루바 마을에서 안거하겠네.”

부처는 안거하는 중에 어려운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위독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고통을 견디어, 병에서 회복하셨다. 그 후에도 몹시 쇠약해진 노구를 이끌고, 부처는 그가 입적하는 쿠시나라까지 제자들과 같이 최후의 여정을 계속하신다. 이 여정에 생기는 에피소드를 어느 정도 자세히 여기 옮긴다.

부처는 아직 병석에 계시는 동안 혼자 생각하시었다. ‘내가 제자들에게 고별의 말조차 하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나로써 합당치 않다. 이제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 이 병고를 넘겨, 내 수명을 보지保持해야 하겠다.’ 그 후, 병에서 회복하신 뒤 얼마 안 되어, 부처는 거처에서 나와, 그 집 그늘에 펴 놓은 자리에 앉으셨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와 한 쪽 옆에 정중히 앉아서 말씀을 드린다.

“거룩하신 분이여, 지금 부처님의 회복하신 모습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병고를 겪으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 타이름이 없이 열반에 드시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무슨 타이름을 나에게 기대하는가. 나는 안팎 없이 가르쳐왔다. 여래는 주먹에 감추는 것이 없다. 여래는 그가 교단을 지도한다거나, 교단이 그에게 의지한다는 생각을 아니 한다. 무엇 때문에 그가 교단에 타이를 것이 있겠는가. 오,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어 노쇠하였다. 인생 여로를 거쳐 노령에 달했다. 내가 지금 여든 살이다. 아난다여, 마치 헐어빠진 수레를 가죽 끈을 매어 끌어가듯이, 이 여래의 몸도 가죽 끈 덕택으로 끌어간다. 그렇지만 여래는 세상만사에 마음을 쓰지 않고, 모든 느끼는 바를 초월하여,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리하여 그 몸이 편안하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네는 자신에게 등불이 되어라. 자신에게 의지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불법을 등불로 하여, 의지하여라.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아난다여, 비구는 몸가짐에 마땅히 정신을 가다듬어, 세상사에 탐욕과 우려함을 없애라. 느낌에도 모든 세상 일에 정신을 가다듬어, 욕망과 걱정함을 없애라. 마음가짐에도 늘 정신을 가다듬어, 모든 탐욕과 두려움을 없애라 …. 아난다여, 누구나, 지금이나 내 사후에 자신을 등불로 하여 의지하고, 불법을 등불로 하여 의지하여 정진하면, 비구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부처는 벨루바 마을에서 베살리 거리로 가신다. 아침에 거리에서 걸식하고 돌아와, 식사를 마치시고 나서, 낮 휴식을 위해 챠팔라 영지靈地로 가신다. 아난다가 돗자리를 들고 따른다. 부처가 돗자리에 앉으신 뒤에, 아난다는 한 쪽 자리에 정중히 앉았다.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베살리는 참 아름답구나! 우데나 영지랑, 고오타마 영지랑, 일곱 망고나무 영지랑, 챠팔라 영지랑, 다 어찌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부처는 여래의 네 가지 신통력에 관해 말씀하시며, 그 신통력으로 여래는 원한다면 그의 수명만큼, 이 세상에 머물 수 있고, 또 그보다 더 오래 머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 “거룩하신 분이여, 제발 중생의 복락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령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무십시오.” 하고 간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난다가 악마 마라의 힘에 잡힌 탓이었다. 부처는 여래의 네 가지 신통력에 관해 세 번 말씀하시고 나서 아난다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신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악마 마라가 부처의 옆에 나타나, 부처님께 곧 열반에 드시기를 권한다. 마라와의 대화 끝에, 부처는 마라에게 말씀하신다.

“마라야, 너무 성급히 굴지 마라. 여래는 얼마 안 가서 열반한다. 지금부터 석 달 후에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다.”

악마 마라가 물러간 뒤에 아난다가 돌아와 부처님께서 악마와 나눈 대화 말씀을 듣는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석 달 후에 열반에 드신다는 말을 듣고, 부처님께 간원한다.

“거룩하신 분이여, 제발 중생의 복락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령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무르십시오.”

“아난다여, 그만두어라. 여래에게 간청하지 마라.”

아난다가 부처님께 같은 말로 두 번 더 간원한다.

“아난다여, 자네는 여래의 지혜를 믿지 않는가.”

“아니요, 부처님, 믿습니다.”

“그러면, 아난다여, 왜 여래에게 세 번이나 괴롭히는 말을 하느냐.”

부처는 앞서 세 번이나 네 가지 신통력을 말씀하실 때에 아난다가 그 뜻을 포착하지 못한 것을 책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신다.

“그런데, 아난다여, 내가 전에 늘 말하기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만간에 생별하거나 사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이 세상에 난 것이 죽지 않고, 만든 것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존재하는 것은 다 소멸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건 이치에 어긋난다. 그런 생각을 여래는 다 버렸다. 여래는 존재의 근원을 포기했다. 그래서 여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기를 선언하였다. 그가 더 살기 위해 그걸 철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난다여, 이제 마하바나의 쿠타가라 강당으로 가자.”

쿠타가라 강당에 도달한 뒤, 부처는 아난다에게 베살리 인근에 있는 사문들을 그 강당에 모이게 하라고 지시한다. 다들 모이자, 부처는 단상에 올라 좌석에 앉는다.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내가 파악한 진리를 그대들에게 가르쳐왔다. 그 진리를 마음에 간직하여 염두에 두고, 실천하여, 청정한 행실이 오래오래 성하도록 하여라. 모든 중생의 복락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령과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지금 말하노니, 모든 현상은 왔다 가게 마련이다. 다들 최종의 목표를 향해 정진할지어다. 가까운 장래에 여래는 적멸한다.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부처는 제자들과 같이 베살리를 떠나 반다 마을로 간다. 거기서 사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비구들이여. 우리가 네 가지 이치를 알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들이나 나도 오랫동안 유전 윤회해왔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계율, 성스러운 정신통일, 성스러운 지혜, 성스러운 해탈이다. 이들 이치를 깨달으니, 생존에 대한 집착이 근절되어,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

반다 마을에 묵으시는 동안, 부처는 이 네 가지 이치에 관해 논하시고, 그 이치의 이해와 실천이 가져오는 유익을 말씀하셨다. 그 이치는 탐욕, 생존, 견해, 무명에서 오는, 모든 오염에서 벗어나게 한다. 부처는 파바에 도착하여, 대장장이 춘다의 망고 숲에 묵으신다. 춘다는 부처님이 계시는 데에 와서,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정중히 자리 잡는다. 부처님은 그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하시어, 그를 격려하시고 기껍게 하셨다. 춘다는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다. “거룩하신 분께서 내일 제자들과 같이 저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영광을 베풀어 주십시오.” 부처는 침묵으로 승낙하셨다.

다음 날 아침, 부처는 법의와 바리때를 들고 춘다의 집에 가신다. 식사 때, 부처는 춘다에게 “버섯 음식은 나에게만 주고, 사문들에게는 다른 음식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춘다여, 남은 버섯 음식은 땅에 파묻도록 해라. 지상에나, 마라의 천상에나, 브라만의 천상에나, 어느 신령이나 인간이건, 여래를 제외하고는 이 버섯을 제대로 소화할 자가 없다.” 하셨다.

남은 버섯을 땅에 파묻은 뒤에, 춘다는 부처님께 와서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하시어, 그를 격려하시고 기껍게 하셨다. 그리고 떠나셨다.

부처님은 식사를 마치신 뒤에, 이질로 심한 복통을 느끼셨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어, 고통을 견디시었다.

부처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이제 쿠시나라에 가자.”

부처는 쿠시나라에 가는 도중에 길가의 나무 아래에 가서,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내 겉옷을 네 겹으로 접어 여기 펴라. 나는 몹시 피곤하여 쉬어야 하겠다.” 하셨다. 아난다가 펴놓은 법의에 앉으시고, 부처는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신다.

“거룩하신 분이여. 저 개울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오백 수레가 건너가서 물이 매우 흐려 흙물입니다. 카쿠타 강이 멀지 않으니, 그 강물이 깨끗하고, 물에 쉬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물을 마시시고 또 물에 몸을 식히십시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나는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두 번 더 말씀하신다. 아난다가 바리때를 들고 개울로 내려갔다. 아, 웬일인가! 조금 전까지 흐렸던 물이 맑게 흘러가지 않는가. 아난다는 여래의 신기한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난다는 물을 바리때에 떠서 부처님께 가져오고, 말씀 드렸다. “여래의 힘은 얼마나 신비스러운지요! 제가 개울에 내려갔더니, 조금 전까지 흐렸던 물이 아주 맑게 흘렀습니다. 부처님, 어서 물을 마시십시오. 복 받으신 분이여, 물을 마시십시오.”

부처님은 그 물을 마시셨다.

드디어 부처와 아난다는 쿠시나라의 우파밧타나에 있는 말라 족의 사라나무 숲에 도달한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여기 두 사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해서 평상을 마련하여라. 나는 몹시 피곤하다. 누워 쉬겠다.”

아난다는 시키는 대로 평상을 두 사라나무 사이에 놓았다. 그러자 부처는 오른쪽으로 누워, 한 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얹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아난다는 부처님께 묻는다.

“거룩하신 분이여, 우리는 여래의 유해를 어떻게 모셔야 합니까?”

부처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유해를 염려하지 마라. 내가 바라노니,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목적을 향해 오직 정진할지어다. 귀족들, 브라만 족들, 그리고 거사들 중에는 여래를 신봉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여래의 유해를 잘 처리하리라.”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래의 유해 처리 이야기를 들은 뒤에 그의 거처에 물러가, 문의 인방引枋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그의 마음에, ‘아, 나는 아직도 구도의 길을 밟는, 배우는 몸이다. 나를 사랑해주신 스승은 이제 입적하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는 사문들에게 “아난다는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 부처는 한 제자에게 “어서 가서 아난다를 찾아 내가 부른다고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아난다가 나타나, 부처님 옆에 앉는다.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그만두어라, 아난다여. 울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내가 벌써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만간에 생별하거나 사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이 세상에 난 것이 죽지 않고, 만든 것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존재하는 것은 다 소멸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난다여, 자네는 오랫 동안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여래를 모셔왔다. 참 잘 모셨다. 이제 공부에 정진하여라. 자네도 모든 오염에서 깨끗이 벗어나리라.”

부처가 사문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혹시 부처에 관해, 혹은 그의 가르침에 관해, 혹은 수도에 있어, 의심 가는 것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주저 없이 나에게 물어라. 그래서 나중에 스승이 바로 면전에 계실 때에 차마 거룩하신 분에게 묻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물어라.”

부처가 세 번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때마다 모든 사문들은 잠잠하다. 세 번째 물으신 뒤에, “비구들이여, 아마 그대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서 질문하지 않는가 보다. 마치 동료들에게 묻듯이 질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난다가 말한다. “참, 놀랍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 교단 전체에 부처나 그의 가르침이나, 혹은 수도에 관해 의심 갖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자네는 순전한 믿음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여래는 이 교단 전체에 부처나, 그의 가르침이나, 혹은 수도에 관해 의심 갖는 자가 없음을 잘 안다. 이 교단의 오백 명 중에 마지막으로 귀의한 자도 이제는 번뇌를 벗어나서 최종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이제, 비구들이여, 들을지어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모든 현상은 무상이다. 다들 성도를 이룰 때까지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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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개괄적인 코멘트를 하겠다. 필자는 『유행경』을 읽을 때, 무엇보다 80세의 노구를 끌고, 노쇠와 병고를 겪으면서 이곳저곳을 찾아가는 부처의 인간적 모습을 인상 깊게 본다. 이 경은 특히 여러 곳에서 부처가 그의 정신을 가다듬음으로써 노쇠와 병고에서 오는 고통을 견디어냄을 보고한다. 이 면은 우리가 특히 젊은 고타마가 신병과 노사의 고생스런 인생에 대해 고민한 끝에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한층 더 뜻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부처의 이 마지막 걸음은 인생고의 궁극을 몸으로 겪으면서 바른 마음가짐으로 견디어 나가는 걸음이었다.

부처는 우기 안거 중 병에 걸렸을 때 “정신을 가다듬어 고통을 견디며, 병에서 회복하셨다.” 그 후 부처가 대장장이 춘다의 집에서 버섯을 잡수시고, 이질로 심한 복통을 느끼셨을 때도 역시 “정신을 가다듬어, 고통을 견디시었다.” 또 부처가 임종하는 장면을 상기하자. 부처는 아난다가 두 사라나무 사이에 놓은 평상에 눕고서는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앞에서 부처가 재가자에게 설하시는 말씀이 사문들에게 하시는 설법의 내용과 다름을 지적하였다. 이는 부처 자신이 듣는 자들의 능력에 따라 다른 설법의 방편을 쓰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법화경法華經』의 제2장 「방편품方便品」 끝 부분에서 부처는 사리붓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리붓타여,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의 법도가 이와 같다. 만억의 방편으로써 (근기를) 따라 법을 설하신다.”

『법화경』은 제 3장 「비유품譬喩品」에서 부처의 많은 방편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비유를 쓴다. 큰 집에 불이 났다. 그러나 그 집의 많은 아이들은 저마다 노는 데 정신이 없어 집 밖으로 피하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각각 좋아하는 장난감을 약속하면서 집 밖으로 나오게 한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방편을 쓴다.

끝으로 부처가 아난다를 데리고 챠팔라 영지에 가셨을 때의 에피소드를 상기하자. 그 첫 장면에서 부처는 아난다에게 여래의 신통력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여래는 원한다면 그의 수명만큼, 이 세상에 머물 수 있고, 또 그보다 더 오래 머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난다는 부처님께 더 오래 머무시라고 간청하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서는 악마 마라가 나타나 부처님께 곧 돌아가시라고 권한다. 부처는 마라에게 석 달 후에 열반한다고 선언하신다. 마라가 퇴장한 뒤에 아난다가 다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아난다는 부처님에게서 석 달 후에 입적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무르시기를 간원한다. 부처님은 앞서 신통력을 말씀하셨을 때에 아난다가 그렇게 간청하지 않은 것을 책하시면서 그것은 아난다의 실수였다고 하신다. 거듭 그의 “죄”라고 부르시기도 한다.

학자들은 이 에피소드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특히 부처와 마라와의 대화를 허구한 것으로 읽는다. 예를 들면,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장(chapter)의 전제는, 부처가 그렇게 위대한 분이었다면 왜 사망하느냐 하는 반불론자反佛論者들의 질문이나 불자 중 회의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생길 질문을 예상하고 쓴 답이다. 여기에 암시된 답은 부처는 자신이 원했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부처는 어떤 힘과 지혜와 자제력이 있어서, 더 오래 살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교수는 부처가 마라와의 대화에서 석 달 후에 돌아가신다는 결심을 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이야기는 (이 경의) 여러 텍스트에 장황하게 나온다, 부처의 적멸 후에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다. ‘부처는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니, 영원불멸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보통 인간처럼 사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즉 그의 열반의 결의에는 반드시 그럴 이유가 있으리라. 그는 그 자신의 결의에 의해 입멸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위대한 죽음의 경』(곧 『유행경』)에 중요한 테마가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이 에피소드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 두 학자들의 의견과는 좀 다르다. 두 학자 다 이 경이 이와 같은 허구한 이야기를 쓴 이유로써 부처가 위대한 사람이었으니 보통 사람처럼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세상 사람들의 관념을 전제한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은 영원불멸할 존재라는 통념은 근본적으로 부처의 열반과는 어긋나는 생각이다. 부처는 이미 생사生死의 피안彼岸에 달한 자로 생사를 초월하지 않았는가. 위대한 인간은 영원불멸하리라는 관념은 실상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리라. 부처는 이미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러니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풀렸다. 그러므로 생사를 초월한 부처에게는 영원불멸의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언제 열반하고 안 하느냐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부처가 더 오래 살지 않고 석 달 후에 돌아가신다는 것이 문제될 수 없다.

한편 필자는 부처의 결의를 단순히 인간적으로 고려하고 싶다. 특히 독자는 부처가 병 중에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상기하자.

“오,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어 노쇠하였다. 인생 여로를 거쳐 노령에 이르렀다. 내가 지금 여든 살이다. 아난다여, 마치 헐어빠진 수레를 가죽 끈을 매어 끌어가듯이, 이 여래의 몸도 가죽 끈 덕택으로 끌어간다.”

우리가 여러 에피소드에서 거듭 본 바와 같이 부처는 어디까지나 그 몸가짐에 있어서 다른 인간과 같이 병고를 겪고, 피로를 느끼고, 목마름까지 느끼는 자였다. 지금 가는 걸음에서 부처는 노쇠하여 그의 “늙어빠진” 몸을 겨우 끌고 다님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 자신 “인생 여로”의 마지막 단계에 달하였음을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과거의 업과를 지니고 인간의 육체를 갖고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시인하는 것이겠다. 부처는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는 것이다. 왜 그는 마라에게 석 달 후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마 인간의 몸으로 80년 살았으면 이제 육체를 벗어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특히 생존에 애착심이 없는 부처가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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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데 주로 사용한 텍스트는 Mahaparinibbanasuttanta의 일본어 번역, 中村元 譯, 『ブツダ最後の旅』 (東京: 2016)과 영역본, T. W. Rhys Davids, trans., Dialogues of the Buddha , Part II (Oxford,2002)이다.

 


김하풍
1928년 함북 명천 출생.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독문학 전공.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클라크대학과 보스턴대학에서 철학 전공. 철학박사(1964). East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23년간 철학교수, 1991년에 정년 퇴직. 현재 Oregon 주에 거주. 전문 분야는 서양철학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선禪과 중국 고대 사상 연구에 전념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미의 기쁨』, 『신을 보는 길 부처를 보는 길』 등이 국내에 출간된 바 있다 .